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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다가오니 정치에 열을 올린다. 아무래도, 5년간 국가의 수장을 결정하는 일이니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 싶었다. 뜨겁고 뜨거운 감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일을 할 필요까지 없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럼에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다. 9년 전 그날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할 수 없지 않겠는가 하는 꽤나 절박한 심정이어서다.

 

여왕의 나라에 간 수첩공주

 

2013년 1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국 여왕의 초청으로 국빈 방문했다. 당시 나는 대사관 직원이었다. 담당 영사와 함께 재외동포간담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재외동포간담회는 대통령 해외 순방 시,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를 위로하고 어려운 일에 당면해 있다면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없는지 의견을 듣고 답하는 행사다. 통상적인 대통령 업무 중 하나다.

 

이 행사를 위한 업무 순서는 대략 이러했다. 장소의 경우, 몇몇 컨퍼런스장을 알아보고, 예산 및 제반시설, 동선 등을 파악해 보고하면, 청와대에서 가부를 결정해 확약을 요청하는 식. 청와대의 요청에 따라, 대통령 경호가 용이하고, 어느 정도 급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럭셔리(?) 하고 다수의 인원이 참석해도 무리가 없는, 주차나 접근성 등을 고려한 장소를 섭외해야 했다. 그렇게 결정된 곳은 런던 중심에 있는 Royal Garden Hotel.

 

그런데, 장소 섭외가 결정된 이후 납득이 어려운 요구가 있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할 질문과 답을 미리 준비해서 알려달라는 것. 질문을 주고, 현지 상황에 맞게 답을 달라는 것도 아닌, 질문도, 답도 알아서 정해 알려달라는 요구였다. 사실 누가 어떤 질문을 할지 모르는 건 맞지만 생방송으로 전파를 탈 일도 없거니와 언론에 공개될 것도 아닌데, 물어보면 정성을 다해 답하면 될 일 아닌가? 그런데 아니었다.

 

당시 청와대의 요청 사항은 뚜렷했다.

 

1) 누가 질문할지

2) 어떤 내용으로 무슨 질문을 할지

3) 순서는 어떻게 되는지를 미리 정해놓으라는 것.

 

더불어, 질문은 딱 세 명만 해야 한다는 것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잘 연기를 해야 한다는 추가 요청사항도 있었다. 결국, 영국 현지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질문을 수합해 해당 문안에 대한 답을 적어 청와대에 보냈다. 긴 건 짧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은 쉽게 고쳐 써야 한다는 첨삭이 오간 후, 최종 수정본을 완성했다.

 

가장 중요했던 건, 사회자와 질문자 간의 소통이었다. 발리우드식 연기로는 부자연스러움을 감출 방법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회자와 질문자가 결정되었다. 각각의 질문지를 잘 발표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그렇게 잘 설계(?) 된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당시 초대된 분들은 재영한인회를 시작으로 각 분야 대표되는 분들 200여 명. 대통령이 오면 꼭 이 얘기는 하고 싶다며 며칠을 고뇌해 질문지를 준비한 분들도 있었지만, 1도 의미 없는 설렘이었다. 이미 모든 건 정해져 있었으니까.

 

개회를 시작으로 축하연주 등, 식이 잘 마무리되고 드디어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첫 번째 질문자가 준비된 질문을 던졌다. 이윽고 대통령 응답시간. 어디선가 수첩 하나를 꺼내들더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첩공주라는 별명은 비유가 아니었다. 진짜였다. 두 번째, 세 번째 질문도 마찬가지. 답하고 수첩을 다시 집어넣고, 다음 질문자의 질의에 다시 꺼내어 읽기를 반복했다. 답변이 그리 길지도 않았다. 전문적인 내용도 아닌, 적어놔도 두세 줄 정도 되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적힌 걸 그대로 읽어내려가는 대통령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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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과 족발

 

족발집 앞에서 보좌진이 써 준 A4용지를 들고, 어디를 읽어야 할지도 모른 체, 떠듬떠뜸 입을 떼던 야당의 한 대선 후보의 애잔한 모습을 보며 그때 수첩을 꼭 쥐고 있던 대통령의 총기 없는 눈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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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을까. RE100이나 EU텍소노미와 같은 국책 운영에 있어 기본적인 개념을 모르는 것은 그렇다 치자(물론 나로서는 이해가 어렵다). 아주 간단한 양도세와 종부세의 의미조차도, 본인이 얼마나 세금을 내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 표를 구하고 있다. 이런 자에게, 40%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청와대 문턱으로 밀고 있는 광경을 지켜본다. 역사는 왜 항상 이런 어처구니 없는 반복의 시련을 주려는 걸까. 

