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대선을 연상시키는 올해 대선
얼마 전 우리처럼, 필리핀은 현재 막바지 대선 정국이다. 선거일은 한 달 뒤인 5월 9일. 때문에 최근 필리핀 언론과 각종 소셜 미디어에서는 수십만 명의 군중이 모여 대선 후보자를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주목 받고 있는 1, 2위 대선 주자는 붉은색을 상징색으로 하는 ‘봉봉 마르코스(Ferdinand Romualdez Marcos Jr.)’와 핑크색을 상징색으로 하는 현 부통령 ‘레니 로브레도(Maria Leonor Gerona Robredo)’이다.
봉봉 마르코스(좌)와 레니 로브레도(우)
‘마르코스’라는 과거 독재자의 이름과 민주화 세력의 대표하는 ‘여성 후보’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1986년 2월 대선을 연상시킨다.
이름이나 단순 표면적 정치 구도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이번 대선은 1986년 대선을 떠올리게 한다. 봉봉 마르코스는 1986년 당시 대통령이자 독재자였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거 캠페인을 통해 마르코스 독재정권 시대에 누렸던 ‘필리핀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선전하고 있다.
레니 로브레도는 1986년 마르코스의 상대 후보였던 코리 아키노 여사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정치적 명성과 예기치 않은 죽음이 남긴 정치적 유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상징색은 노란색에서 핑크색으로 바뀌었지만, 지지자들은 1986년 독재자 마르코스에 대항했던 바로 그 민주화 세력을 대변한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좌)과 아키노 여사(우)
두 대선의 차이점과 현재 판세
물론 두 대선(1986년 2월 대선, 2022년 5월 대선) 구도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첫 번째는, 봉봉 마르코스가 집권당 대선 후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속한 집권 여당인 PDP-Laban은 이번 대선에서 대선 후보를 내세우지 못했다. 이는 집권당의 대선 후보 지명을 둘러싸고 두테르테 대통령 측과 복싱선수 출신 상원의원 파키아오 측 간의 당내 불화 때문이었다. 결국 후보 등록을 앞두고 집권 여당은 두 파벌로 나누어졌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을 대선후보로 내세웠다가 철회했고, 파키아오 상원의원은 PDP-Laban이 아닌 PROMDI라는 정당의 대선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필리핀의 정치는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데, 선거에서 정당보다는 후보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따라서 자신의 소속 정당이 아니더라도 다른 정당에서 후보를 영입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정당은 유력 정치인 혹은 그 가문을 대변한다)
(참고로, 파퀴아오를 대선후보로 내세우고 있는 PROMDI라는 정당은 작년에 ‘PROMDI + PDP-Laban 내 파퀴아오 파벌 + 국민챔피언운동(People's Champ Moverment)’이 연합한 정당이다)
두테르테 대통령 측근들은 이번 대선에서 봉봉 마르코스를 지지한다고 밝혔지만, 두테르테는 그 누구에게도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파퀴아오(좌)와 두테르테(우).
두 번째로는, 1986년 대선에서는 지지자들 간에 독재와 반독재라는 명확한 전선이 구축되었고, 대선 후보도 마르코스 현직 대통령과 야권의 단일 후보 코리 아키노 여사 간 일대일 대결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독재와 반독재 간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되지 않고 있으며, 대선 후보도 총 10명이다. 그중 명망 높은 후보자만 다섯 명이나 된다. 비록 마르코스를 제외한 다른 후보들은 독재자 가족의 부정 축재와 탈세 혐의를 부각하며 반마르코스 정서를 부추기고 있지만, 1986년처럼 큰 물결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레니 로브레도 후보만이 마르코스와 현 두테르테 정권을 독재와 권위주의라며 비판하고, 그 외 후보들은 그녀처럼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인 통치 스타일을 보여준 두테르테 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기보다는 은근히 자신의 편에 서주길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집권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70%가 넘는 높은 국정 지지율을 나타내고 있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위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2022년 필리핀 대선 대통령 후보들.
세 번째는, 이번 대선 여론조사 결과가 봉봉 마르코스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리핀의 유력 여론조사 기관인 펄스아시아(PulseAsia)가 지난 2월 18~23일 사이에 조사한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봉봉 마르코스는 60%를 차지한 반면, 2위인 레니 로브레도는 겨우 15%로 나타났다. 3위인 현 마닐라 시장인 이스꼬 모레노는 10%, 4위 매니 파퀴아오 상원의원은 8%의 선호도를 보였다.
여론의 추세도 봉봉 마르코스에게 유리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전의 여론조사보다 봉봉 마르코스의 선호도는 10% 가까이 상승한 반면, 2위 로브레도의 선호도는 5% 정도 하락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오는 5월 대선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 필리핀 국민들은 독재자의 아들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내는가
이쯤 되면 의아할 수 있다. 왜 필리핀 국민들은 독재자의 아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낼까?(이 글을 읽는 한국인 독자라면 기시감도 생길 거다!)
지난해 11월 15일 최종 대선 후보의 윤곽이 드러나기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를 보면 봉봉 마르코스는 선두에 있지 않았다. 펄스아시아에서 조사한 2021년 9월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를 보면, 사라 두테르테(두테르테 대통령 딸이자 다바오 시장)가 1위로 나타났고, 봉봉 마르코스가 그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사라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고, 봉봉 마르코스와 연합하며 그의 러닝메이트로서 부통령에 출마했다. 이렇게 되면서 그녀의 지지율이 봉봉 마르코스에게 넘어가 현재 지지율을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지지자들 앞에 선 봉봉 마르코스(붉은색)와 사라 두테르테(초록색).
