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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고인물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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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수도 카트만두. 이곳에는 서울의 이태원과 비슷한 곳이 있다.

 

타멜. 외국인 배낭여행자들의 세상이다. 외국인 고인물들은 급하게 사야 할 것이 없으면 그 근처론 잘 가지 않는다. 네팔 지인들이 싫어하는 곳인데다 거기가 아니라도 가성비 좋은 식당과 주점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인간 가이드북 역할을 공짜로 해줘도,

 

‘너 말 따라 했다가 엄한 일을 당했다”

 

며 씩씩거리기 일쑤다.

 

네팔의 신삥 무리들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가야 한다. 지친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맛있는 음식과 술 한잔하러 나왔는데 기분 잡칠 일을 만들 필요, 없는 거다. 현지인도 아니고 관광객도 아닌 외국인 고인물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휴식과 회복을 위한 식당과 주점 리스트를 만들어 나가다 보면 고인물들끼리 모이는 웅덩이들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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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인물들은 대부분 국제 NGO 활동가, 선진국의 ODA 프로그램 참여자, 적정기술 개발자 같은 이들이다. 네팔에서 이들은 꽤 많은 성과를 냈다. 예로 일본만 해도 꽤 많은 이들이 네팔에서 활동해왔다.

 

네팔 고지대에 무스탕이라는 곳이 있다. Upper Mustang은 입산비만 미화 2만 달러에 연간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도 제한한다. 1960년대인가에 이곳의 매력에 푹 빠진 일본인 사업가 한 분은 이곳에서 연구소를 세워 경작할 만한 작물이 있는지 연구했고, 메밀을 심었다.

 

그 결과 이 지역민들은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해 생활수준 향상을 이룰 수 있었다. 네팔을 찾는 외국인들은 메밀로 만든 여러 식품들, 심지어 메밀국수까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역의 메밀밭은 명물이 되었다. 네셔널지오그래픽에도 종종 멋진 메밀밭 풍광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성과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네팔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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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엔 농업 쪽 기술자들이 많이 찾았다면 최근엔 적정기술 연구자 같은 독특한 공돌이들을 볼 수 있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요즘은 3G 안 터지는 지역은 거의 없다. 심지어 3G 네트워크와 낡은 휴대전화기를 이용해 열대우림의 불법 벌목을 막는 단체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지대인 무스탕에 사는 사람들은 인공위성 전화를 이용했다. 무진장 비쌀 뿐만 아니라 느렸다. 인터넷 같은 건 못 썼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도 3G를 이용할 수 있는 사설 전화 네트워크를 만드는 이들이 있었다. PC 몇 대와 아슬아슬한 안테나들 몇 개를 가지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계시민으로서 저개발 국가에서 뭔가 뜻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덤벼드는 이들이 생겨나는 거다. 문제는 가난한 나라들은 사회시스템 자체도 심각하게 부패해 있다. 의사 한 분이 한국에서 은퇴하고 네팔에 무료 의료시설을 만들겠다고 하자 네팔 담당 공무원이 했다는 말은 아주 유명하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악업을 해소하는 선행을 하시니 행복하시겠네요? 그 마을 사람들은 의료 기관이 들어서니 행복할 거고. 그러려면 제 통장도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따위로 돌아가는 사회시스템과 처절한 빈곤의 참상을 보고 있노라면 멘탈 깨진다. 깨진 멘탈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부비고 버티며 그나마 깨진 파편을 좀 제법 주워 담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지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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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시는 분들도 꽤 있을 거다. 

출처/세이브 더 필드런

 

 

삽질의 조짐

 

거의 10여 년의 세월을 개고생 해가면서 진행했던 일이 좀 될까 싶었던 순간이었다. 더 최악은 그게 내 평생 받들어 모셔야 할 분과 결혼한 지 1년이 막 지난 시점이라는 거다(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딴지일보가 한국 매체 중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현장을 전달할 수 있던 건 내가 그 한복판에서 지진을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편집부가 현장을 파악하려고 네팔에 들어오려는 타 언론매체를 비행기 편으로 하드 드라이브와 밧데리를 보내는 등, 뭐, 여러 일이 많았다).

 

아래는 당시 현장에서 썼던 기사들 중 일부다.   

