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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이 아닌가벼

 

모든 MBA 지원서와 면접에서, 공통적으로 물어봤던 질문이 하나 있다.

 

"왜 MBA를 하려고 하는데?"

 

MBA는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이 아니다. 의대를 졸업하면 의사가 될 수 있고, 로스쿨을 졸업하면 변호사가 된다. 하지만 MBA는 졸업한다고 해서, 어떤 전문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MBA는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커리어 목표를 달성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수한 MBA 프로그램을 졸업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스펙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아마존 같은 빅테크 기업, 월가의 은행들, 그리고 전략 컨설팅 기업들은 매년 MBA 졸업생을 대상으로 채용한다. 모두 나처럼 일반적인 커리어를 밟아온 사람에겐 쉽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들이다. MBA는 그 자체로는 목표가 될 수 없지만, 목표를 달성하는데 훌륭한 수단인 셈이다.

 

다만, MBA 자체가 커리어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유명 MBA 프로그램에서만 수천 단위 졸업생이 배출된다. 그중에서 큰 기업의 경영진이 되거나 창업에 성공하는 인재는 한 줌에 불과하다. MBA 프로그램에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서와 면접을 통해 반복적으로 묻는다.

 

1) 향후 커리어의 목적이 무엇이고,

 

2) MBA 프로그램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며,

 

3) 너는 커뮤니티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한마디로, 니가 얼마나 커리어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는지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통해, 학교 측은 지원자가 될성싶은 떡잎인지를 가려낸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MBA 프로그램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반복해서 답하는 과정에서, MBA 프로그램이 나에게 맞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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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성찰 타임

 

MBA 프로그램을 나에게 적용시켜 보니, 이런 질문이 되돌아왔다.

 

1) 좀 더 빡센 직장(투자은행이나 펀드)으로 옮겨,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가?

 

2) MBA 내에서 쌓은 인맥을 활용해 컨설턴트 / 창업을 하고 싶은가?

 

3) 아니면 일반 기업으로 옮겨 관리자로써 성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객관적으로 바라본 지금의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1) 게으르고

 

2) 숫기가 없으며

 

3) 어수룩한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면 좋긴 하겠지만, 영혼을 갈아 넣어서라도 커리어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욕망은 없다. 그러기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고, 가정이 있으며, 배때지에 기름기가 꼈다. 애초에 내가 영업이나 네트워킹을 잘했더라면, MBA를 하지 않고도 현 직장에서 성공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곁에서 지켜본 임원들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고, 리더십을 갖추고 있지도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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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머릿속으로만 공회전하는 것보다, 실제로 부딪혀보고 겪어봤을 때 알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무작정 안된다고 스스로를 제한할 게 아니라, 그 시간에 뭐라도 해보는 게 낫다. 그런 의미에서 MBA 프로그램에 지원한 것은 굉장히 잘한 일이다.

 

토끼는 굴을 두 개 판다

 

다만, 무조건 MBA를 해야겠다는 확신이 선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MBA 결과가 나오기 전 몇 달 동안, 본격적으로 이직에 지원해 보았다. MBA와 이직을 투 트랙으로 준비해 본 뒤, 오퍼를 받은 학교와 회사를 비교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직할 회사와 포지션을 선정하는데 세 가지 기준을 세웠다.

 

첫째,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위치한 회사일 것.

 

둘째, 지금 하는 일보다는 재밌어 보이는 포지션 일 것.

 

셋째, 그 일을 함으로써 뭔가 배울 점이 있고, 앞으로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것.

 

MBA 프로그램을 하는 것에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었다. 경제적인 부분 (2억에 달하는 학비, 2년 치 연봉)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나를 위해 주거지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마당 딸린 주택에서 시부모님의 도움으로 아이 둘을 키우다가, 좁은 아파트로 가서 우리 부부 힘으로만 애들을 키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직을 한다면, 반드시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두 번째 조건은 좀 더 까다로웠다. 일반적으로 회계법인 출신들이 가장 많이 이직하는 포지션은, 인더스트리(일반 기업)의 회계팀이다. 직무 연관성이 겹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회계 자체보다는 정보 분석 및 활용 쪽에 좀 더 재미를 느꼈다. 그래서 회계나 재무 분야를 벗어나, 뭔가 새롭고 다른 일을 배워보고 싶었다. 학교엔 가지 못하더라도, 이직을 통해 재미가 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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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내가 가고 싶은 포지션일수록, 다시 말해 회계분야로부터 멀어질수록, 나의 직무능력과 경력을 인정해 줄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어차피 새로 업무를 가르쳐야 할 실무자급에서는, 과거 경력 연관성을 적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중간관리자들은, 전혀 다른 인더스트리로 이직하기가 훨씬 어렵다. 웬만큼 인내심 있는 회사라 하더라도, 일할 줄 모르는 직원을 매니저로 뽑아 기초부터 다시 가르치긴 힘들기 때문이다.

