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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로 속도가 권위를 이기는 사회

 

매뉴얼을 읽지 않는 고객이란 글을 올렸더니 어느 분이 이런 댓글을 썼더군요. “제품 까서 사용하기 바쁜데 언제 매뉴얼을 봐요?” 제품을 기다리는 데 걸린 시간도 아까워 개봉하자마자 사용하기에 바쁜 사람들. 뭐가 그리 바쁜지..

 

미국과 한국 교통문화.jpg

출처 - <링크>

 

(지난 글에 언급된) 가게에서 점원이 대신 사인하는 문화에 외국인들은 기겁합니다. 외국에서는 꼭 펜을 주면 사인해야 합니다. 한국은 그게 용인됩니다. 물론 용인되는 한국의 문화 중 일부는 편법적이고 때때로 탈법과 합법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개선되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동시에 그 문화의 이면에는 한국 사회 특유의 사회적 신뢰가 작용하는 것으로도 여겨집니다. 판매자와 소비자는 다음과 같이 순간적이고 암묵적인 합의에 이릅니다.

 

“바쁜데 내가 사인한다고 고소 같은 거 안 할 거죠?”

“사인하고 빨리 물건 주세요. 뒤에 사람 기다려요”

 

효율성 제고를 목표로 하는 맥락으로 보면 매뉴얼을 안 보고 제품을 사용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매뉴얼을 펴보는 게 더 효율적이지요. 효율성을 추구하는 문화는 특정 장면들에서 효율을 극강의 단계에 올려둔 것도 사실입니다.

 

서구(西歐)에는 당일 은행에서 통장 개설하고, 현금카드까지 발급받아서 사용할 수 있는 나라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자금의 성격이나 매출처 등이 검증되어야 하므로 계좌의 개설과 사용을 어렵게 한 그들의 금융정책에 동의는 하면서도 한국의 빠른 속도를 보면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 여러 나라의 느긋하게 움직이는 금융 제도의 이면에는 일종의 권위주의 혹은 폐쇄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 계좌·자금의 검증은 어떤 거래(Transaction)가 발생하는 시점에 해도 충분히 가능한 것인데 그때까지 고객에게 기다리라고 한다는 것이죠. 서구인들이 그렇게 느린 속도로 은행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은행 업무에 대한 내부적 권위주의의 산물로 여겨집니다. 권위주의·폐쇄주의가 서구 선진국에는 별로 없는 비합리적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서구 선진국의 주요 업무 길목에는 항상 이런 권위주의·폐쇄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치 한국의 70~80년대처럼 말이죠.

 

한국은 그런 폐쇄주의·권위주의라는 악령이 IT 기반 정보 시스템의 발달로 일부 무너져버렸습니다. 속도 지향이 권위를 이긴 것이죠. 속도를 맛본 고객(한국인)들은 절대 이 효율과 편리함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가장 빠른 것이 효율적이고 그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고객이 존재하는 한 이런 서비스는 더 빨라질 뿐 절대로 느려지지 않습니다. 제품을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말의 한 의미는 불필요한 시간이 소모된다는 것이고 그걸 제조사에 이야기해서 개선했음 하는 것이겠지요. 그 불편을 한국인은 잘 견디지 않습니다. 

 

이 나라는 프랑스.jpg

이 나라는 프랑스

출처 - <링크>

 

전 세계 자동차 생산대수 1위라고 얼마 전에 신문 기사로 올라왔던 일본의 TOYOTA의 경우 적시생산(JIT, Just In Time) 개발 방식으로 유명합니다. JIT 방식에서는 사람이 작업에 쓰는 모든 도구(tool)가 아무렇게나 배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구 등 손을 뻗치면 닿는 곳에 배치되어 있어서 작업 효율을 높입니다. 이 방식이 일선 제조 현장에 적용되려면 작업의 순서·방식과 특정 작업의 횟수 등이 매뉴얼화되어야 하고, 그 매뉴얼이 배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JIT 방식을 제일 잘 따라 한 곳이 여러분이 잘 아는 삼성전자입니다. JIT 방식을 한국에 도입하고 보니 이게 한국인의 손에 너무 잘 맞는 겁니다. 작업자도 일이 좀 힘들긴 하지만 답답하지 않게 작업이 되고 말이지요. 한 경영지의 평가에서 나온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도요타의 생산방식이 일본 사람에게만 잘 맞는 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가장 최적화된 곳은 한국이라 하더군요.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한국인의 성격에 잘 맞는 작업 방식이었던 겁니다. 극강의 효율을 이야기하는 한국인은 그 방식에 자신들의 제조업 노하우(know-how)를 결합해 자동화·로봇화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입니다.

