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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선거운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로고송? 토론? 후보 이름이 적힌 점퍼를 입고 미친 듯이 춤추는 사람들? 치열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보이지 않는 의외의 전쟁터가 있다. 바로 ‘현수막’이다.

 

이번 대선 공식 선거 운동 기간은 2월 15일부터 선거 전날인 3월 8일까지 총 22일간이다. 이 기간 동안 선거운동원들이 거리유세도 하고, TV · 라디오에서 후보자 광고도 나오며, 지역 곳곳에서 로고송이 들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현수막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풍경이지만, 거기엔 캠프 사람들의 수많은 고민과 고뇌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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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게시해야 하나

 

현수막은 어디에 걸어야 할까? 당연히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설치해야 된다. 설치할 수 있는 현수막의 개수는 무한대가 아니다. 선관위의 철저한 감독하에, 허가받은 현수막만 행정동별로 2개씩 게시할 수 있고, 선거구 내에서 게시할 수 있는 현수막 총량이 있다. 예를 들어 행정동 7개인 지역구에는 총 14개 개수를 지켜야 하고 개수가 맞으면 동 구분 없이 걸 수 있다.

 

만약 2개를 설치하고 싶으면 다른 동네 현수막을 가져와서 같은 곳에 2개를 게시하면 된다. 그러니 한정된 개수의 현수막으로 최대의 홍보 효과를 내기 위해 그 동네에서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전략적 요충지에 게시해야 된다. 잘 생각해보자. 작은 동네에 그런 요충지가 많을까? 아니다. 대개 그런 위치는 동네에 한 곳, 많아야 두 곳뿐이다.

 

가장 인기 있는 위치를 꼽아 보자면 도로 교차로, 대형 아파트 단지 앞, 초·중·고 학교 앞, 유동 인구가 많은 대형 마트나 공원 앞 등이다. 만약 대형 아파트 단지 앞 사거리에 초·중·고가 붙어 있는 곳이 있다면 거기는 거의 총성 없는 전쟁터다.

 

상황이 이러니 여러 후보들은 현수막 설치를 경쟁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합법적인 게시대 외에 설치하면 불법이다. 같은 동네에서 가장 좋은 위치, 거기서도 좋은 높이에 설치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이 펼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다는 곳에 설치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어느 정도 높이에 게시할 것인지도 중요하다. 지나다니는 유권자들에게 가장 잘 보이는 눈높이를 확보해야 한다. 너무 높아도 아니 되며 너무 낮지도 않은, 그런 최적의 높이에 설치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 위치는 대부분 딱 한자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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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

 

언제 설치해야 되나

 

현수막 게시는 법적으로 선거기간 개시일인 2월 15일부터 할 수 있다. 그러면 몇 시에 현수막을 설치해야 될까?

 

2월 15일 00시가 되는 순간이다. 미친 듯이 설치해야 된다. 개시일 전날 자정 무렵, 누구나 탐내는 전략적 요충지에 나가보면 후보 현수막을 실은 트럭들이 좋은 위치에 현수막을 게시하기 위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2월 14일 11시 59분까지 대기하다가 시간이 15일로 넘어가기 직전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런 일은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잠든 시간에 벌어진다. 출근 무렵, 무언가 바뀐 풍경에 무심코 올려다보는 선거 현수막들은, 새벽, 어떤 이들의 치열한 전쟁 결과물인 것이다.

 

현수막 게시대마다 심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간을 그렇게 딱 맞추면서 할 필요가 있을까? 10분 전, 5분 전에 얼른 현수막 걸면 안 될까? 다시 강조하지만 선거는 전쟁이다. 심판보다 더 극성맞은 상대 후보 측에서 눈에 불을 켜고 불법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다. 만약 5분 전에 설치를 미리 하려고 한다면, 상대 후보 측은 곧장 해당 지역 선관위에 전화해서 신고해버린다. 사사건건 선관위에 신고하는 상대 후보 캠프는 호랑이 심판보다 더 무섭다.

 

현수막 설치를 하는 분들은 후보 캠프와는 상관없는 외부 현수막 업체 직원이다. 선거철에 대부분 그 지역 정치 현수막 설치를 많이 해보신 분들이다. 현수막 전쟁에선 백전노장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보좌진들도 현수막 설치에 대해서만큼은 업체 직원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게 좋다.

 

그럼 보좌진들은 무엇을 하나. 보유한 현수막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설치 동선을 정한다. 예를 들어 14개의 현수막을 설치한다면, 트럭 1대 혹은 2대가 어떻게 움직이는 게 최선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선점해야 되는 위치부터 순서대로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현수막 업체 사장님과 작전을 짠다. 흡사 시합을 앞둔 선수와 감독처럼 말이다. 재밌는 건 그 순간만큼은 사장님도 후보의 열성 지지자가 된다. 선거에서 이기면 앞으로 그 지역 정치 현수막을 독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또한 어느 정도 열정에 불을 붙일 것이다.

