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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책을 내게 된 빵꾼입니다. 눅눅한 골방에서 조금 덜 눅눅한 골방으로 옮겨가려고 발악하는 중이죠. 새로운 책은 복지라는 틀로 조선을 바라본 이야기입니다. 기사로나마 살짝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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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곗바늘을 1392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즉위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챙기는 일은 왕의 정치로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일이니, 당연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줘야 할 것이다.”

 

환과고독은 독신 남성, 독신 여성, 유기아, 독거노인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에서 가장 취약한 사회계층으로 꼽혔던 사람들이죠. 이는 곧 ‘복지’를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 중 하나로 삼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환과고독, 그들 각각의 상황에 맞는 정책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요? 현대의 복지 정책 분야처럼 아동복지, 노인복지, 여성 복지, 장애인 복지, 그리고 특수 계급이었던 노비 복지까지 다섯 개 영역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디벼봅니다.

 

 

아동복지

 

1. 아동복지 정책의 초점 : 유기아

 

집을 잃은 아이는 양육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워서 맡기고 관아에서 옷감을 지급한다. 10세가 넘어서도 돌려달라고 신고한 자가 없는 경우에는 양육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노비로 삼는 것을 허락한다. (1458년부터 시행)

 

-『대전통편(大典通編)』 「혜휼(惠恤)」

 

조선의 아동복지 정책은 주로 유기아(遺棄兒), 즉 부모를 잃은 아이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아이에 대한 1차적인 복지 책임은 가족에게 있으니, 가족을 잃은 아이에 한해서만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의도였죠. 따라서 현대의 아동복지 정책과 비교하면 약소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시대를 고려하면 유기아에 대한 복지 체계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혁신적이죠.

 

물론 현대인의 시선으로는 ‘노비로 삼는 것을 허락한다’는 규정을 과연 복지 정책으로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가족을 잃고 노비조차 되지 못한 아이들이 길거리를 헤매다 굶어 죽거나 각종 전염병으로 안타깝게 생명을 잃는 사례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왕들이 유기아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정책 변천 흐름에서도 드러납니다.

 

-1485년 『경국대전(經國大典)』 : 유기아들은 나라에서 의료와 식량을 지급한다. (성종 16년)

 

-1671년 : 유기아를 거둔 자는 관청에 알리거나, 수양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수양을 허가한다. (현종 12년) 

 

-1695년 : 흉년에 한해 관청에서 유기아를 임시 보호하고, 수양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이의 친족 관계를 철저히 조사한 후 허가한다. (숙종 21년)

 

-1783년 『자휼전칙(字恤典則)』 : 유기아는 각급 관청에서 직접 보호한다. (정조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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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으로

통치의 기본이 되는 통일 법전이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선의 유기아 보호 정책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재난이 심화함에 따라 조금씩 보완되었습니다. 최초에는 아주 간단한 간접 복지로 출발했지만, 유기아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차츰 친족부양의 책임, 입양 절차, 입양 이후의 관리 감독, 국가의 직접 복지 등 다양한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정책이 구현되었죠. 길게는 수백 년의 터울이 있긴 하지만, 조선의 유기아 보호 정책 변화 과정은 장기적으로 정책을 보완해나가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2. 아동복지 정책에 가장 관심을 가진 왕 : 정조

 

특히 아동복지 정책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왕이 있었으니, 바로 정조입니다. 정조 시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아동복지 정책이 강화되었는데요. 정조가 관심을 가지고 국책사업으로 밀어붙였던 덕분에 관련 자료가 조선 왕조의 그 어느 시기보다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정조 재위기는 흉년과 기근 등으로 버려진 아이, 구걸하는 아이의 수가 급증하던 시기였습니다. ‘지방관은 이러한 아동들을 구조해야 한다’는 의무가 법률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음에도, 여전히 길거리에는 부모를 잃고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죠. 법조문이 형식으로만 남아 공무원들이 적극적인 행정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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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1783년(정조 7년) 유기아 보호 매뉴얼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발표했습니다. 몇 가지 지침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흉년에 구걸하는 아이는 10세까지,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는 3세까지 담당 부서에서 발견하는 대로 진휼청에서 보호한다. 구걸하는 아이는 추수 때까지만 보호하되, 버려진 아이는 흉년과 관계없이 지침에 따라 보호한다.