 

2. 천혜(?)의 자연환경

 

이스라엘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반인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에어비앤비(Airbnb)를 통해 예약한 숙소에 머물기로 하였습니다. 호텔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2박 3일을 지낼 수 있으니 나름대로 가성비는 있겠다 싶었지요. 머물던 집 이야기를 잠깐 드리자면 3층짜리 빌라의 3층에 있는 집이었고 방이 총 3개였습니다. 처음에는 방 3개를 다 내가 쓰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에어비앤비에 적힌 글을 자세히 보니 방 하나를 빌려주는 것이더군요. 자! 다 같이! 뭐라구요? “싼 게 비지떡” 네 맞습니다(제가 너무 날로 먹으려 했나 봅니다).

 

2박 3일간 그 집에 머물다가 우연히 털북숭이(관련 일화 부록1. 참고) 방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요. 옷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의 옷장은 적어도 너비 120센티에 높이 180센티 정도 되는 옷장이 여러 개 놓여있는 데 비해 이 친구들의 옷장은 조그만 박스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옷들을 보니, 티셔츠 몇 개, 반바지 몇 개, 긴바지 몇 개,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점퍼 한 벌이 전부였습니다.

 

아직 학생이니 옷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후 이스라엘 텔아비브는 연평균 18도 정도 되는 아열대성 기후라는 걸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살면 한국처럼 노스페이스 류의 점퍼도, 두꺼운 가죽옷도, 목도리·장갑·내복 이런 옷들도 필요 없으니 옷장이 필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인이 제품을 사용하는 환경은 극한적입니다. 1년간 여름에는 35도, 겨울에는 영하 15도, 상당히 추울 때는 20도까지 내려가는 환경이니 제품을 개발하는 입장에서는 이 온도 범위를 만족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하지요.

 

Δ(델타)50 ~ 60 사이에 있는 지구상의 지역은 별로 없습니다(델타는 두 지표 사이의 차이를 말해주는 공학 기호입니다). 아주 추운 북극·남극 같은 곳이 Δ(델타)50 ~ 60 정도 되지요. 이런 곳에 사는 고객에게 제품이 온도에 따라 성능이 좌우된다면 어떨까요? 더구나 이 고객은 이미 수십 년 동안 그곳에서 살아왔고 그 환경에 매우 익숙한 환경이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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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다습부터 한파 건조주의보까지

 

기후 환경은 “빨리빨리” 현상의 근본적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기후로 인해 특정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1년에 절반 정도밖에 안 되기도 합니다. 그 절반의 시간에 최대 노동력을 사용하여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시기를 견딜 식량을 마련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가난의 굴레에 떨어지게 되었지요. 한국인이 극강의 효율을 찾고 부지런한 이유는 그런 기후 환경도 영향이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기후적 환경에 살다 보니 특정 온도에 민감한 제품 사용에 대한 피드백(feedback)이 그만큼 섬세하고, 강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지금 온도 때문에 성능에 문제가 있다면 이걸 해결해야 다음에도 이런 문제가 발생 안 할 테니까 말이지요.

 

3.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소비자

 

필자가 회사에 근무할 때는 오전 8시쯤에 회사에 출근해서 밤 10~11시쯤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새벽 2시까지 일하다 퇴근하기도 하였습니다. 필자가 일을 아주 많이 했다거나 일을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정도 노동시간이면 필자에겐 일이 곧 나의 삶이요, 삶이 곧 일이라는 이야기지요.