 

네팔 7.9지진 - 현지 특파원 보고(28일 오후 1시 45분 추가)

네팔 지진 4월 29일 현지 특파원 소식: 상상하는 네팔과 실제의 네팔

실시간 르포: 지진 6일차, 여기는 네팔 카트만두

 

당시, 성과라도 있었다면 지진으로 진행하던 일이 망했더라도 다른 프로젝트를 개발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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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은 내륙 국가다. 물자 옮기는 것이 그나마 수월한 곳은 남동부 지역 밖엔 없다. 중국 쪽으론 히말라야가 가로막고 있다. 지진으로 다 박살 난 것들을 수습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가 들어와야 한다. 그 물자 이동의 길목에 사는 이들은 수십 년 전에 억울하게 땅을 뺏긴 역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어마무시한 수준의 억압을 받고 살았다. 2006년 왕정이 무너진 이후, 무려 8년을 끌었던 헌법 개정 과정에서 보상이 시원치 않았다. 그게 지진 이후 터진 거다. 그들은 국경 봉쇄를 시작했다.

 

이거, 2006년부터 2007년 사이에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다. 인도와의 주요 국경도시들이 막히면 LPG 가스 한 통 구하는 것도 전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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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중간 즈음에 있는 곳이 주유소. 저 많은 오토바이들이 기름을 넣으려고 대기중이다.

 

가능한 한 네팔에 남아서 복구 사업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국경 봉쇄를 보곤 텄다고 생각해 귀국했었다. 그때 내가 속해 있었던 회사는 지진 직전에 거의 공세 종말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중국과의 국경 근처에 정말 탈탈 털어서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지진에 쓸려갔다. 결국 알거지로 돌아갔었다.

 

암튼 이번엔, 받들어 모실 분을 책임져야 하니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네팔에서 인연을 맺은 작은 건축회사에서 받아준다고 해 허겁지겁 들어갔었다. 하지만 거기엔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정 목적의 건물 같은 걸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미션을 받았는데, 내부 논의에서부터 걸렸다. 난 남아시아에서 남들이 수억 들여야 될까 말까 한 것들을 해결할 방법은 알았지만,

 

‘채식주의자에게 생선 먹는 것은 기억할 만한 기억이 되지 않겠냐’

 

고 이야기하는 분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는 방법은 몰랐다.

 

우물 안 개구리의 해석학

 

대학시절, 수학과 2학년 1학기에 배운 과목이 생각났다. 해석학, 영어로는 Calculus. 그 교과서에 가장 먼저 나오는 건 이거다.

 

“왜 1이 0보다 큰지 증명하라”

 

겁나게 당연한(?!) 이야기를 등록금을 내가면서 배웠던 처지라 세상 일, 어지간하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채식주의라는 정치적, 종교적 신념을 남들에게 ‘설명’해야만 하는 문제에서 막혀버렸다.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섬’이다. 섬나라 사람들은 외부 세계와 접할 일이 별로 없다. 최근에도 아프간 특별 기여자들이 울산에 정착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들은 노옥희 울산교육감을 필두로 한 교육청 직원들이었다. 이분들,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는 이슬람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오해들을 풀기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고 한다. 솔직히 난 이게 아직도 낯설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중 몇몇은 무거운 사회적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개종을 선택하기도 한다. 인도 사회체제는 그런 탈출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불가촉천민들을 법으로 따로 구분한다. 그걸 피해 인도 네팔 국경에 넘어와서 사는 수많은 이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처럼 종교는 다층적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인식에서는 ‘이슬람=테러리스트’라는 일분법이 통용되어 왔다. 그 우물에서 벗어나기란 앞으로도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새로 취직한 회사는 그쪽 업계에서도 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건축회사인데 임직원 누구도 건축 관련 자격증이 없었다. 심지어 도면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곤 사장 한 명 밖에 없었다. 간판이 필요했던 사장은 MBA 과정에 등록했는데, 수업을 따라갈 역량마저 부족했다. 거기에 내가 투입되었다. 사장 대신 핀란드까지 가서 학위를 대신 따주었지만, 그러곤 바로 잘렸다. 그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낼 재주가 없던 내 탓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가본 적이 있어야 핀란드 사창가 가이드 같은 것도 하지.

 

용감해서 시작하다

 

회사를 나와 실업급여 받으면서 사회적 기업 하나를 만들어보려다가 그것마저 깔끔하게 실패했다. 한국으로 철수해서 막막하던 중에 후배 녀석 하나가 권했던 게 노가다였다. 문젠 그걸 권한 그 녀석도, 거기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나도 노가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건물이나 다리 같은 걸 세우는 일 아닌가?

