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앞서 세편의 글에서 특이점에 온 소비자로 인하여 생긴 산업의 변화를 다루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내밀하게 한국 사회에서 움직이는 연구소 연구원들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회사 제품기술연구소에서 근무했던 필자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사회의 모습을 한 번쯤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봅니다. 필자의 시선도 기존 사회적 시선의 단면일 것이고 이런 단면이 모여 사회적 문제 인식으로 이어질 터이니까요.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더 싸게"

 

흡사 올림픽의 표어처럼 보이는 이 세 가지 수식어는 한국의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의 정신적 스트레스의 근간이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더 빠르고’ 비싸면 비쌌지, 결코 더 저렴할 수 없습니다. KTX만 봐도 그렇죠. KTX는 매우 비싼데 다른 기차들은 안 비싸죠? “빠르게· 정확하게·싸게”란 수식어 앞에 "more"란 수식어가 붙음으로 인해 생기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따로따로 떨어져도 골치 아픈 세 단어가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 곳이 서구 자본주의의 본질이 응축된 회사의 연구소입니다. 제품을 개발하는데 “더 빠르게·더 정확하게·더 싸게“ 만들어야 시장에서 판매가 된다는 지극히 자본주의적 논리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수식어가 연구소에서 적극적으로 통용되고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진다면 회사는 엄청난 이익을 얻습니다. 고객은 그 때문에 혜택을 봅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가 가진 미덕을 절대적으로 잘 표현한 문구입니다.

 

그런데도 필자가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이 세 가지 수식어에 깔린 자본주의적 미덕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큰 피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사건만 한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몇 년 전에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가습기 살균제" 사건 기억하시지요? 이 사건을 떠올리는 이유는 필자도 가습기 살균제를 집 방에 있는 가습기에 넣고 가습기를 켜놓았기 때문입니다.

 

83833_33200_598.png

사건발생 11년째 해결되지 않고 있다. 

피해자 총 7,685명 사망자 1,751명(2022. 03. 31. 기준)

출처 - <KBS>

 

필자 특유의 게으름으로 인해 물을 넣고 가습기 살균제 넣는 걸 귀찮아해서 자주 넣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그 사건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필자처럼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염된 가습기로 인해 아기에게 피해가 갈까 봐 살균제를 사용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거나, 평생 그 피해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잠재적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줬을지도 모를 가장의 입장에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주제이지만, 이 글의 목적에 맞게 잠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세제·청결제 등의 각종 화학제품은 대부분 대규모 장치 산업이라고 이야기하는 화학공장이란 곳에서 그 원료가 생산됩니다. 커다란 반응기(Reactor)란 곳에 원료를 적절히 배합하고, 온도와 압력을 조절하여 최종 중간 제품을 생산합니다. 생산된 제품을 가공회사들에 납품합니다. 가공회사는 이 중간 제품을 적절히 혼합하여 다양한 화학 제품들을 생산합니다.

 

오랜 옛날부터 금을 만들려고 여러 가지 제품을 혼합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연금술사라고 불리던 이들의 근대 과학적 발견으로 화학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화학 성질을 이용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은 분석과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간은 수많은 물건을 만들어왔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 중에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인분밖에 없다"

 

 어느 환경학자가 말했듯 인간이 만든 수많은 물건은 자연에 해를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적인 화학물질 제조 방식이 아닌 인위적인 제조를 함으로써 발생하는 폐해는 큽니다. 지금 겪는 탄소 절감의 필요성이 그 한 예이지요. 

 

제조업의 제품개발 연구소에서 제품 개발을 하던 사람들은 RoHS(Restriction of the use of certain Hazardous Substance)라는 6대 위험 원소에 대한 부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품을 개발하는 데 있어 이 제품의 부품들에 RoHS 6대 위험 원소가 얼마나 함유되어 있는지를 별도의 리포트로 제작해서 제출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협력사에서 부품을 입고할 때 RoHS 리포트를 받아 한꺼번에 관리합니다. 제품 개발단계에서부터 위험 유해 물질을 관리하고 개발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어떻게 "가습기 살균제"란 제품이 시장에 나올 수 있었을까요?