 

기억을 곰곰이 회상해보면 일상의 삶이란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때인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는 35시간이 보편화 되어가고 주4일 근무제로 사회 체계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52시간을 하느니 마니 다투고 120시간 이야기가 나오고, 그런 발언을 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걸 보면 한국 사회는 일하는 시간이 긴 것에 다른 선진국보다 여전히 관대한 것이겠지요. 이런 풍토 때문에 일과 삶이 분리되지 못한 채 일상적인 삶을 살 때도 일할 때와 같은 긴장감과 태도를 지니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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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JTBC 방송화면>

 

앞선 글에 언급되었던, 해외 제조사의 장비를 구매한 엔지니어도, 매뉴얼 없이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도 이런 삶을 살아왔으리라 생각합니다. 주 60~70시간을 일하는 사람의 제품에 대한 컴플레인과 개인적인 시간이 보장된 채 일과 삶이 안정적으로 분리된 사람들의 컴플레인은 차이가 있겠지요. 모든 한국인이 정시 퇴근을 보장받지 않은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적어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일과 삶이 분리되지 못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터이고 그들의 하소연을 듣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만약 어떤 제품의 고장·불량·불편이 내 일의 성과와 직결된다면 어떨까요? 앞서 이야기한 소비자들 대부분은 어쩌면 평생 장시간 노동과 압축 노동으로 인해 평화로운 삶이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일터로 변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도 일과 같은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대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렇게 디테일하고, 논리적이고, 완결적 컴플레인을 하는 건 아닐까요? 실제 해외 엔지니어들은 필자가 일하는 걸 보며 한국인의 노동환경을 대단히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지요. 한국에서 샘플을 들고 이스라엘에 가서 미팅하는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 오전에 일정이 있어서 오후 1시부터 미팅을 시작하였습니다. 꽤 많은 시사점을 발견하며 슬슬 회의 몰입도가 올라간 무렵이었습니다. 참석자인 수석 엔지니어와 카운터 파트너는 열띤 회의를 하는데 1년 차 신입 엔지니어가 다이어리를 닫더니 히브리어로 뭐라고 말하면서 회의실 밖으로 나가더군요. 우리끼리만 이야기하니까 짜증 나서 나갔나 생각하던 찰나에 상대측 수석 엔지니어가 "근무시간이 끝났으니 내일 이어서 하자"고 하는 겁니다. 어제 입국해서 이제 영어가 좀 익숙해질 만하고 나름대로 생산성 있는 회의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 필자는 "하던 부분만 마저 논의하고 끝내자"고 말했으나 카운터 파트너가 “당신 온다고 레스토랑 예약했으니 같이 가자”라고 해서 아쉽게 끝난 적이 있었습니다.

 

식사하며 아까 신입 엔지니어가 히브리어로 뭐라고 하면서 나간 거냐고 물어봤더니, 한국어로 치면 “업무 끝” 정도 되는 히브리어였다고 합니다. "이사, 부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신입 엔지니어가 업무시간 끝났다고 그렇게 나가도 되냐”라고 물어봤습니다. 제 카운터 파트너는 되려 저에게 "그 신입사원의 시간을 업무에 할애하라고 말하는 건 비인간적이다"라는 뉘앙스로 말하더군요. 그 순간 이사, 부장과 같이 회의를 한다고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하는 그 신입 엔지니어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그 순간의 발상 자체도 제가 한국인이라는 증명이겠지요.  

 

스트레스 강국 한국.png

출처 - <근로복지공단>

 

일상의 삶과 일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생기는 문제점(생산성 감소, 비효율적 업무시간 등등)은 어디까지나 사회와 회사가 책임져야 할 부분입니다. 일은 일대로 하되 우리에겐 개인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데,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에 만연한 수직구조와 그 구조를 조성하는 기준들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을 터입니다. 또는 자신은 안 그런다 생각하지만 부지불식(不知不識) 중에 사회에 퍼져있는 한국인의 행동 양식이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요.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릅니다. 나이·성별·직급·학벌·경제력 등을 기초로 하는 수직 구조 속에서 일하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스트레스는 어디선가 분출되기 마련이지요. 사람마다 분출구는 다르겠지만 필요하겠지요. 

