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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의 성생활을 엿보다

 

조선 양반 남성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객지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아름다운 글귀를 써낸 사례는 많이 보입니다만, 자신의 부인을 위해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부른 기록은 극히 드뭅니다.

 

‘가족끼리는 로맨스는 하지 않는다’라는 걸까요. 그들의 로맨스 대상, 더 정확히 말하면 성생활의 대상은, 아름다운 육체를 소유한 ‘젊은 여성’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아내와의 합방은 로맨스라기보다, 재생산을 위한 ‘생산직 업무’에 가까웠던 거죠. 그나마도 아내의 나이가 중년을 넘으면 생물학적인 사랑의 시효가 만료되었습니다.

 

심지어 아내와 가까이 살아도, 사교 모임 때문에 종종 기생집을 찾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부부싸움이 대판 벌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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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때 과거에 합격해 명종 때까지 관료로 일한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일기에 그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문건은 잘 나가던 관료였지만, 역모 사건에 휘말려 고향 성주로 유배를 가는데요. 유배지에서의 입지가 워낙 탄탄해, 틈만 나면 지역의 힘 좀 쓴다는 사람들과 사교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문건이 기생집에서 자고 오는 일이 반복되자, 아내 김돈이(金敦伊, 1497~1566)는 그야말로 개빡칩니다. 이문건의 일기를 한 번 보시죠.

 

 

1552년 11월 21일 - 『묵재일기(默齋日記)』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내가 화를 내면서 욕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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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먼 곳으로 간 것도 아니면서, 어째서 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고 기생이 잠든 남의 집에서 잘 수가 있어? 이게 나이 먹을 대로 먹은 노친네가 할 짓이야? 어떻게 된 게, 남편이란 사람이 아내가 속상해서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건 신경도 안 쓴단 말이냐고!”

 

라고 쏘아댔다. 그 말을 듣자 듣자 하니까 나도 참을 수 없어 몇 마디 쏘아붙였더니, 점점 격해져만 갔다. 밤이 되어서야 물에 밥을 말아 먹고 누웠다. 아내도 피곤한지 옆에 누웠는데, 여전히 기생 ‘종대’를 들먹이면서 핀잔을 줬다.

 

이문건의 잦은 기생집 출입이 지속되자, 아내 김돈이(金敦伊, 1497~1566)는 뚜껑이 열려 이문건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욕을 퍼붓습니다. 아내의 속사포 공격에 ‘삔또’가 상한 이문건이 몇 마디 받아치자, 부부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습니다. 결국, 그날 밤 이문건은 아내의 저녁상을 받지 못한 채, 혼자 밥에 물을 말아 먹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대판 싸웠는데도 이문건은 기생집을 계속해서 방문합니다. 마치, 영업직 사원의 접대랄까요. 물론 이문건은 주로 접대받는 쪽이었지만, 지금도 ‘사회생활’이라는 이름 아래 (가치 판단을 떠나) 성매매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지역의 사족들과 교류해야만 했습니다. 지역의 엔터테인먼트를 책임지는 필수적인 존재, 기생의 참여도 ‘그들에게는’ 필수적이었고, 자연히 ‘2차’를 나가는 일도 벌어졌죠.

 

결국, 남편에 대한 미움으로 드러누운 김돈이는 어느 날, 2차 부부싸움을 개시합니다.

 

1552년 11월 24일 - 『묵재일기(默齋日記)』

 

아내가 아픈 몸으로 내게 와서 말했다.

 

“듣자 하니, 기생 종대가 당신이랑 친하다면서 이제 당신은 자기한테 매인 몸이라는 얘기를 한다고 난리더라. 또 당신이 종대에게, ‘너를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안정되지 않는데, 어떻게 한 번을 날 찾아오지 않는 것이니?’라고 은밀히 말했다며? 아주 작정을 했네”

 

아내가 이렇게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로 쏘아붙이니,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게 다 아내의 노비들이 이상한 풍문을 주워듣자마자 아내에게 쪼르르 달려가 쓸데없이 일러바치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더이상 싸우기 싫었던 나는, 

 

“비록 첩을 사랑했더라도 만일 당신의 마음에 상처가 된다면 끊는 게 옳은데, 하물며 동침하지도 않은 기생을 끊어내는 게 뭐가 어렵겠어. 다시는 나의 술 시중을 들지 말라고 전할게”

 

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내는 멈추지 않고,

 

“기생인데 어떻게 당신 옆에 꼭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을 끊을 수 있겠어?”

 

라며 의심과 질투를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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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잘못했습니다.

 

김돈이는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했습니다. 특히, 김돈이가 시집올 때 함께 온 노비들은 그녀의 눈과 귀가 되었고, 이문건이 ‘어느 기생과 함께 술을 마셨다’라는 시시콜콜한 정보가 모두 그녀에게 흘러 들어갔죠. 그런데 기생 종대가, ‘이문건 어르신이 글쎄 나를 아주 총애하셔’라며 소문내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인내심이 폭발하며 부부싸움 2차전을 개시하죠.