 

20220425_165705.jpg

출처 - <에코타임스>

 

"매일 밤 꿈에 리틀 보이가 보인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이름이 '리틀 보이(Little Boy)'입니다. 이 리틀 보이를 비행기에 싣고 일본에 떨어뜨린 조종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신이 몰고 간 비행기에서 리틀 보이가 떨어져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습니다. 투하한 자신 역시도 명령에 따랐기 때문이라고 자위할 수 있었겠지만, 그 조종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전두환 씨처럼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거나, 합리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런 프로세스 말단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만이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연구소는 제품을 만드는 곳입니다. 고객의 돈과 교환되므로 제품은 유용해야 합니다. 만약 제품이 유용하지 않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이 만든 제품이 사용자에게 평생 치유할 수 없는 해를 끼치는 제품이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은 회사의 절차와 명령에 따라서 제품을 만들었지만 내가 만든 제품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제품이라면 과연 그 엔지니어는 남은 생을 잘 살 수 있을까요? "가습기 살균제"를 만든 엔지니어는 제품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을 알겠지요. 본인이 만든 것이고 지금은 유명한 사건이 되었으니까요. 과연 그 엔지니어는 제품 개발 단계에 그 문제를 몰랐을까요?

 

출처 TCO(주)더콘텐츠온.jpg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공기살인> 한 장면.

출처 TCO(주)더콘텐츠온

 

"작게 아주 작게"

 

연구소뿐만 아니라 웬만큼 규모가 있는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업무 대부분이 "작게, 아주 작게" 잘려져 있습니다. 업무를 작게 자르면 그 작게 자른 업무에 드는 시간 측정이 가능합니다. "시장조사"라는 업무를 그냥 주기보다는 타깃(Target) 분석, 타깃 시장 선정 등의 세부 업무로 자르면 지시하고 관리 감독하는 처지에서 일하기가 용이하겠지요.

 

"시장 조사 다했냐?"라고 물어보기보다는 "타깃분석 다 했냐?"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관리하기 쉽습니다. 이 타깃분석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1일 혹은 5일이라고 한다면 전체 시장분석이란 업무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고 언제쯤 완료될지 예측할 수 있지요.

 

그런데 회사의 업력이 쌓이고, 관련된 프로젝트(신제품 개발)들이 몇차례 사이클(Cycle)이 돌고 나면 이런 잘게 자른 업무들이 이전 업무들의 결과물로 인해 대단히 빠르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빠르다고 해서 통상 단계를 건너뛰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이전 프로젝트에서 했던 결과물에 변경 사항 정도만 기재하고 통과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 결과물이 갖는 위험성을 검토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연구원은 이전 프로젝트에서 검증이 끝나서 시장에 출시되었기 때문에 이전 프로젝트 데이터를 참조해서 리포트를 만들기도 합니다. 

 

프로젝트의 수익성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팀장이나 연구소장은 오히려 이전 리포트를 참조했는지 꼭 점검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제품들에 큰 문제가 없이 시장에 출시되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시장 검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개발과정의 시간 단축은 좋은 원가절감 사례이기 때문에 더더욱 권장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이런 개발과정에서 연구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위험을 줄 수 있을지 인지하지 못한 채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i16149691576.jpg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사회적·공익적 가치가 몸에 밴 연구원이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그 위험성을 연구소 내 프로세스(Process)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소위 "일을 일부러 만드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주위에서 받을 터이니까요. 필자는 다행히도 회사생활 하면서 관여한 부품이나 제품이 저런 피해를 줄 만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지, 만약 필자도 "가습기 살균제"의 개발 프로세스에 참여했다면 충분히 놓치고 넘겼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발 프로세스에 있던 사람들을 이해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만큼 기존 연구 프로세스에 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거는 정당화되지 않는 논리이며 문제를 초래한 프로세스에 관여한 자들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방관자가 되는 연구원들

 

연구원들은 다른 회사의 조직원과는 달리, 자신이 만드는 제품들이 소비자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르는 일을 별생각 없이 관성으로 하는 형편입니다. 마치, '리틀 보이'를 싣고 투하 버튼을 누른 조종사처럼 자신이 한 일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모른 채,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괴로워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핵심은 연구원들이 소비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도 있는 방식으로 프로세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연구한 제품의 설계 결함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느낄지도 모르는데도 말입니다.

