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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역공세는 왜 더딘가

 

우크라이나의 역공세가 주춤한 것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순조롭지는 않다. 지금까지 러시아군이 워낙 많은 약점을 노출했고 우크라이나 수비군의 선전이 워낙 대단했기에 역공세가 생각만큼 장쾌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데 의아함과 갑갑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렇다.

 

나 역시 심정적으로 완전히 우크라이나 편이며,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래서 빛나는 수비와 그에 반해 지지부진한 공격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우크라이나를 지탱하는 건 두 가지다.

 

첫째, 국민들의 놀라운 애국심과 항전 의지

둘째, 외국의 무기 지원

 

지난 글에서 전쟁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재블린도 우크라이나군이 운용하니 지금처럼 강력한 건 맞다. 하지만 포크를 들고 싸울 순 없다. 무기를 든 건 사람이지만 무기를 들긴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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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황

(보라색과 붉은색이 러시아 점유지다

출처 - <Ukraine War Map 트위터>

 

개인화기는 방어용 무기다. 왜 방어용이라고 하느냐 하면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 무기라는 뜻이다. 수비군이 매복해 사용하는 히트 앤드 런 장비다. 재블린, 스팅어에 뚜껑이 펑펑 따이는 러시아 전차의 광경을 보고 또 전차의 시대는 끝난 거 아니냐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런 소리가 나온 지 어언 백 년이다. 전차 무용론은 전쟁 때마다 튀어나왔다.

 

전차가 사냥당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 깊어서, 뇌리에 잘 박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차 무용론은 분석의 결과가 아닌 '인상 비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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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와 인접한 소도시 이르핀에서 

대전차 무기를 들고 있는 한 우크라이나 병사가

격파된 러시아 탱크 앞에 서 있다

출처 - <경향신문>

 

우크라이나가 역공세를 펼치려면 공세에 맞는 공격무기가 있어야 한다. 전투기, 헬기, 그리고 역시 전차다. 원래 공세는 수세에 비해 훨씬 힘들고 비싸고 큼직한 일이다. 한 발에 1억짜리 재블린. 한 대에 수십억 하는 탱크. 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수십 배 차이 나는 무기의 가치가 같은 일은 없다.

 

자. 공세를 펼치는데도 재블린, 스팅어가 전차보다 우월하다 치자. 어쩔 건가. 보병들이 브레이브하트, 라스트 사무라이처럼 재블린, 스팅어를 들고 "와아...!!"하며 적진을 향해 우크라이나의 평원을 뛰어갈 것인가? 적 기관총 사수가 입에 담배 물고 드르륵 긁으면 볼만할 것이다.

 

미국과 나토는 아직 우크라이나에 역공세를 위한 무기를 주는 데 미온적이었다. 전투기까지 바라는 건 언감생심인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헬기와 전차만 이야기하자. 이 두 물건은 전근대 기병의 역할을 한다. 성안에서 농성하던 알보병으로 초원에 몰려 나가 몽골 기병을 상대할 수 있는가? 없다.

 

아무리 노획한 러시아 전차를 전량 역공세에 사용한다 해도 부족할 것이거니와, 대부분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정비를 거쳐야 하는데 예정된 대전차 격돌의 초시계는 계속 돌고 있다.

 

이것이 국제사회의 비정함이다. 미국과 서방은 방어무기는 양껏 퍼주지만 공격무기를 주는 데는 계산기를 두드린다. 체코가 '드디어' 구식 전차 열 대를 줬다지만 러시아가 아무리 생각보다 형편없어도 '중고차' 열 대로 전황이 유리해질 수 있는 상대란 말인가.

 

즉 미국과 서방, 특히 미국이 원하는 것은 어떤 무기를 퍼주고 어떤 무기에는 인색한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은 장기적으로는 우크라이나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를 원한다. 이미 상원에서 '무기 무한대 퍼주기'인 랜드리스 법안이 통과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부활절 휴가로 하원에서 2주간 계류될 수밖에 없는 시점을 노린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출처 세계일보.jpg

2022년 4월 13일 바이든은 젤렌스키와 통화하며

8억달러(약 9800억원) 규모의 군사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위는 그 내용

출처 - <세계일보>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승리하되, '충분히 늦게' 승리하길 원한다. 미 국방성은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거의 확신을 가지고 예측했다. 그렇다면 이미 실패한 전쟁의 늪에 빠진 러시아가 피눈물에 더해 진물까지 빠지고 패배하는 편이 낫다. 어차피 진다면 힘을 뺄 만큼 빼고 지는 편이 전후에 러시아를 찜쪄먹기 수월하다.

