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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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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열린책들>

 

 

『어머니』의 배경, 피의 일요일과 1905년 러시아 혁명

 

해가 갈수록 쌓인 피로 때문에 사람들은 식욕을 잃어버려 뭔가 먹기 위해서라도 위를 찌르는 듯한 아픔도 참아 가며 연방 보드까를 마셔야만 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세계사적 격변기에 러시아는 유럽에서 굉장히 낙후된 농업국가였다. 크림전쟁에서까지 패배한 러시아는 차르의 주도하에 근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그 첫 번째가 농노해방이었다. 그러나 살인적인 물가와 지주들의 착취로 해방된 농노들의 삶은 그 이전보다 더 비참했고 굶주린 이들은 반강제적으로 도시로 이주해 저임금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과거 농민이었던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고 대부분 문맹이었다. 싸구려 보드까만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기에 대부분 알콜 중독에 시달렸다. 평균 수명은 50세를 넘기지 못했다. 술에 취한 채 행해지는 가정 폭력은 모든 러시아의 어머니들에게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운명 같은 것이었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은 ‘가폰 신부’(그는 노동자들의 불만이 혁명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파견된 러시아 비밀경찰의 프락치였다)의 지도 아래 성당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향했다. 신앙심 깊고 순박한 이들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삶의 고통을 호소하려고 했다. 그들은 인자한 황제가 자신들의 급료를 올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 일가는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황제의 군대는 평화로운 시위에 일제사격으로 대답했다. 심지어 대포까지 발사했으며 마지막으로는 공포 속에서 쓰러져 피 흘리는 시위대 속으로 황제의 기병대가 돌격하여 칼을 휘둘렀다. 일명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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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을 묘사한 그림.

 

피의 일요일은 곧 러시아 1905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는 다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계획된 사회주의 혁명’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가족들과 함께 혁명군에게 처형당한다. 

 

이 모든 변혁은 ‘빠벨’과 ‘닐로브나’ 같은 러시아 민중들의 피와 눈물이 바탕이 되어 가능했다.

 

 

러시아의 어머니, ‘닐로브나’의 삶

 

매일같이 마을로부터 떨어져 있는 노동자촌의, 열기와 기름 냄새로 절어 있는 대기 속에서 공장 사이렌이 떨리는 듯한 소리로 울려 퍼지면, 그 소리를 따라 회색빛 작은 집들로부터 아직 잠에서 덜 깬 몸으로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침울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마치 질겁한 곤충처럼 거리로 뛰쳐 나온다.

 

‘미하일 블라소프’는 이 우울한 공장촌의 열쇠공이며 ‘닐로브나’의 남편이고 ‘빠벨’의 아버지이다. 그의 얼굴은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고 근육은 억셌다. 공장촌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늘 술에 취해있었다. 술에 취하면 자신의 아내인 닐로브나에게 ‘버러지 같은 년’이라고 욕을 해댔고 저녁 밥을 먹은 후 닐로브나가 상을 제때에 치우지 않았다며 접시들을 마룻바닥에 팽개치기도 했다. 그리고는 보드까 병을 들고 벽에 기대에 울부짖듯이 노래를 불러대곤 했다.

 

그녀는 이제 겨우 40세였지만 등이 굽어 있었고 얼굴은 여기저기 움푹 파인 주름투성이었다. 힘겨운 노동과 반복되는 남편의 구타에 보통 때에도 무엇인가가 두려운 듯 허리를 굽히고 걸어다녔기 때문이다. 닐로브나가 겪는 이 지독한 가난과 폭력은 적어도 이 노동자촌에서는 일종의 합법이었고 당연한 것이었다. 닐로브나 역시 단 한 번도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늘 보드까에 취해서야 잠에 들던 남편 블라소프는 탈장(脫腸)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닷새 동안 고통으로 악을 쓰고 숨을 헐떡이다가 죽었다. 닐로브나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들 빠벨은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빠벨은 아버지처럼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술을 취해 들어와 아버지와 똑같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닐로브나에게 저녁밥을 달라고 소리쳤다. 그리곤 구토해대며 널브러졌다. 닐로브나는 애처롭고 부드럽게 사랑하는 아들 빠벨에게 말했다.