 

제품에 문제가 있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면 회사에서도 큰 문제가 됩니다. 회사 내 개발 프로세스 연구자들도 이걸 의식해서, 주요 프로세스에 허들이 되는 검수 과정을 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발 일정 지연과 소비자의 피해를 맞바꿀 정도로 간 큰 책임자는 흔치 않습니다. 개발 일정을 지키려 하는 게 통상이지요. 개발 일정 지연은 눈에 보이고 단기적인 것에 비하여, 소비자의 피해는 안보일 수 있거나 장기적인 까닭입니다.

 

175C0D214C5CEB762D.jpg

출처 - <tvN>

 

현대 자동차의 급발진 문제도 전술한 이야기의 한 사례입니다. 자동차의 메커니즘이 점차 전자제품화되면서 급발진 문제는 기계적 메커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전자적 코딩 오류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계의 이상 반응이 아니라 기계를 작동시키는 전자 신호의 오류로 인해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 급발진 문제를 정말 못 고칠까요? 전체 개발 프로세스 측면에서 보면, 기계적 부품의 문제가 아니라 전자신호의 문제가 있을 때 이 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기존 코드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오류를 수정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신차들은 이런 급발진 문제들에 노출됩니다. 연구원들이 아니, 책임자급의 사람들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급발진 문제를 한번 겪어봐야 없어질 거 같은 생각도 드는군요.

 

한국의 제조업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발전과 기술적 향상을 이루었지만, 이 성과의 이면에는 제품이 갖는 위험성을 간과한 채 무작정 더 빠르게 추진한 것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한국의 연구원들은 자신이 만든 제품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 채 개발하는 것이 숙명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럴수록 자신이 하는 일의 주변 상황과 문제를 인식해야 하겠지요.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전기차도 급발진.jpg

2021년 3월 발생한 현대차에서 생산된 전기 자동차 급발진 추정 사고

 

자본주의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90년대 소비에트 연합의 붕괴로 인해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가 우월한 이념이란 것이 드러났습니다. 필자 세대 젊은이들이 꿈꾸던 ‘사회주의 유혈혁명’은 실현 불가능이 아니라, 실현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된 지 오래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욕망과 사회적 효율에 기반하여 인간사회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현재까지 최고(?)의 시스템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비인간적인 시스템이란 점을 살며 깨닫습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고 일하는 연구원들. 사실 이 연구원들이란 단어를 빼고 직장인·경찰·군인·정치인·상인이란 단어로 교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회적 시스템이 최선인가 하는 점은 곱씹어볼 대목입니다. 

 

‘자본주의 천국’ 미국의 대기업들이 세금을 적게 내려고 하는 일 중 하나가 각종 재단에 기부하는 것입니다. 기술 개발 이외에 인간사에 필요한 각종 인문학적 연구들이 이런 재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중 한 연구는 미국에 사는 약 10만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소위 FGI(Focus Group Interview,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통해 직업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내용입니다. 약 1,000개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직업 만족도를 조사했더니 억대 연봉을 받는 로펌 변호사나 의사, 유명 운동선수들의 직업 만족도가 매우 낮게 나왔습니다. 의외로 직업 만족도가 가장 높은 직업군은 사회복지사, 소방관 같이 타인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적으로 타락하고 물질 만능의 시대가 와도,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이 타인에게 도움을 줄 때 좀 더 행복하다는 것이 증명된 연구라고 봅니다.

 

20220425_174808.png

출처 - <주간경향>

 

연구원들은 그들이 만든 제품이 제품 구매자에게 어떤 편의를 준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 삶의 만족도를 높여줄 수 있다는 걸 상기하며 일하길 바랍니다. 더불어 자신이 관여한 제품이 잘못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비단 연구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자본은 애초에 여러분이 만족감을 느끼는지, 얼마나 괴로운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이 챙겨야 합니다. 본인 스스로 업의 의미와 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는 것만이 자본주의 세상을 인간적으로 사는 방책이라 여기는 바입니다.

 

다음 편에서 연구원에 관한 또 다른 주제로 글을 이어 나가겠습니다.

스타워즈 덕후, 농구 덕후, 애플 덕후.. 라고 생각만하고, 실제로는 잘 모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