 

세 번째 조건은, 성장 가능성이다. 나는 현재의 수입에 대해선 큰 불만이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이직하려는 포지션의 연봉이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것은 괜찮았다. 대신, 그 일을 내가 잘하게 됐을 때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길 바랐다. 금융에서 성과급이 지급되고, 테크기업에서 스톡옵션이 주어지는 것 같은 업사이드가 있는지를 따졌다.

 

퇴사 일발 장전

 

대이직의 시대는, 나 같은 구직자에게는 큰 기회였다. 업계 전반에 이직자가 넘쳐나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결원이 발생했다. 결원이 발생한 회사는 급하게 이직자를 뽑는 과정에서, 기존에는 고려하지 않았을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최종적으로 세 회사와 이직 협상을 했다.

 

1. 대형 사모펀드의 미들오피스 매니저

 

2. 스타트업의 가치 평가 매니저

 

3. 은행 포트폴리오 매니저

 

첫 번째 회사는 업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펀드였다. 지원 과정에서

 

1) 현재의 연봉보다 낮고 (이름값을 고려했을 때, 깜짝 놀랄 만큼 낮았다)

 

2) 업무량은 지금보다 크게 늘어날 것이며 

 

3) 결정적으로 프론트오피스 (투자쪽)로 이직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내실은 없는 오퍼였던 셈이다.

 

두 번째는, 한 스타트업에 전문가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대우도 나쁘지 않고, 잘 되었을 때 가장 큰 대박(스톡옵션)을 노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면접 과정에서, 내부 문제 등으로 인해 전임자들이 지속적으로 갈려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회사 쪽도 나의 경력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오퍼까지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세 번째는, 내가 봤을 때 가장 균형이 잘 잡힌 곳이었다. 기존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뱅킹 업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데다가, 내게 주어진 직급이나 대우가 좋았다. 기존의 경력 대부분을 인정해주면서도, 새로운 일을 기초부터 배울 수 있게 된 셈이다. 게다가 해당 사업부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팀원 대부분이 지난 2-3년 안에 승진했다는 것도 플러스였다.

 

세 번째 은행으로부터 오퍼를 받기까지는 긴 우여곡절이 있었다. 뱅킹 관련 경력이 전혀 없었기에, 최초 지원했던 다른 포지션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를 면접했던 임원 중 한 명이 나에게 호의를 갖게 되었고,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자산유동화)과 업무 유사성이 좀 더 겹치는 새로운 포지션을 만들어 주었다.

 

다만, 팀장은 나의 업무능력에 대해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실기 면접을 치르게 되었다. 복잡한 모델링과 재무분석 능력 전반을 평가받았다. 그 시험을 무난하게 치렀기 때문에 최종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최초 지원부터 최종 오퍼를 받기까지 무려 4달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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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자이언트 펭tv

 

임원이 나에게 호의를 갖게 된 것은 사실 순전한 우연이다. 그 임원은, 내가 다니던 회사의 관리자 한 명과 막역한 사이였다는데, 그 관리자가 나에 대해 호평을 했기 때문에 내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관리자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우연히 나를 좋게 말해준 친구가 있어서 날 뽑았다는 거다. 여담이지만, 나는 미국에서 처음 취직할 때도 우리 학교 출신 한 명이 그해엔 무조건 자기 학교에서 한 명 뽑아달라고, 경영진에게 강짜를 부려서 취직하게 된 낙하산 출신이다. 취직과 이직 같은 큰일에서는 때로,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알지 못하는 이유로(예를 들면 회사가 사람을 얼마나 급하게 뽑으려 하는가, 어떤 인맥이 있는가 같은)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는 법이다.

 

은행으로부터 이직 오퍼를 받을 때쯤, 지원했던 MBA 프로그램들이 입학 / 불합격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중 목표로 했던 곳 한곳으로부터는 상당한 장학금 (3만 불) 보조도 받게 되었다. 이직과 MBA 진학 사이에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계속>



추신

 

딴지스 여러분 덕에,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딴지 연재물을 확장하여, 이때다 싶어 열쒸미 공부, 정리하여 낸 책입니다. 아마, 현직 회계사 중, 저만큼 회계공부를 싫어했던 회계사는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저만큼도 공부를 안 했다면 못 붙으셨을 테니까요). 회계 공부를 싫어했던 제가 스스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계실 독자분들 상정해 쓴 책이다 보니 재밌습니다(아마도...). 그동안 회계 공부가 하기 싫었다거나, 회계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분들(사실상 전원)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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