 

구걸하는 아이는 먼저 부모 등 보호자를 조사한 뒤, 보호자가 없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보호한다. 담당 공무원 등이 허위로 신고했을 때는 강력히 징계한다. 만약 보호하고 있는 아이를 찾으러 오는 보호자가 있다면, 보호자가 맞는지 상세히 조사한 후 아이를 데려가는 것을 허가한다. 그러나 다시 아이를 내보내 구걸시킨다면 보호를 재개한다.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자 희망하는 사람은 심사 후 허가하되, 단순히 임시 보호가 아니라 장기 입양을 원하는 자와 노비로 두길 원하는 자는 곧바로 허가한다. 단 보육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 권력을 동원해 아이를 빼앗으려는 자는 엄중히 벌한다. 임시 보호를 맡은 여성들 가운데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도 엄중히 문책한다.

 

간단히 요약한 것이지만, 현장의 상황을 꼼꼼하게 반영하면서도 실효성 있는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수혜 대상자의 환경을 판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가 버려졌는지, 아니면 단순히 부모를 잃어버렸는지 판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죠.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인데 숨겨놓고 노비로 키우는 사례가 적지 않았고, 남의 집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종종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성장한 후 친권 또는 노비 소유권을 두고 소송도 적잖게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막기 위해서라도 아이의 친권을 확인하는 작업은 중요했죠.

 

보호 이후의 삶도 고려했습니다. 거리의 아이를 노비로 두어 가혹하게 대하거나, 공방(工房)의 기술자 또는 승려로 키우는 것이 당시 민간의 풍습이었는데요. 정조는 보호 중인 아이가 일반 가정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임시 보호 중인 아이나 입양된 아이, 노비가 된 아이가 적절히 보살핌받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피드백하도록 지시했죠.

 

『자휼전칙』이 발표된 후, 1783년부터 1784년까지 1년간 다리 밑, 길거리, 시장통, 관청의 창고, 고갯길, 남의 집 대문 앞 등에서 발견된 아이들은 한양에서만 138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아동복지 정책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었죠. 

 

3. 한양의 유기아, 지방의 유기아

 

그렇지만 아쉽게도 전국의 유기아를 모두 보호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도 어사로 파견되었을 때 이러한 상황을 보고한 바 있죠.

 

〈임금님의 지침〉

 

지난번 발표한 매뉴얼에 따라 지방관이 유기 아동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지, 또 지역 관아에서 아동에게 지급할 곡식을 누군가 횡령하고 있지는 않은지 각별히 조사하고 처벌할 것.

 

〈경기도 어사 정약용의 보고서〉

 

제가 직접 살펴봤습니다만, 시골의 풍속이 서울과는 달라 애초에 아이를 유기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수령들도 꼼꼼히 찾지 않고, 그저 월말에 형식적으로 보고할 뿐이었습니다. 일부 수령은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유기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길가를 돌아보고 말 것이 아니라, 마을 안에서 꼼꼼히 유기아를 조사하라. 특히 부모가 모두 죽거나 보살펴줄 친척이 없어 마을 안에서 기르는 아이가 있다면, 보호 대상자로 편입하여 지침에 따라 보호하라.”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계(啓)」

 

정약용이 직접 살펴보니, 지방에서는 정조가 꼼꼼히 만든 매뉴얼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서울과 달리 지방에서는 유기아가 발생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인데요. 서울에서 유독 유기아가 많았던 까닭은 유랑민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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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이 들면 식량이 떨어진 사람들은 가족 단위로 서울에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부모가 죽거나 부모를 잃어버리거나 부모에게 버려지는 등 여러 사정으로 유기아가 생겼고요. 즉 공동체의 붕괴가 유기아의 발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잘 유지된 지방에서는 유기아의 발생 자체가 드물었을 뿐 아니라, 발생하더라도 마을이나 사찰 등에서 기르는 것이 오래된 ‘국룰’이었습니다. 정조는 매뉴얼을 통해 이러한 ‘국룰’까지 개선하고자 했지만, 굳게 자리 잡은 관습을 깨지는 못했죠.