 

물론 전쟁이 길어질수록 우크라이나인들은 죽고 다치고 고통받는다. 하지만 미국에게 이건 매우 단순한 문제다. 그들은 미국 국민이 아니지 않는가? 거기다 애국심이 100% 차올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충분한 방어무기와 부족한 공격무기의 불균형으로 전쟁이 '딱 미국이 원할 만큼 적당하게' 장기화하도록 유도하기엔 더없이 좋다.

 

더욱이, 우크라이나가 파괴될수록 전후 미국의 경제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다. 마침 전쟁 중에 우연히 우크라이나 땅에 숨어있던 초대형 가스전도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계산기를 두들기지 않으면 백악관이 아니다.

 

하지만 뭐라고 하겠는가? 그들이 자기 국익을 그렇게 계산하겠다는데.

 

전차의 시대는 가지 않았다

 

역공세를 펼쳐야 하는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전차 증여에 그토록 목말라 하는 게 그 확연한 증거다. 그 이유는 전쟁을 끝내는 것은 결국 보병이기 때문이다. 현대전에 보병이 무슨 소용이냐, 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휘황찬란한 이미지로만 보면 현대전은 미사일과 전투기가 다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드한 밀덕쯤 되면 순서를 거꾸로 생각한다. 이쪽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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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부터 시작해보자.

 

전투기가 왜 필요한가? 전투기는 기본적으로 적 전투기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탈 것이다. 말 그대로 '전투' 기체다. 전투기끼리 싸워 이겨야 제공권을 장악한다. 장악한 제공에서 아군의 폭격기, 정찰기, 공격기가 뜬다. 제공권은 목적이 아니다. 수단이다.

 

제공권이라는 수단으로 지상을 감시하고 때리고 보호한다. 제공권 하에 공격기와 헬기가 떠다닐 수 있고 전 전차를 잡을 수 있다. 또 거꾸로 아군 전차를 보호할 수 있다.

 

전차는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적 전차에 맞서기 위한 무기다. 전차전으로 지상권을 확보해야만 (자주포, 돌격포 등은 생략하겠다) 장갑차가 이동할 수 있다. 장갑차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안에 실린 보병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전투기부터 장갑차까지 이르는 순서는 모두 '수단'이다. 목적은 '보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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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M1A2 에이브람스 전차

출처 - <위키피디아>

 

그래야 최종적으로 보병을 밀어 넣어 시가지와 건물에 아군 깃발을 꽂고 행정을 접수할 수 있는 것이다. 점령이든 탈환이든 행정을 접수하는 데에서 완료된다.

 

모든 무기가 무인화, 기계화, AI화된다고 하더라도 이론상 한 명의 보병은 필요하다. 그 보병은 점령지(혹은 탈환지)의 결정권자이자 결재권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제공권에서 보병에까지 이르는 연결고리에서 전차는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핵심 요소다. 전차의 시대는 갔다? 전차의 시대가 가려면 현대전의 구성 요건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전차의 천적이 많아지고, 전차 승무원의 생존 가능성이 떨어졌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차가 전쟁의 필수품이라는 사실은 한 치도 바뀌지 않았다.

 

동물 다큐멘터리 때문에 사자의 위용이 많이 떨어졌다. 코끼리한테 치이고, 가끔은 하이에나 무리에도 털리고, 운 나쁘면 악어한테도 잡아먹히고... 하지만 사자는 여전히 사자이며 아프리카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육식동물이다. 전차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다시 미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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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이 처음으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를 언급하며 

러시아에 대한 공세 수위를 높였다

출처 - <mbc뉴스 캡쳐>

 

미국은 정의, 인류애,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번 우-러 전쟁처럼 선악이 구분이 명확한 경우엔 더욱 그렇다. 가치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선 수많은 배신을 저질러도 '결국에는' 배신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미국의 패권을 지탱하는 간판 상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을 욕하는 게 아니다. 미국의 간판 상품이 영리활동이라는 점에서는 심드렁하지만, 어쨌거나 가게는 간판에 맞는 상품을 팔아야 한다. 미국은 정의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하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관대한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세계 대부분은, 그리고 한국은 분명히 그 덕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