 

대선 토론을 지켜보며 그 답답함을 더한다. 이 사람 저 사람 달라붙어 아무리 도와줘도 '대장동'이라는 단어 하나만 잡고 늘어지는 것 이외에는, 할 말도 없고 그나마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 두 시간 내내 이리저리 치이며 수박 겉만 애처롭게 핥다가 내려오는 사람에게 어쩌자고 행정 수장의 자리를 내주려고 하는지, 두려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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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후보에게서 수첩 든 대통령의 모습을 찾으려면, 내가 본 것만 해도 차고 넘친다. 수첩 든 대통령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개인적인 불행으로 끝났는가.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비용은 또 얼마나 막대했는가. 윤 후보가 보여주고 있는 모든 것이 그 역사의 재현을 너무도 명징하게 예고하고 있다. 진정 정권교체라는 단어 하나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오답정리와 나의 경험 

 

2008년,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2013년,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민주화운동에 성공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며 그 아이러니에 대해 외국의 언론은 놀라워했다. 다시 한번 치욕스러운 기억이다.

 

그리고 2022년 지금. 영미를 비롯한 각국의 외신들은 한국의 무엇에 주목하고 있을까. 청와대에 들어가면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 다 감옥에 처넣어버릴 거라는 유력 대통령 후보 부인의 녹취록을, 그럼에도 높게 유지되고 있는 그의 남편 지지율을 기사화하고 있다. 환상적인 민주주의가 작동했던 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들의 나라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검찰과 그 수장 출신인 대통령 후보에게 접수될지도 모른다는 또 한 번의 아이러니에 대해 논하고 있다.

 

국외에서 대통령은 물론, 소위 높으신 분들과 현장 경험을 하다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그 나라의 대통령이 민주적인 자 인가, 아닌가, 혹은 실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해당 국가의 공무원들이 우리를 대하는 공기가 다르다. 그리고 높은 사람이 오면 바빠지는, 소위 현지의 국내 고위 공무원들의 공기도 달라진다. 현장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고치려는 사람이 올 때와 단순히 대우만 받으려는 권위적인 이가 올 때 아랫사람의 태도는 당연히 다르지 않겠는가. 

 

지금의 나는 대사관을 떠났지만 과거, 박근혜 대통령 행적 공개와 당시 대사관 실태 내부고발 등을 딴지에 연재해 고소를 당했고, 이 일로 인해 몇 년간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재판을 하느라 큰 어려움을 겪었다. 실력은 없고 권위만 가득한 정부하에서는 정말 별 거 아닌 일에도 비행기에서 사람을 긴급체포하는 일이 벌어진다(아들 눈 앞에서 끌려 내려간 건 잊지 못할 추억이다). 다행히 딴지일보와 많은 분들의 도움에 힘입어 지난한 재판에서 이겼지만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곤 장담 못한다. 실력은 없고 권위만 가득한, 정부하에서는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다. 

 

한국의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삶에 무슨 그리 큰 영향이 있겠나,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국외에 있었기에,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실력은 없고 권위만 있는 자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공기들이 어떻게 바뀌고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절절히 느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을 뽑을 때 한 번은 상상해보시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한민국 외교부지만 당신이 국외에서 근무를 할 가능성이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혹은 해외에서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대한민국 수장이 누구냐에 따라 당신이 받을 대우와 처우는 반드시 달라진다. 수장이 뭘 다 꼼꼼하게 봐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알아서 공기에 따라 움직이는 거다. 만약 그 공기가 이상하다면, 어쩌면 별 거 아닌 일에도, 단지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그들만의 "법대로!"를 외치며 나처럼 재판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다.        

 

삶은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고, 역사 또한 정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틀린 것을 또 틀려서는 안 될 일이다. 이미 우리는 수많은 연습문제를 풀어왔지 않은가. 이제 우리 선택만 남았다. 새로운 챕터로 넘어갈 수 있을지, 아니면 부족한 오답정리를 하기 위해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