 

이렇게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김돈이는 “여자로 태어난 내 죄가 크다”라며 자신의 삶을 한탄했습니다. 자신도 하고 싶은, 이루고 싶은 꿈이 많았으나 여자의 몸이어서 하지 못했다고 토로하죠. 

 

또한, 자신과 남편 모두 노년의 나이를 향하고 있음에도, 남편에게는 아직도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사랑할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이 분통 터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이문건은 ‘그 종놈들 때문에 사달이 난다’라며 투덜대다가, 결국 기생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김돈이나 송덕봉(2편 참조)이 남편에게 대놓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던 것은, 두 사람이 살던 시대가 임진왜란 이전이어서 가능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의 조선은 전쟁으로 무너진 사회 질서를 다시금 공고히 하고자 이전보다 훨씬 보수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기생집을 가는 일, 첩을 얻는 일, 자유로운 성생활을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웠죠. 물론, 아내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는 것은 똑같았지만요.

 

 

문란했던 성생활의 리스크

 

그런데 이문건은 과연 기생들과 동침했을까요? 적어도 이문건의 주장에 의하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성병에 걸릴 것이 염려되어’ 기생과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자유로운 성생활이 지니는 리스크를 두려워했던 거죠.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 불특정 다수의 여성과 하루가 멀다고 즐긴 무관 박취문(朴就文, 1617~1690)은 어느 날,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는 소식을 접합니다.

 

1645년 1월 2일 - 『부북일기(赴北日記)』

 

‘건리개’라는 유명한 기생에 대한 소식을 듣고, 눈보라를 뚫고 찾아가 그녀와 함께 밤을 보냈다. 깊은 밤, 그녀를 품에 안고 이야기를 나눌 때, 그녀가 말했다.

 

“선달님, 지난번에 보니, 선달님 근처에 기생 연향이가 있었습니다. 혹시 그녀와 동침하신 적이 있나요?”

 

“내 한 번 그리했지”

 

나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갑자기 옷을 입고 앉더니 큰 소리로 통곡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연향이가 매독에 걸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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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낙심하여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박취문과 그 동료들의 성생활은 매우 자유로웠습니다. 남자 둘과 여성 한 명이 쓰리섬을 하거나, 또는 박취문이 두 명의 기생과 쓰리섬을 했죠. 또 자신의 동침 상대가 자유롭게 다른 사람의 동침 상대가 되고, 동침 상대를 상급자와 공유하는 일도 예삿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란한 성생활은 그 끝이 좋지 않은 법. 박취문은 매독을 앓고 있는 여성과 동침한 후, 다른 기생과의 잠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시 매독은 치료가 쉽지 않은 병이어서 박취문이 ‘크게 낙심’할 만했죠. 요즘의 시선으로는 곱게 볼 수 없지만, 박취문 입장에서는 기생의 임신 소식보다 성병 소식이 더 가슴을 철렁 앉게 했을 것입니다.

 

자유로운 성생활이 품고 있는 리스크는 고관대작이라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선조 때 학문으로 이름 높았던 학자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을 기억하시나요? 지난 2편(링크)에서 등장했었죠. 시부모의 삼 년 상을 혼자 치른 아내를 두고, 유배지에서 15살 연하의 첩과 살림을 차렸던 전과가 있음에도 혼자 간 발령지에서 3, 4개월 정도 여색을 참은 것을 편지로 자랑하다 아내 송덕봉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죠.  

 

아내의 꾸지람이 담긴 편지를 받은 유희춘은 다음 해인 1571년 2월부터 10월까지 전라감사를 역임하게 되는데, 이때도 가족들은 고향에 있는 채로 홀로 부임합니다. 그런데 아내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받은 걸 홀라당 까먹은 건지, 바로 여러 방기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결국, 그는 임질에 걸렸고, 그가 집으로 돌아온 후 온 가족에게 전파됩니다. 당연히 아내 송덕봉 또한 임질에 걸려 고생했습니다.

 

이보다 더 심한 사례도 있습니다. 『묵재일기』와 『미암일기』에는 방탕한 성생활 끝에 건강,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던 사례가 종종 등장합니다. 

 

한 달에 90번이나 섹스한 결과 기(氣)가 맛이 간 사람, 추운 날 섹스하다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보이죠. 특히, 임질로 사망한 사람들은 부지기수였습니다. 물론 꼭 성관계로 전파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생과 빈번히 접촉한 남성들이 주로 걸린 것 또한 사실이죠.

 

 

온통 ‘하지 말란’ 성교육이 만든 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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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잘못되고 도를 넘은 문란한 성생활이 오히려 빈번했던 건, 조선 시대엔 지금과 같은 보건의료적 지식에 기반한 성교육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지금도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들이 받았던 성교육은, 대체로 ‘아껴 써라’라는 것 투성이였죠.