그러나 필리핀 대선은 미국과 달린 러닝메이트로 함께 캠페인을 하지만 투표는 팀이 아닌 각각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현 대통령 두테르테와 현 부통령 레니 로브레도처럼 대통령과 부통령이 다른 정당일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두 후보의 결합만으로 현재 60%에 달하는 봉봉 마르코스의 지지율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봉봉 마르코스의 압도적 지지율을 설명하려면, 단순히 사라 두테르테가 그의 러닝메이트가 되었다는 것 외에 필리핀 대선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세 가지 요인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지역 구도, 선거 이슈, 캠페인 방식.”
우선, 필리핀 대선은 전통적으로 지역 엘리트 간의 연합이라는 지역 구도가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필리핀에는 지방마다 지방 언어가 있고, 같은 지방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는 유대감이 강하여 특정 후보에 대한 집단적 지지로 나타난다. 따라서 대선에서 러닝메이트를 선택할 때도 지역 구도를 고려한다.
봉봉 마르코스는 북부 루손의 일로까노 지역을 대변하고 있고, 런닝 메이트인 사라 두테르테는 민다나오의 비사야 지역을 대변한다. 또한 중부 루손 까빠팡안 지역의 유력 정치인 아로요(Gloria Macapagal Arroyo) 전 대통령과 필리핀 중부 세부아노 지역의 유력 정치인 가르시아(Gwendolyn Garcia) 주지사가 이들의 정치적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즉 전국적으로 주요 정치 엘리트 가문 간의 연합 구도 측면에서 마르코스-두테르테 연합은 여타 후보들에 비해 월등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필리핀 선거에서는 선거 이슈를 누가 주도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2010년 대선에서 이전 정부의 부정부패가 선거 이슈로 부상했을 때, 자신의 깨끗한 이미지로 선거판을 주도했던 노이노이 아키노가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2016년 대선에선 심각한 사회적 문제인 마약 이슈를 선점하며 강한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한 두테르테가 당선되었다.
그럼 현시점에서 필리핀 국민들의 가장 관심 갖는 이슈는? 코로나19로 인해 허물어진 경제와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봉봉 마르코스는 캠페인 구호로 ‘단합’(unity)을 내세워 전 국민이 단합하여 경제회복의 길로 나서자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반면 다른 대선 후보들은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1등을 달리고 있는 봉봉 마르코스에 대한 네거티브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마르코스 독재정권 하에서 이루어졌던 암울한 기억을 소환하고 마르코스 가문의 부정 축재와 탈세 혐의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생계를 위협받는 경제적 현실 속에서 어두운 과거를 되새기고 수십 년을 끌어온 마르코스 가문의 부정부패 혐의를 또다시 상기시키는 것은 오히려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지 못하며 피로감만 가중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효율적인 캠페인 방식이다. 필리핀 대선 후보들은 주로 차량을 이용하여 전국을 누비면서 대중들과 만나는 형식의 캠페인을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캠페인 방식은 제한된 유권자를 표면적으로 대면할 뿐 유권자의 판단에 크게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대중매체, 특히 TV 광고를 통해 후보자의 이미지를 홍보하는 방식을 같이 진행해왔다.
최근에는 새로운 방식의 선거 캠페인이 떠오른다. 소셜 미디어(SNS) 활동을 통한 선거 캠페인이 중요해졌다. 봉봉 마르코스는 일찍부터 수백만 명의 팔로워가 있는 SNS를 보유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봉봉 마르코스가 생산자의 의도에 맞춰 교묘히 유도&조작될 수 있는 온라인상 정보의 특징을 이용해서 독재정권을 경험하지 않은 2030 세대에게 독재 시기를 왜곡하고 미화하여 선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요소들이 결합하여 봉봉 마르코스의 선호도가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봉봉 마르코스의 페이스북.
봉봉 마르코스의 트위터.
마르코스 가문의 부활
1972년 계엄령 선포로 시작된 마르코스 독재정권이 혼란한 정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실시했던 1986년 임시 대선(snap election)은 결국 14년간 지속된 마르코스 독재정권이 퇴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반마르코스 진영을 주도했던 민주화 세력은 이번 대선에서 레니 로브레도를 중심으로 뭉쳐서 마르코스의 부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6년간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과의 전쟁’과 같은 반인권적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봉봉 마르코스와 사라 두테르테의 집권은 결국 두테르테 정권의 연장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거일이 아직 한 달 정도 남아 있는 시점이라 향후 어떠한 변화가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는 민주화 세력의 이러한 주장이 대중적인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봉봉 마르코스와 레니 로브레도는 지난 2016년 대선에서 부통령 선거로 이미 한 번 붙은 바 있다. 당시는 자유당의 후보였던 레니 로브레도가 근소한 표 차로 마르코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마르코스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재검표와 법적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법정 싸움이 이어졌다.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레니 로브레도의 손을 들어줬지만, 봉봉 마르코스 측에서는 아직도 당시 선거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봉봉 마르코스.
필리핀 국민들은 봉봉 마르코스를 아버지 마르코스처럼 강한 지도자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지난해 11월 두테르테 대통령이 일부 정당과 연합하여 봉봉 마르코스를 대선 후보로 내세우자는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는데, 봉봉 마르코스가 ‘약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오히려 사라 두테르테가 아버지처럼 강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스라는 이름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와 그 의미가 내포하는 과거 독재정권에 대한 어두운 역사가 또다시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어찌할 수 없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이 어찌됐건 봉봉 마르코스의 부상은 지금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독재 시기에 대한 재조명의 계기가 되고 있다. 이렇게 부정 축재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마르코스 전 대통령 가문은 다시 날갯짓을 준비하고 있다.
김동엽(부산외대 아세안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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