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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이기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이상하게 러시아 편을 드는 식자들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자신을 진보 진영에 위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러시아가 지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하거나 전쟁의 책임이 러시아에 있지 않다고(최소한 러시아에'만' 있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러시아는 실력과 도덕성 둘 중 하나는 뒤지지 않거나, 둘 다 뒤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이런 주장을 하는 진지한 칼럼까지 언론지상에 출몰하고 있다.

 

사실은 러시아가 이기고 있다거나, 젤렌스키를 비난하는 입장이 국내에 보이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강대한 러시아가 약소국에 당할 리가 없다는 관념이다. 그렇게 따지면 수양제와 당 태종도 고구려에 패배할 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 우크라이나가 항복하고 전쟁이 끝나도 러시아는 망했다. 애초에 침공 1주일을 넘긴 시점에 이미 러시아는 실패했던 게 아닌가.

 

둘째 미국의 세계지배에 반대하는 반미정서도 엿보인다. 미국이 너무 싫으면 푸틴 편을 들고픈 감정이 생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쟁당사자인 양국의 입장에 집중하면 정의는 철저하게 선량한 피해자인 우크라이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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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JTBC 화면 캡쳐>

 

셋째 경제적 피해가 줄려면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하니 악착같이 버티는 약소국에 악감정이 드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모든 일의 원인은 러시아의 불법적인 침공에 있다.

 

우크라이나엔 약자가 강자에게 짓밟힌다는 정글의 법칙을 성실히 이행해 줄 의무가 없다. 입장을 바꿔 중국이 우리를 대대적으로 침공한다고 치자. 세계 경제와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들의 삶의 질을 위해 우리가 지거나 항복해야 하는가?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건 남에게도 요구할 수 없다.

 

좀 더 디테일하게 하나씩 따져보자.

 

1. 서방 언론을 믿을 수 없다.

서방 언론과 우크라이나를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면 그건 개인의 자유다. 모든 게 조작이고 공작일 확률이 단 0.00001%라도 있어서 끝까지 의심하겠다면 어쩔 수가 없다. 다만 그렇다면 동시에, 러시아 측의 주장은 무슨 근거로 믿는가? 모든 걸 <판단 유보>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아무 결론도 내지 않고 있는 게 맞지 않냔 말이다.

 

더욱이 신뢰의 확률을 따지면, 언론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는 국가의 언론과 최근 언론통폐합까지 단행한 독재국가 러시아의 언론 중 어느 편을 믿는 게 확률상 유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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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뉴스TV 화면캡쳐>

 

이 사람들은 '서방'의 모든 언론과 정·재계가 단일한 목표로 개미 떼처럼 움직인다고 전제한다. 그러니까 한겨레와 조선일보가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다른 얘기를 하는 상황이 미국과 유럽 그리고 우크라이나에는 절대 벌어질 리 없다는 얘기다. 그동안 우리만 별세계에 살았나 보다.

 

2. 사실 러시아는 이기고 있으며, 이길 것이다.

러시아가 이기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 역량이 종말점에 다다라 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결국 러시아의 승전으로 끝날 수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이미 실패했다는 사실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젤렌스키가 사살되고 러시아의 승리가 확정되어도 이미 실패한 침공이다.

 

3. 우크라이나의 분전은 (못된) 서방의 지원(음모) 때문이다.

그렇다 치자. 서방이 못됐고 음모도 꾸민다 치자. 러시아도 음모엔 열심인 것 같다만... 암튼, 다 서방이 잘못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침공당한 나라가 침공한 외적에 맞서 힘써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건 당연지사다. 우크라이나의 분전은 서방의 지원 덕이라고? 결국 싸움은 우크라이나 국민들만 하고 있다.

 

서방에서 지원한 보병 화기(재블린, 엔로우, 스팅어, 스트라이커 등등 탱크 잡고 헬기 잡는 애들)는 기적의 물건이 아니다. 전쟁은 사람이 한다. 마법의 무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모양새가 재블린만 있으면 탱크를 스마트폰 게임처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돼서 록히드마틴(재블린 제조사임)만 대박 났는데, 탱크는 30억이고 재블린은 한 발에 1억이다. 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탱크 안에 있는 승무원보다 재블린을 든 사냥꾼의 사망률이 더 높다.