 

그래도 한국인이 빨빨거리며 해외여행을 많이 하고, 통신과 매체의 발달로 학습이 용이하기 때문인지 노동환경이나 그와 관계된 언어문화에 있는 문제점들은 개선되는 걸로 보입니다. 한국 문화의 장점이 발현되는 시대 환경을 만난 것도 사실이지요. 이 방향으로 느리지만 순행한다면 괜찮다고 봅니다. 역행만 안 하길 바라마지않습니다.

 

이렇게 속도지향 사회, 한국의 기후조건, 삶과 분리되지 않은 노동환경을 들어 한국 소비자 특성의 근원을 3가지 정도 적어 보았습니다. 이쯤에서 소비자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3편의 이야기를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다음 세 편은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소비문화를 견주어 볼 수 있는 해외소비자 이야기 2편을 부록으로 실었습니다(제목 클릭하면 펴짐).

 

부록 1. 에어비엔비를 통해 묶은 이스라엘 숙소 이야기: 해외소비자는 한결 여유 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방문한 이스라엘 숙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층 건물 3층에 위치한 그 집에 들어가면 복도가 하나 있고, 복도 끝에 있는 제일 큰방이 제 방이었습니다. 나머지 두 방 중 한방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털북숭이(총수 아님) 남자 한 명과 여자애가 머무는 방이었습니다. 제일 큰 방은 이 집 주인 여자가 살았습니다. 한 집에 젊은 남자와 여자 둘이 사는 집. 제가 보기엔 참 희한한 구조인데 한국인 아재의 시선이라 그렇겠지요.

 

첫날 화장실에 일을 보러 들어갔는데 화장실이 잠금장치가 말을 안 들어 겨우겨우 잠갔습니다. 일보고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잠금장치가 작동을 안 하는 겁니다. 순간 고장 났다는 말과 함께 잠그지 말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아..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잠긴 잠금장치를 아무리 열려고 해도 안 열립니다. 어떻게든 열어서 좁은 복도를 지나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입어야 하는데 입은 건 갈아입은 팬티 한 장이고 정말 난감하더군요.

 

난감한 상황은 그 뒤에 더 벌어졌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올 때 안내하던 털북숭이는 어디를 나갔는지 그와 같은 방을 쓰는 여자애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열어달라고 해서 열면 팬티차림의 배불뚝이 아저씨가 아가씨 앞에 서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질 거 같아 열어 달라는 말을 못 하고, 당황해서 “도어 락(Door Lock)”이라고만 이야기습니다(여러분도 당황해봐요, 말이 생각나겠어요?). 알아듣고는 잠시 연장 가지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머리가 쭈뼛 서면서, 아, 이 상황을 어떻게 영어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난감했습니다. 옷이 없다고 내 방에 가서 옷 좀 갖다 달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애가 문을 확 열었습니다.

 

순간, 주변 모든 것이 멈춰진 그 기분. 팬티만 입고 있던 제 모습을 여자애가 보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방에 들어가더군요. 저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제 방으로 들어와 옷을 입었습니다.

 

첫날은 일정 때문에 밤늦게 들어와서 그 친구들과 이야기를 못 했습니다. 머무르는 마지막 날 오후 5시에 귀가하여 같이 저녁을 먹을 일이 있었습니다. 하도 궁금해서 그 여성에게 물어봤습니다. 첫날 내가 겪은 상황은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 하는 말. 이 집에 오는 자기 친구들도 한 번씩 겪는 일이라 괜찮다. 걱정 마라 그러길래, 화장실 문에 좀 써놓으면 어떠니? 라고 물었더니 써놨는데, 히브리어로 써놔서 내가 못 읽은 거다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죠. "여자와 남자가 같이 사는데 화장실 문이 안 잠기면 어떻게 안심하고 샤워할 수 있니?"라고 말이지요. 그 친구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샤워를 하면 물소리가 나고, 밤이면 불이 켜져 있고, 들어가기 전에 노크하면 되지 않니?"라고 말하는데, 듣고 보니 그게 맞더라고요. "그래도 불편하지 않아?"라고 물어봤더니, 그 여자애가 하는 말이 "응 . 불편하긴 하지. 나도 의도하지 않게 털북숭이 꼬추도 봤어."라고 하더군요.