 

“넌 마시지 마라! 네 아버지는 너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술을 마셔 댔어. 그러고서 얼마나 내게 손찌검을 해댔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네가 이 어미한테 그렇게 하겠단 말이냐, 응?”

 

이윽고 그녀의 두 뺨에서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마세요, 마실 것 좀 갖다주세요.” 아들은 조용히 말했다.

 

 

‘빠벨’의 구속

 

아들 빠벨이 남편과 다른 점은 문맹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빠벨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빠벨은 계속해서 어디선가 책들을 가져와 읽었다. 책을 읽을 때는 눈에 안 띄게 읽으려 했고 다 읽은 책은 어딘가에 숨기곤 했다. 그리고 빠벨은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런 빠벨의 변화가 마냥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왠지 두렵고 불안했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빠벨에게 도대체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빠벨은 읽던 책을 치우고 조용히 말했다. 자신은 자기 같은 노동자들의 삶에 관한 책을 읽고 있으며, 이런 책을 읽는 것만으로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이 말은 날벼락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숨이 콱콱 막혀 왔다. 그리고 아들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빠벨은 두 눈을 아름답고 밝게 불태우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기만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진 비참한 삶에 대한 분풀이를 어머니 옆구리에 해댄 거예요. 자기의 비참한 삶에 대한 분풀이를 말입니다. 비참한 삶이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데도 아버진 그게 무엇 때문인지를 몰랐던 거예요. 아버진 공장이 건물 두 개로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30년 동안 일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건물이 일곱 개나 되지 않느냐고요!”

 

“우선 공부를 하고, 다음엔 사람들을 가르치겠어요.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배워야만 해요. 우리는 알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삶이 어째서 그렇듯 고통스러운가를 말이에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제발 몸조심하거라!”

 

빠벨과 닐로브나의 집에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손님들 중에는 우끄라이나인도 있었고 ‘나따샤’같은 젊은 여성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불렀지만 닐로브나에게는 빠벨처럼 ‘어머니’라고 불렀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에게는 가장 이쁜 것 하나가 있다. 바로 자식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였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들 빠벨만큼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는 가슴이 떨리고 두려웠지만, 그들에게 사모바르(러시아 전통 찻주전자)에 불을 지펴 차를 대접했다. 공장촌 변두리에 있는 빠벨과 닐로브나의 작은 집은 점점 주목받기 시작했다.

 

반민중적인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었고, 그들의 무기는 법으로 위장한 폭력이었다. 빠벨과 친구들에 의해서, 또 다른 노동자들에 의해서 공장촌에는 전단지가 돌기 시작했다. 전단지에는 다른 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소식과 차르 체제의 착취구조에 대한 비판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공장촌의 노동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헌병대는 사냥을 시작했다. 헌병대는 한밤중에 들이닥쳐 노동자들의 가옥을 수색했고 그들을 연행해갔다. 빠벨의 친구들도 끌려갔다. 

 

빠벨이 공장 사장의 부당한 착취에 맞서 모여든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한 날, 어머니 닐로브나는 군중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역력했다. 그날 밤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어머니가 애원했지만, 그들은 압수수색을 실시했고 얼굴이 누렇게 뜬 장교의 지시 하에 빠벨을 잡아갔다. 어머니는 그들이 아들을 감옥에 집어처넣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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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개봉된 영화 ‘어머니’ 포스터

 

그가 잡혀가자 어머니는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벽에 등을 기대었다. 슬픈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생각하면 그저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오래오래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그녀는 오랫동안 방 안을 이 구석 저 구석 들쑤시고 다녔지만 어디 하나 쉴 곳도 없었고 더구나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내 어둠이 밀려오고 그녀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유인물을 가져오기로 했던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 생각이 간절했다...... 

 

어머니는 잡혀간 빠벨을 대신해 공장촌에 전단지를 배포했다. 빠벨이 잡히고 전단지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곧 빠벨의 유죄를 증명하는 것이란 말이 그녀를 행동에 나서게 한 것이다. 두려움보다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컸다. 일이 반복될수록 어머니는 점점 더 능숙하게 전단지를 배포했다. 