 

우크라이나군이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기 때문에 고작 한 발에 1억짜리 무기가 수십억짜리 탱크 뚜껑을 따는 거지, '서방'이 요사스러운 요술봉을 쥐어준 게 아니란 얘기다. 우크라이나군처럼 싸우지 않으면 재블린, 엔로우는 지금의 우-러 전쟁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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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튜브 채널 국방TV 화면 캡쳐>

 

4. 서방의 통계는 과장이거나 사기다.

그럴 수도 있다. 현대전에서 선전술은 당연하며, 우크라이나도 당연히 선전술을 전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그럴 것이므로, 서방의 통계를 믿을 수 없다면 러시아 측의 정보도 믿을 이유가 없다.

 

5. 아조프가 잘못했다.

아조프는 정규군에 편입된 후, 숙군작업에 의해 돌아이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 후에도 훈련과 전투에서 진짜 나치스트들은 대부분 낙오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주장이 다 사실이라 한들 우크라이나에서 유죄 추정을 당할 집단은 아조프 연대를 위시한 소수뿐이다. 그에 반해 푸틴과 러시아군의 악행은 아조프의 그것을 훨씬 초월했다.

 

출처 유튜브 KBS 세계는 지금.jpeg

2014년 5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네오 나치, 극우 성향으로 결성된 민병대

동년 11월 정규군에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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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프 연대는 전략・경제적 요충지인 마리우풀에서 한 달을 지속하여 항전중이다

출처 - <KBS 세계는 지금 화면캡쳐>

 

6. 키이우 방면 공략은 성동격서(동쪽을 놀라게 한 후 서쪽을 침)다.

이 글의 주제다. 중간에 글이 날아가 다시 급하게 쓰려니 피로가 몰려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ㅠㅠ

 

키이우 방면이 주공이었다는 것, 그것이 처참히 실패했다는 것은 이미 국제적으로 완전히 결론이 났다. 외국에서는 전문가가 결론을 내리면 일반인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한 믿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어째서인지 자기 머릿속 부루마블이 가장 뛰어나다고 믿는 듯하다.

 

애초에 64km에 달하는 막대한 기갑 행렬을 성동격서의 '성동'을 위해 버리는 카드로 쓰는 건 미국도 안 한다. 아니 못한다. 그런 건 세상에 가능했던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다.

 

전술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다면 성동격서론을 도무지 내놓을 수가 없다. 러시아(소련)의 종심작전 이론을 조금만 안다면 말이다. 러시아는 수도인 모스크바가 유라시아 대평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나라다. 수도를 막아줄 아무런 지형지물도 없다. 물론 동쪽에는 산맥이 있다만... 우회할 수 있다. 몽골제국을 위시한 유목민들에 탈탈 털려 결딴난 경험이 있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광활한 평원에 덩그러니 제국의 심장부가 놓여 좌우로 뻥 뚫린 채 살아온 러시아의 지리적, 역사적 조건상 그들의 교리는 한국과도 다르고 독일과도 다르며, 다른 대부분의 나라와도 다르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국체의 심장인 모스크바는 침공하거나 침공당할 운명에 있다. 또한 광활한 평야를 아군으로 뒤덮어 공세 하거나, 거꾸로 뒤덮일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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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는 유럽대륙 동쪽, 우랄산맥 서쪽에 위치하며 사방이 광활한 평원이다

출처 - <구글지도>

 

러시아에 있어 정복과 수비는 같은 단어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크렘린의 입장에서는 가당한 주장이다.

 

여기서 러시아(소련) 특유의 종심작전 교리가 탄생한다. 종심은 적 후방 끝을 말한다. 먼저 종심작전은 종심 타격으로 시작된다. 아군 선발대가 앞으로 앞으로 진격한다. 보급이 떨어지건 체력이 떨어지건,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돈좌된 행렬처럼 막장이 되건 무조건 돌파한다. 적을 뚫고 적의 후방까지 다다른다.

 

그렇게 가면서 체력도 실탄도 연료도... 다 잃는다. 공세 종말점이 온다. 오면, 당연히 멈출 수밖에 없다. 여기서 러시아(소련)군의 진짜 장기인 초월진격이 시작된다. 선두가 스스로 하얗게 불태우며 일직선으로 진격할 때까지 전투력을 온존하며 대기하고 있던 후속부대가, 선두가 멈추는 즉시 좌우로 진격한다.

 

적이 투사하는 전투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저 진격한다. 적을 포위 섬멸하기보다는 뒤에 남겨두고 앞으로 앞으로 내달린다. 그 뒤로 또 다른 후속부대가 뒤따른다. 이렇게 되면? 적 진지나 전투집단은 자연스레 포위되어 섬멸되거나, 항복하지 않을 수 없다. 끝까지 버틴다 한들 수도가 러시아군에 떨어져 항복 명령이 내려온다. 이것이 초월진격이다. 그래서 초월진격의 '초월'이 성사되기 직전에 알파벳 W 모양이 형성된다.