 

그러자 그 털북숭이가 하는 말.. “난 너 상체를 봤는데 가슴을 못 찾겠던데?”라고 응수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둘이서 적나라하게.. 그 젊은 친구들이 음담패설을 히브리어로 하더군요. 아, 전 히브리어 못 알아듣습니다. 그냥 그때 상황이 여자애가 웃으면서 말한 손 모양과 털북숭이의 손 모양으로 볼 때 음담패설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제가 머물던 그 집의 털북숭이는 24살이고, 집주인은 27살, 화장실 문을 열어준 친구는 26살이더군요. 그 젊은 친구 둘은 북한과 남한이 같은 민족이란 것도, 분단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정말 쿨한 젊은이들이었지요.

 

부록 2. 국가별 소비자의 매뉴얼 사용법

 

아래 에피소드는 앞서 언급한 엔지니어 중 한 명이 술자리에서 우스개 소리로 한 이야기를 필자의 기억을 더듬어 풀어놓은 것입니다. 약간의 과장과 필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1) 독일 소비자

제품이 오면 제품의 포장을 조심스레(정말 조심스레) 뜯음. 매뉴얼과 제품을 둘러싼 포장재들을 얌전히 정렬한 후 제품을 가지런히 놓음. 매뉴얼을 펴서 빠진 게 없나 1차 체크. 이후 매뉴얼을 들고 책상으로 가서 정독. 대략적인 정보를 Study 한 후 매뉴얼에서 특별히 알아야 할 부분들을 별도로 적고 매뉴얼은 책장에 꽂아둠. 그 후 적은 걸 가지고 제품을 작동해 봄.

 

2) 일본 소비자

제품이 오면 제품의 포장을 뜯고 매뉴얼을 꺼내 제품을 작동해 봄. 작동하며 이해가 안 되거나 이상한 부분은 별도로 적어서 제조사에 질문함. 좀 더 황당한 것은 제조사가 질문을 잘못 이해하여 답변을 틀리게 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해도 재질문을 안 함. 매뉴얼은 따로 매뉴얼만 모아 놓은 책장에 보관.

 

3) 프랑스 소비자

제품이 오면 포장이 어떠니 저떠니 포장 상태의 디자인적 평가를 주변 사람들과 혹은 스스로 이야기함. 그 후 제품을 꺼내 제품의 디자인을 먼저 확인함.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기분이 좋아지고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제품 사용에 불평·불만이 늘어남. 매뉴얼을 펴놓고 제품을 사용하는데 버튼 하나 누르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 또 버튼 하나 누르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식으로 제품 전체의 기능을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됨. 매뉴얼은 책장 중에 제일 안 이쁜 책장에 꽂아둠. 제품의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매뉴얼의 디자인에 의외로 컴플레인이 많이 옴. 가독성에 대한 컴플레인도 함.

 

4) 이탈리아 소비자

제품 포장을 해체하고 매뉴얼을 꺼내 읽다가 다른 주제로 화를 냄. 매뉴얼을 정독하는 동안 다른 주제 이야기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 매뉴얼 읽는 동안 다른 주제로 빠지는 횟수가 많음.

 

5) 러시아 소비자

제품이 오기 전 제조사에 전화하여 제품이 아직 안 왔다, 보내긴 한 거냐 등의 컴플레인을 함. 제품이 도착한 지도 모르는 그 날 전화했다가 제품 도착했다고 하면 그제야 확인하고선 “스파시바”하고 전화를 끊음. 매뉴얼에 대한, 제품에 대한 질문 거의 없음.

 

6) 중국 소비자

제품 주문한 걸 까먹고 있던 상태에서 받음. 매뉴얼을 읽기 싫어함. 아는 사람이 말로 가르쳐 주기를 원함.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림.

 

7) 한국 소비자

기기의 문제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한 후 기기가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음. 매뉴얼은 급하거나 안 되는 거 있을 때만 열어봄. 매뉴얼을 보고 나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장비를 사용함. 가장 빨리 사용을 하기 시작하고 가장 빨리 고장을 냄. 매뉴얼은 장비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 현장에 있는 경우가 많음.


 

스타워즈 덕후, 농구 덕후, 애플 덕후.. 라고 생각만하고, 실제로는 잘 모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