 

“성교를 함에 있어서 금기하는 때가 11가지가 있다.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하지 말 것, 배부를 때, 취했을 때, 기쁨과 노여움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질병이 회복되지 않았을 때, 먼 길을 걸어 피로에 지쳤을 때, 범필(犯蹕 임금이 행차하는 길을 범함)하고 출행(出行)했을 때, 대소변을 금방 보았을 때, 새로 목욕을 한 뒤와 여인의 생리 중, 그리고 정이 없으면서 억지로 하는 것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신기(神氣)가 혼몽해지고 심력(心力)이 부족해지며, 사체가 파리해져서 온갖 병이 생기게 하는 것이니, 특히 그러한 점에 삼가야 한다.”

 

- 『산림경제(山林經濟)』

 

이것 외에도 온통 “하지 마”라는 얘기밖에 없습니다. 섹스란 아름다운 것, 섹스란 즐거운 것, 이런 얘기는 찾아보기 힘들고, 있다 하더라도 ‘미친놈의 헛소리’ 취급을 받던 사회가 조선 사회였죠. 그런데 남녀를 불문하고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제공되는 성교육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임신과 출산을 잘 할 수 있을까?’

 

였습니다. 온갖 민간신앙, 온갖 민간요법, 온갖 한의학 지식, 온갖 택일 지식, 온갖 역학(易學)이 동원되어, 왕부터 노비까지 좋은 자손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여성과의 안전한 섹스, 즐거운 섹스, 그리고 책임 있는 섹스를 배울 기회는 없었고,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인품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나마 유희춘은 ‘책임 있는 쾌락’을 즐긴 편에 속합니다. 그는 그래도 외도로 낳게 된 자녀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거든요. 그러나 대부분 남성에게 아내 외의 여성, 그리고 혼외 자녀는 책임의 영역에서 멀었습니다. 특히, 지역 관아에 몸이 묶인 기생들은 아무리 관료라 하더라도 쉽게 빼 올 수 없었고, 이러한 제도는 ‘책임 없는 쾌락’의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의 교육 또한 그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집중되었습니다. 성관계도 마찬가지구요. 부부관계는, 때론 그저 임신과 출산을 위한 번식행위였고, 처음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이 끼어들기는 어려웠습니다. 애시당초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결혼하는데, 가능할 리가 없죠. 물론 돈독한 부부도 꽤 있었지만, 불타오르는 강렬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던 사이가 양반의 부부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존재하고,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발현합니다. 그들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고, 사랑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던 존재가 기생이었죠. 물론, 요즘의 ‘사랑’과는 윤리적 기준이 매우 다르지만, 그들에게 있어 기생과의 만남이란, 적어도 ‘사랑을 할 때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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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관계가 사그라들자, 누군가 외도를 통해 불꽃 같은 사랑을 다시 찾는 일은 요즘에도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기록이 재밌는 까닭은, ‘양반’이 남긴 ‘조선’의 기록이기 때문이죠. 남녀 간에는 항상 질서가 있어야 하고, 여성은 정절을 지켜야 한다고 수없이 강조했던 바로 그들이, 사실은 성과 사랑 앞에선 너무나 무력했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재밌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사는 조금 다른 의미로 힘들었습니다. ‘이런 단어를 쓰는 게 맞을까?’, ‘이러한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와 같은, 자기검열 혹은 학습된 교정의 결과가 매 순간 느껴졌기 때문이죠. 성에 대해서 기준 없이 정도를 넘어 마구 오픈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요즘의 분위기를 보면 10년, 15년 전보다 훨씬 더 엄격해진 것 같습니다. 당연히 누군가의 쾌만큼, 누군가의 불쾌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검열할 부분이 너무 많아 이런 내용을 떼어내고 저런 부분을 떼어내다 보면, 어떻게 과거 역사를 그대로 전달하면서도 독자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성에 대해 올바른 관념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걸 행하는 방식이 성에 대한 표현을 더욱 억누르는 방식이라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성에 대해 온통 “하지 마”라고 교육받았던 조선 양반들의 성생활이 이상한 방향으로 엇나갔듯이 말이죠. 

 

올바른 성 관념을 추구하는 방식은 성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오픈하며 공유하고 논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몰랐던, 그래서 ‘가족끼리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다’라는 전통의 뿌리가 되어버린, 조선 양반들이 뚫어 놓은 궤도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끝>

 

 

참고문헌

 

박영서,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2021, 들녘)

박영서,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020, 들녘)

문숙자, 「조선후기 양반의 일상과 가족내외의 남녀관계 - 노상추의 일기를 중심으로 -」, 고문서연구 28호, 2006.

박동욱, 「조선시대 일기에 나타난 성 의식 -보이는 성, 숨겨진 성-」, 漢文學論集 39집, 2014.

이성임, 「16세기 양반관료의 外情 -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 고문서연구 23호, 2003.

최지혜, 「17세기 무반(武班)의 일기 소재 시조 작품 연구 - 『부북일기(赴北日記)』·『송계잡록(松溪雜錄)』을 중심으로」, 국내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2021.

 

 

 

 

편집부 주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에 

필자의 책,<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새로 나온 후속작,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절찬리 판매 중이다. 

 

안 사줄 것 같이 하다가 기사가 올라오면

슬그머니 주문하는 샤이 독자 여러분 덕에 

필자는 눅눅한 골방에서 

조금 덜 눅눅한 골방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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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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