 

그렇게 출발신호가 울리면 곧장 현수막 설치가 시작된다. 사다리를 놓고 노끈으로 감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보좌진들은 또 다른 차량을 타고 지역구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실시간으로 현수막 트럭과 소통한다. 상대 후보 현수막 팀과 충돌이 생기면, 곧장 그리로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확인하고 중재하거나 선관위에 신고도 한다. 항상 속도전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전략적으로 좀 늦게 현수막을 설치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떤 메시지를 쓸 것인가

 

현수막에는 어떤 문구를 담는가. 자신의 공약 중 해당 지역의 니즈에 가장 부합하는 메시지가 우선이 된다. 학교 앞이라면 학부모들이 좋아할 만한 메시지를 붙여야 되고 교통체증이 심한 교차로에 게시한다면 출퇴근길 교통문제 해결을 위한 메시지를 달아야 한다. 현역 의원의 경우, 자신의 성과를 최대한 알려야 되고 도전하는 후보자의 경우, 현역 의원이 뭘 못했는지를 강조하는 등의 메시지를 담는다.

 

때로는 다른 후보가 설치한 현수막을 확인한 뒤에 거기에 맞춰서 저격하는 메시지의 현수막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꼭 먼저 설치하는 것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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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태 후보가 현수막을 달자,

다음날 윗쪽에 달린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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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게시한 민경욱 후보 현수막 아래,

정일영 후보가 내건 메시지

 

공약보다 상대 후보의 약점을 공격하는 메시지를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막말 정치인이라든지, 조상이 친일파라든지 등등. 이런 전략은 주로 현역 의원이 아니거나 상대적으로 불리한 후보들이 쓰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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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다른 후보를 가리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현수막 설치를 왜 이렇게 X 같이 하냐고 따지면, 고의가 아니었다고 답하면 끝이다).

 

천의 전쟁

 

결론적으로 선거 현수막은 디자인, 메시지, 위치, 정무적 판단, 등 모든 것을 고려하여 선거캠프의 수많은 인력이 머리를 싸매고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전쟁은 설치로만 끝나지 않는다. 장장 22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 후보의 현수막이 무탈하게 최상의 컨디션으로 잘 게시되는지 늘 살피고, 챙기고, 보살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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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정당한 사유 없이 선거 벽보·현수막 등의 설치를 방해하거나 훼손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4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아무리 상대 후보가 싫어도 저렇게는 하지 말자. 숨죽이고 있을 뿐 누가 우리 후보 현수막에 손대는 건 아닌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헐렁헐렁 늘어지게 설치되어 있어도 안된다. 그런 현수막이 발견된다면 곧장 팽팽하게 다시 설치해야 된다. 그리고 보통 22일 동안 같은 현수막을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고 중간에 1번 혹은 2번 정도 교체한다. 그 역시 수많은 전략적 판단에 따라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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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 현수막 정치의 최선봉에는 손혜원 전 의원이 있다. 매장 앞 모델 몸에 자신의 얼굴이 겹쳐져 보이게끔 게시했다. 처음 출마한 선거에서 이런 센스를 보여줬다. 저 현수막이 게시된 곳의 메시지는 “마포의 가치를 두 배로”였다. 상권이 발달한 홍대 앞 교차로에 적절한 메시지와 적절한 높이와 위치, 경쟁 후보 현수막 없이 단독으로 게시한 것까지 가장 완벽한 ‘현수막 정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정치권의 이런 뜨거운 현수막 전쟁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각 지역 현수막 업체 사장님들. 그들에게도 선거철은 다른 의미의 대목인 것이다.

 

 

2020년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차명진 국회의원 후보가 뜬금없이 세월호 텐트에서 'OO썸(집단성관계)'이 있었다는 희대의 망언을 했다. 여당은 물론이고 미래통합당 내부에서도 제명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나왔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황교안 대표마저 “차명진 후보는 더 이상 미래통합당 후보가 아니다”라는 선언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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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진 막말이 총선의 뜨거운 이슈가 됐을 때, 차명진 후보의 경쟁상대였던 민주당 김상희 후보 캠프에서는 해당 지역구에서 차명진 후보의 현수막 아래위를 포위하듯 설치했다. 그 현수막을 본 차명진 후보는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페북에 이렇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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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막말 논란으로 뜨거운 이슈에 기름을 붓는 페이스북 게시물이었다. 뒤늦게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김상희 후보 캠프에서 전략적으로 저렇게 현수막을 설치했었다고 한다. 저렇게 해서 차 후보를 자극하면 또 'OO썸'이라는 단어를 꺼낼 것이라고 예측했었다나 어쨌다나. 믿거나 말거나.

 

결국, 김상희 의원이 최종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