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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끗 차이

 

0.73% 차다. 1600만 표를 가져오고도 고작 24만 표 차이다. 농구로 치자면 100 대 99도 아니고 100 대 99.27로 진 거다. 그런 스코어가 현실에 존재하진 않지만 있다면 2점 슛 하나가 아니라 자유투 하나만 더 넣었으면 이겼을 차이다.

 

대한민국 유권자 둘 중 하나는 실망한 결과다. 그중 상당수는 실망을 넘어선 감정을 느끼고 있을 줄 안다. 친구에게 몇 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보다 더한 상실감이라고 했더니 여자친구하고 헤어지면 다른 사람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이건 무조건 5년 동안 솔로여야 하는 거란다. 거기에 내가 한 마디 더 보탰다. 그냥 솔로도 아니고 헤어진 여친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과 알콩달콩하는 꼴을 매일 봐야 하는 거라고.

 

20년 전, 검찰 개혁을 시도한 한 대통령의 작용이 불러온 반작용은 퇴임한 그에게 가해진 모욕 주기식 수사와 언론플레이였고 끝내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한 반작용이 또 다른 반작용을 불러와 떠나간 대통령의 가장 믿음직한 친구이자 동지가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못다 이룬 검찰 개혁의 고삐를 다시 잡았다. 그에 대한 반작용이 며칠 전 우리가 맞이한 결과다. 검찰의 수장이 후임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현실이 맞나 싶은 기막힌 서사다. 누군가에게는 통쾌한,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망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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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연합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20대 대통령 선거에 걸려있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과거와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대하고 무표정한 미래까지. 나의 생존 혹은 아이들의 미래를 고려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게다.

 

그럼에도 맞이한 패배의 상실감을 고작 0.73%라는 한 끗 차이가 수십수백 배로 증폭시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패배를 곱씹으며 지나온 장면 하나하나가 눈에 밟히는 건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다. 엄청나게 중요한 농구 경기에서 자유투 한 점도 안 되는 차이로 졌다고 치자. 경기 초반 놓친 쉬운 레이업 슛이 뼈아프다. 경기 중반 쓸 데 없는 파울로 내준 자유투가 사무친다. 공정하지 않아 보였던 심판의 휘슬도, 경기 내내 활약한 에이스가 막판 중요한 슛을 놓친 것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한 경기를 이루는 그 모든 순간과 장면 가운데 딱 하나만 달라졌어도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차이는 그렇게 사람을 짓누른다.

 

경기가 끝나고 승리 세리머니를 하는 상대팀 모든 구성원과 그 팀의 팬들을 봐야만 하는 처지까지 따지고 들면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상실감은 원망이 된다. 원망의 화살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복기하되, 화풀이는 말자

 

패배를 마주하고 원인을 분석하는 일이야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화풀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이 선거 전부터 예견되었거나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24만 표를 지고 보니, 심상정의 80만 표가 자꾸 눈에 밟힐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거기에 침을 뱉을 필요는 없다. 누구 잘못이냐를 떠나 민주당과 정의당은 더 이상 예전처럼 대선을 앞두고 잠시 힘을 합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사이가 멀어진 지 오래다. 그걸 모르고 선거 레이스를 시작한 게 아니므로 성낼 일이 아니다. 분노한 이들이 나서서 비난하고 저주를 퍼붓지 않아도 2000년 이후 가장 낮은 대선 득표율을 기록한 정의당(이전 민노당 포함)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일부 지지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 어떤 훌륭한 대통령이라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허나 지난 총선과 지방선거를 생각해보면 대통령이 우유부단해서 대선을 졌다고 말하는 태도는 참으로 박하다. 한 끗 차 패배에 있어 대통령의 역할에 아쉬운 점이야 말할 수 있겠으나 이때껏 경기를 하드캐리한 에이스가 막판 승부처 슛 찬스에서 잠시 주춤했다고 패배의 원흉인 양 평가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기울어진 언론 지형도 우리가 모르는 바 아니었다. 언론은 심판이 아니라 선수가 된 지 오래다. 얼마 전 백분토론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의 말대로 사익 추구 집단이 되어버린 그들의 영향력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점차 희미해져 갈 것이다.

 

여전히 떠오르는 아쉬움이 한둘 아니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김현미 장관을 조금 더 일찍 경질하고 부동산 문제에 빠르게 사과했으면 어땠을까. 왜 손실보상에 더 적극적이지 못했나. 180석을 가져 놓고도 민주당은 어째서 그토록 지지부진했을까. 그런 아쉬움 중에서는 잊고 털어내야 할 것이 있고, 곱씹으며 복기할 게 있다. 그걸 분류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졌으니까 졌잘싸다

 

"졌잘싸는 필요없다"는 말은 지기 전에나 하는 말이다. 이미 져놓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존재의 부정이다. 졌잘싸는 필요 없으니 그냥 집어치우고 다음에는 무조건 이기라는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라도 잘 싸운 점은 이야기해야 하는 거다.

 

100 대 99.27로 패배한 농구 경기의 모든 순간과 장면이 아쉽기만 한 것 같아도 사실 들여다보면 다행스럽고 좋았던 순간과 장면이 빼곡하다. 그런 장면이 없다면 한 끗 차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감히 말하건대 선거는 졌지만 선거 캠페인은 압도했다고 자부할만하다. 무엇보다 성별 갈라치기와 분열 조장으로 일관한 상대에게 연대와 포용으로 대응한 점이 좋았고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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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회사진취재단

                                                                                         

갈라치기는 나쁘지만 선거 승리에 효과적이라는 잘못된 통념을 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단순히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길 기대하는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했다. 도무지 해소할 길이 보이지 않았던 젠더 갈등을 풀어낼 실마리가 민주당의 대선 캠페인을 통해 보이기 시작했다. 불관용에는 단호하게 불관용으로 맞서면서 나머지와는 관용으로 연대하는 현상이 이번 대선 막바지에 눈앞에서 벌어졌다. 누군가는 앞으로 선거에서 이기려면 페미와 손절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틀렸다. 관용 없는 페미와 반페미를 손절하면 된다. 지지자들조차 선거 공학적으로 불리하다며 걱정했던 행보를 이재명은 선거를 코앞에 두고 앞장섰다. 일국의 대통령에게 맡겨진 가장 큰 사명 가운데 하나가 갈등을 조율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라면 이것 하나로 그가 다음 대선에 도전할 명분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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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회사진기자단

 

솔직히 말하면 안철수가 단일화를 선언한 이후 민주당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의 변화를 보면서 이번 선거는 이겼구나 생각했다. 여러 커뮤니티와 주변 지인들을 통해서 결연함과 비장함을 느꼈다. 나를 포함해 지지자들이 이렇게 열성적으로 ‘밭을 가는’ 선거를 여지껏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길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졌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한 끗도 아닌 반끗 차이로 질 수 있었다. 

 

우리가 패배를 돌아보면서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그 모든 순간과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그랬기 때문에 이토록 간발의 차이로 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거대한 상실감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패배의 원인을 찾는 것도 아니요 상대 지지자들을 탓할 것도 아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 수고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여전히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옆에 우직하게 서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