 

4. 정조의 아동복지 정책의 전과 후

 

정조의 아동복지 정책은 매우 혁신적인 조치였습니다. 조선이 설계한 아동복지 정책은 처음엔 매우 소극적이었습니다. 

 

특히 유기아를 양육할 책임을 무조건 가족 또는 친족에게 돌렸다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기 어려웠고, 성인은 성인대로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 유기아를 거두지 않았죠. 그래서 흉년 때마다 도성의 거리에는 부모를 잃고 식량을 구걸하는 아이들이 항상 존재했습니다. 

 

지방관의 아동 보호 의무를 법률로 규정하긴 했으나, 그 중요도가 높지 않았던 탓에 관청에서는 유기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죠. 이와 관련하여 『자휼전칙』이 발표되기 이전인 영조 시대의 유기아 보호 사례를 보겠습니다.

 

1726년 9월 11일 - 『승총명록(勝聰明錄)』

 

강악봉은 원래 자녀가 없는 사람이었다. 올해 봄에 길가에 버려진 한 여자아이를 거둬 길렀다. 그는 아이의 이름을 ‘원지’로 지었는데, 지금 아이의 나이는 2~3세 정도 되었다. 그러나 이번 달 그(강악봉)가 병이 들었다. 무당은 그에게 “당신네 여자아이에게 귀신이 따라붙고 있어! 지금 당신 병은 귀신이 주는 재앙이야!”라고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믿고 결국 아이를 다른 집에 버렸고, 그 집에서는 자식 없는 이웃에게 아이를 보냈다. 그러나 이웃 부부 또한 왜 남의 애를 받았냐며 서로 싸워댔다. 아이는 시장 바닥에 버려져 계속 울어댈 뿐이었다.

 

삼 일 밤이나 지나서야, 한 공무원이 아이를 발견하고 마을 책임자를 소환했다. 책임자는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처음 아이를 거두었던 강악봉을 소환했고, 강악봉 역시 처벌이 두려워 다시금 그 아이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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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거두자니 처벌을 받으니... 이런 띠발!  

 

경상도 고성에 살던 가난한 지식인 구상덕(仇相德, 1706~1761)은 일기에 유기아에 관한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공무원이 버려진 아이를 발견하지만, 그는 아이를 보호하지 않고 양육 책임자를 소환합니다. 결국 아이는 자신을 버렸던 강악봉에게로 돌아가죠. 이때도 유기아에 대한 보호 의무가 법률로 제정되어 있었지만, 공무원은 유기아를 발견해도 마을 안에서 ‘처리’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러나 『자휼전칙』이 발표된 이후, 지방의 유기아 대응 정책이 다음과 같이 바뀐 사례도 있습니다.

 

1837년 6월 17일 - 『각사등록(各司謄錄)』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

 

보고합니다. 부여 관아에서 전부터 보호해온 유기아 1명(3살로 추정)은 1월부터 보호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매일 쌀과 간장, 미역을 지급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품을 마련한 담당자는 노비 칠록이입니다. 또한 각 고을에서 유기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하기에, 다시금 세심하게 찾아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1837년(헌종 3년) 충청 감사가 지역 내 유기아를 조사하다가 부여 관아에서 보호하던 유기아에 대한 보고를 받습니다. 3살쯤 되는 유기아를 관아에서 1월부터 9월까지 보호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이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1명이라도 관아에서 책임지고 보호했다는 것은 장족의 발전입니다. 이전 같았으면 유기아가 발견되어도 민간에 그 책임을 미뤘을 테니까요. 이러한 사례가 그리 많이 발견되지는 않습니다만, 실제로는 적지 않은 유기아가 혜택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정조의 아동복지 정책은 유기아 대책의 책임을 마을 공동체에 맡겼던 이전보다 한발 더 나아가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었습니다. 물론 유기아 대책을 언급한 이전의 법률도 시대상을 고려하면 ‘복지적’이었습니다만, 정조는 그보다 훨씬 더 발전된 복지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조의 매뉴얼은 이후의 조선 사회에서 깊게 뿌리내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작은 규모로나마 선구적인 유기아 복지 정책이 수립되고 실현됐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 편에선 조선의 노인 복지와 여성 복지에 대해 디벼보겠습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을 하더군요. 싸움엔 소질이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 챕터의 이야기 일부를 소개해드리며,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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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