 

러시아(소련)의 전통적인 육군 교리는 지리적, 역사적 경험에 의해 독일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다. 즉,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적과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없다는 것이 게르만족의 관념적인 전투사상이다. 그래서 나치독일의 전매특허인 전격전은 재빠른 포위섬멸 후 또 다른 목표를 찾는 경로로 설계된다.

 

러시아는 다르다. 점(도시나 진지)의 공방전과 선(도로)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확보를 과감히 제치고 광활한 면을 '뒤덮어서'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종심돌파 후 초월진격은 단기적으로는 수많은 장병이 총알받이가 되는 막대한 희생을 감내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승리를 거두기까지 전체 희생을 최소화한다는 내적 논리를 갖고 있다. 적지를 접수하는데, 적을 말끔히 소개해서 접수('여기 클리어!' '저기 클리어!')하는 게 아니라 '뒤덮어서' 접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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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생각하는 2차 대전과 실제 2차 대전)

출처 - <링크>

 

한 명에 소총 한 자루, 심하면 두 명에 소총 한 자루 던져주고 무조건 돌격하라고 강요한 스탈린 시대의 우랴돌격(만세돌격)은 우리 눈에 무식해 보인다. 하지만 최대한 빠른 공세로 면을 확보해 승전을 꾀한다는 점에서는 '전체적으로는' 인명을 아낀다. 단번에 많이 소모하게 할 뿐이다.

 

이는 일제의 반자이 돌격(만세돌격)과는 다르다. 반자이 돌격은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한 자살적 돌격이지만, 우랴돌격은 승리를 위한 기세인 것이다. 전혀 다른 사상이다. 러시아군의 장기인 초월진격은 당연히,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죽여도 맞서 싸우지 않고 아군을 지나쳐 버리면, 아군은 어느새 적 점령지가 된 진지에 덩그러니 "....??"하고 있다가 알아서 항복해야 한다. 아니면 땅굴을 파고 굶어 죽거나.

 

물론 종심돌파 후 초월진격은... 잘 돼야 초월진격이다. 뜻대로 안 되면 일명 '꼬라박'이다. 축차 투입이 잘못된 건 아니다. 축차 투입이 성과 없이 계속되는 게 실패다. 꼬라박고 꼬라박고 또 꼬라박고... 종심작전이 실패하면 꼬라박이 된다. 우-러 전쟁 후 러시아군의 꼬라박이 바로 이거다. 성공과 실패의 종이 한 장 차이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어차피 결과적으로 잘 된 종심작전 교리도 과정을 보면 꼬라박이다. 다만 러시아는 지금까지는 실패했다. 키이우는 도시라 초월진격이 아니라 초월점령 혹은 초월포위라는 말이 맞겠지만...  초월진격의 바리에이션 안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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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라박의 역사

출처 - <링크>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군 일선 장병들은 러시아의 주공이 키이우에 닿아 종심돌파가 시작되기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처절하게 선두행렬을 멈춰 세웠다. 우크라이나도 소련의 일부였기 때문에, 종심돌파가 시작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 거다.

 

전근대에는 산성방어전, 현대에는 고지전의 경험을 가진 우리라면 차라리 시내로 적을 끌어들여 지옥 맛 진흙탕 싸움을 선사해 줄 공산이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은 그렇게 못 한다. 종심돌파(시내 진입) 후 초월진격(도시 포위 및 고립)의 결과가 무언지 그림이 그려지니까. 그래서 종심돌파는커녕 종심타격 단계도 허용할 수 없다. 러시아군이 아직 도로에 있을 때 악착같이 덤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여 키이우 방면이 주공이 아니었다는 주장은(예 : "러시아는 줄지어 64km의 기갑 자원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나라라규!") 러시아가 역사적, 지리적 조건에 의해 어떠한 전술 교리를 창안하고 실행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금만 안다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억지다.

 

키이우 주공에 실패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꼬라박이 시작되었다. 나는 '러시아의 패배가 확정되었다'는 서방의 낙관에도 쉽게 동조를 못 하겠다. 러시아의 무서움은 이제부터일 수도 있다. 이 나라는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단 듯이 끝까지 꼬라박는 나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사실은 못 물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