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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의 후회

 

2012년 12월 19일 새벽 5시 55분. 나는 투표소 대기줄에 서 있었어. 18대 대통령 선거일을 앞두고 밤새 한숨도 못 잔 상태로 일찌감치 투표소에 나와봤더니 내 앞에 줄 선 사람이 네댓뿐이었지. 낮 시간 동안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동네에서 친구를 만나 동네 호프집에 들어갔던 게 출구조사 결과 발표 30분 전이야.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후로 우리는 서로 별말이 없었어. 8시가 채 되지도 않아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못 잔 잠을 실컷 자버렸어. 그날부터 못해도 2주는 TV 뉴스와 포털 사이트를 끊었던 것 같아. (여담이지만 그로부터 반 년쯤 지난 후에 내가 딴지일보로 출근을 하게 될 줄은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지. 나중에 다른 분들께 ‘그날’ 벙커 분위기를 들었는데 내가 겪었던 그날 저녁과 많이 비슷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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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3일, 나는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들고 서 있었어. 3차 촛불집회부터 참여하기 시작해 어느덧 6차까지 4주를 꼬박 나온 거야. 이날 집회에 참가한 인원은 232만 명(주최 측 추산)이었다고 해. 추운 겨울에 피 같은 주말 저녁을 반납하고 나온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청와대 안에 계신 저분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다가 문득 4년 전 일이 뒤늦게 후회됐어. 뭐가 후회됐냐면,

 

나는 열렬히 응원하는 관중일 뿐이었다는 거.

 

공은 운동장에 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정치 고관여층이야.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마찬가지였지. 정치 고관여층이 아니고서야 대선 전날 가슴이 떨려 밤을 지새울 수가 있었겠나. 그만큼 절박해서 선거 기간 내내 쏟아지는 모든 여론조사 결과를 찾아봤고, 매일 뉴스 정치 기사를 훑었고 팟캐스트도 열심히 들었던 거지.

 

딱 거기까지였어. 가슴으로 열심히 응원하고 함께 울고 웃었던 그뿐, 내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를 독려한다거나 가까운 누군가를 설득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 어쩌다 알고 지내던 사람이 정치 지향이 나랑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면 반가워할 뿐이었지. 

 

나는 내가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기원하며 내 표 한 장 끊어다 경기장을 찾아 응원했던 열렬한 팬이었던 거지. 그 안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 으쌰으쌰했던 거야.

 

선거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말을 하지. 스포츠는 전쟁에서 나왔다는 말도 있어. 진영을 나눠 승부를 겨루는 데에서 선거는 전쟁이고, 스포츠와도 닮았다는 생각이야. 내가 좋아하는 프로 스포츠 팀을 응원하듯 선거에 임했고, 선거 결과에 따라 전쟁에서 진 것 마냥 낙담했던 나를 뒤돌아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거야. 그럼에도 나는 광화문 광장에 서서 4년 전 내가 열렬히 응원하는 관중이었던 것을 후회했어.

 

그토록 절박했다면 나는 관중이 아니라 선수가 되었어야 했어.

 

스포츠 팀을 응원하는 관중은 선수들에게 힘을 줄 수는 있어도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는 없지. 선거는 달라. 유권자는 승패를 뒤집을 수 있다. 자신의 한 표와 주변 사람을 독려하고 설득해서 얻는 표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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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사람이 정치 고관여층일 수는 없듯, 모든 유권자가 선수일 수는 없어.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을 탓하거나 비난할 일도 아니야. 오늘 이야기는 선거 결과에 절실한 사람에게만 해당한다는 걸 알아줘. 그만큼 절실하다면 본인이 선수가 되는 편이 자신을 위해서도 더 나을 거란 말이야.

 

우리 논에 물을 대자

 

요 며칠 하도 여론조사 결과로 시끄럽고 말이 많아서 꺼낸 말이기도 해. 커뮤니티 몇 곳을 훑어보니 여론조사 결과 때문에 우울하고 답답하다는 글이 부쩍 많이 눈에 띄더라. 그럴 수 있지. 그만큼 절박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문제는 그다음이야. 여론조사 결과 때문에 우울하고 답답한데, 그다음에는 뭘 어떻게 할 거냐는 거야. 

 

여론 조사 방법과 조사 기관을 분석할까? 그들의 편향성에 침을 뱉고, 언론에 돌을 던지면 될까. 그 또한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런 게 ‘팬’의 자세라고 생각해. 편파 판정에 당한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을 생각해 봐. 억울하고 분해도 심판 욕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는 않잖아. 그냥 본인이 더 압도적으로 이길 생각을 하지. 지금 판에서는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다. 내 힘으로 승패를 가를 수 있는 부분에 더 집중하자. 이런 생각을 한다는 말이지. 그게 바로 ‘선수’의 마음가짐 아닐까.

 

그러니 여론조사 결과에 실망한 나머지 경기를 포기하거나 환경을 탓하며 시간을 낭비하지는 말자. 그런 건 전문가들에게 맡겨도 충분해. 이 글을 읽는 본인이 정치 고관여층이고, 선거에 절실하고, 그래서 여론조사 결과에 우울하다면 그냥 밭을 갈아. 주변에 같은 마음으로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독려해줘. 투표를 포기하려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설득하고, 가짜 뉴스로 오해하고 있는 가족이 있다면 정보를 드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막무가내로 화만 내지 말고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거부감을 갖지 않고 내 말을 경청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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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합>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3.53% 차이로 졌어. 100명 중 대략 48명이 문재인 후보에게 표를 줬는데 그 가운데 단 두 사람이 각각 한 사람씩만 설득했으면 뒤집히는 결과야. 선거를 둘러싼 환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어. 오히려 예전보다는 그래도 나아졌으면 나아졌지. 선거가 3주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환경을 바꾸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지금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유권자가 본인이 선수라고 자각하느냐에 있다고 봐.

 

여론조사에 장난질이 있었든 없었든 큰 폭으로 벌어진 여론조사 결과를 가지고 대세론을 만들고 싶어 하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이 원하는 건 더 많은 사람들의 포기, 그래서 얻는 더 쉬운 승리일 거야. 그러니 여론조사가 얼마나 민심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말고 그냥 밭을 갈아. 여론조사를 이기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야. 여론조사는 관중을 위한 응원 도구일 뿐이야. 선수는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다. 

 

농사를 망쳤다간 당장 굶어 죽게 생긴 사람은 눈앞에 밭을 두고 하늘만 쳐다보지 않아. 당장 손에 뭐라도 쥐고 밭에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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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