 

라고만 여겼지, 노가다가 이렇게 많은 분야와 일들로 나뉜다는 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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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느 정도 노가다일에 무지했냐면... 별생각 없이 집 근처에서 구인 쪽지 붙어 있는 곳에 갔는데 나이 때문에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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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고 있는 동네엔 '시스템 동바리'를 하는 곳들이 많다. 콘크리트를 부어 넣으면 완전히 마를 때까지 형태를 잡아줘야 한다. 동바리는 거푸집으로 잡아준 형상이 유지되도록 지지해 주는 것이다. 사진처럼 상하좌우로 연결되도록 규격화되어 있는 것들을 시스템 동바리라 한다. 이거, 기본 6미터 파이프를 세워 올려서 연결해야 한다. 어지간한 힘이 없으면 못한다. 그래서 이쪽 공종에선 마흔다섯 넘어가는 이들을 고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 즈음, 딴지일보 정치부장이었던 물뚝심송 선배가 세상을 떠났다. 심란한 와중에 급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게 하필이면 바라시(일본어 바라스 ばらす의 명사형)라 부르는 거푸집 해체하는 곳이었다. 그것도 체류 자격이 안되는 외국인들을 주로 고용하고, 물량전을 치러야 하는 도급업체.

 

지금이라면 점심 먹기 전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을 현장이다. 지금 짬밥으론 보이기 때문이다. 힘들게 일해봐야 뭔가 나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고 오야지 배만 부르게 만드는 곳이라는 걸. 그런데 그때는 개정 작업을 했던 책이 여러 이유로 시간을 끌어서 통장이 완전히 말랐던 상황이었다. 당장 돈이 급했고, 더불어 이쪽 일에 대해 몰랐다. 아니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무식해서 용감했고, 용감하니 했다 그냥.

 

해봐서 말하는 삽질

 

나무위키 같은 데에 건설 일용직에 대해 설명한 내용, 맞는 게 없다고 봐도 된다. 당장의 삶을 절실하게 바꿔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이들이 들은 풍월과 인력소개소 일주일 정도 나가본 경험으로 쓴 것들이다. 일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현장 형님들과 꽤 어울려야 한다. 일도 힘든데 형님들과 술까지 마시면 생각을 정리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필요로 하는 능력도 워낙 공종별로 달라 다른 공종 사람들에 대해 알기도 쉽지 않다.

 

일하는 곳이 이른바 1군 업체(건설사들 중에서 상장사들이라고 보시면 된다) 현장이냐 아니면 일수가방 들고 쇠사슬 급의 금목걸이 걸고 다니는 달건이 형님들이 만드는 건물이냐에 따라 현장 상태는 G7 언저리에 있는 국가냐 저개발국가냐로도 갈린다. 이걸 전혀 모른 상태에서 덤벼들었고, 무조건 잘 하려고만 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건 내 인생의 스승 셋을 한 인력사무소에서 만나면서 깨달았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이야기다. 작년에 건설 현장에서 말도 안 되는 대우를 받은 분이 처지를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관련기사) 어떤 빌어먹을 놈이 40대 여성 한 분을 화기 감시자로 불러놓고선, 수작 부리다가 잘 안되니까 장비, 그러니까 타워 크레인이나 지게차로 옮겨야 할 일을 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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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터 파이프 하나가 5kg 정도 한다. 콘크리트가 들어간 것들은 더 무겁고. 이거 100개면 한 다발이다. 현장에선 지게차나 타워 크레인으로 옮기지 사람에게 시킬 일이 아니다. 화기 감시자는 용접사들이 용접하는 현장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불이 붙으면 즉각 대응하도록 소화기와 불티 방지막, 유리섬유 천 같은 거 들고 다니면 되는 일이다. 500kg이 넘는 자재를 옮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을 여럿이 방치했다. 본인은 어떻게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저 사달이 났던 것이다. 이런 일, 생각보다 많다.

 

이제야 목수라는 호칭이 조금 익숙해지는 중이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 뭔가 이러쿵저러쿵 글을 남기는 것도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딴지일보에 화정동 아이파크에 관한 이야기를 쓰게 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내가 일반인들의 언어 문법과 논리체계에서 점점 이탈하고 있었다는 것. 이 일에 대해 쓴다면 지금 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거기다 형틀 목수로 정착하기 전까지 꽤나 많은 일들을 해봤다. 삼성전자 평택 현장에 계장공으로도 들어가 봤고, 인테리어 용접 일도 몇 달 해봤다. 문제는 시간이 계속 지나고 있다 보니 다른 일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쪽 일도 생초보만 아니라면 기술자로 만들어가는 시스템이 있다. 단, ‘기술을 배우면 밥 굶진 않겠지’ 정도의 각오로 덤벼들었다간 버티지 못한다.

 

이제부턴 이런 이야기들을 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