 

빠벨이 돌아왔다. 꿈에도 그리던 사랑하는 아들, 빠벨이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고동치는 심장을 억제하느라 애를 썼다. 빠벨 역시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이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빠벨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우리들의 위대한 일을 도우셨다니 고맙지 않을 수 있나요! 한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어머니를 정신적인 동지로 부를 수 있다는 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행복이에요.”

 

이제 닐로브나는 아들 빠벨의 어머니이자 동지가 되었다. 어머니의 가슴은 자부심으로 벅차올랐다.

 

이제 어머니는 두렵지 않았다. 아들 빠벨이 깃발을 움켜쥐고 시위대를 이끌 때에도, 그 시위대의 일원이 되어 함께 외칠 때에도 어머니는 두렵지 않았다. 가진 자들은 절대로 자기 것을 그냥 내주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힘 앞에서만 굴복한다. 그 힘의 역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김수영 시인은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다'고 했다. 인류 역사가 증명하는 가장 간단한 사실이다. 차르의 탄압은 더욱 악랄해졌다.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했고 군대는 소총에 착검까지 하고 시위대를 사냥했다.

 

깃발을 움켜쥔 빠벨의 뒤로 어머니와 공장촌의 노동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전제정치의 몰락과 민중의 부활을 힘 있는 목소리로 합창했다. 시위대를 막고 있던 군대 속에서 “앞에-총!”이라는 날카로운 명령이 툭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눈도 꿈쩍 않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미 어머니의 가슴은 두려움이 아닌 강철같은 의지로 채워져 있었다. 군대가 시위대를 덮쳤다. 시위 현장은 순식간에 공포의 아수라장이 되었고 여기저기서 군인들이 휘두르는 개머리판에 시위대들이 쓰러져갔다. 빠벨이 들었던 깃발도 회색 군인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어머니는 빠벨의 목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사랑하는......”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보통 사람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착각은 그들이 법을 적용하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전혀 아니다. 판사들은 법의 해석과 적용이라는 권한으로 권력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윤택한 삶을 보장받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조국을 송두리째 팔아넘긴 을사오적, 이 다섯 명 전원이 판사 출신임은 우연이 아니다. 재판은 형식일 뿐이었고, 판결의 결과도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의 판사, 살이 뒤룩뒤룩 찐 그의 친구, 그리고 검사는 피고인들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편 판사들의 뒤편에선 초상화 속의 짜르가 판사들의 머리 너머로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빠벨, 빠벨과 함께 구속된 사람들 모두에게 유죄, 시베리아 유형(귀양)이 선고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가슴 속에 전단지를 품고 거리로 나섰다. 그 전단지에는 자신의 빠벨이 법정에서 행한 연설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알지 못했다. 헌병대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었다는 것을. 헌병대는 어머니를 도둑으로 몰아 체포하려고 했고 어머니는 저항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어머니와 헌병대를 둘러쌌다. 어머니는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고 외쳤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뭣 때문에 내 아들과 그의 동지들이 재판을 받았는지,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제가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미의 진심을 믿어 주십시오. 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믿어 주시오. 어제 그들은 여러분 모두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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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러시아판 표지

 

헌병대는 모여든 군중들에게 해산을 명령하며 어머니를 폭력적으로 체포하려 했다. 모여든 군중들이 어머니에게 달아나라고 외쳤지만, 가슴을 얻어맞은 어머니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누군가가 어머니의 전단지를 군중들에게 뿌렸다. 헌병대 속에 숨어있던 첩자(그동안 노동자인척 했던 스파이)가 주먹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후려갈기며 “입 닥쳐, 이 쌍년아!”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개 같은 년!”이라고 말하며 다시 어머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어머니는 마구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문설주를 끌어안다시피 붙들었다. 헌병대가 어머니의 그 손을 후려치고는 목을 잡고 짓누르기 시작했다.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의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생물학적 사랑을 뛰어넘는 사랑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모성애’라고 한다. 모성애는 너무나 헌신적이어서 맹목적이기까지 하다. 어머니의 사랑은 너무 깊어 속을 알 수 없고, 너무 넓어 그 끝을 알 수 없으며, 너무 높아 쳐다보면 어지럽기까지 하다. 감성을 깨는 말이긴 하지만, 이 사랑에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면 해석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자신의 유전자를 전승받은 혈육의 잉태와 출산을 하는 포유류 고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왠지 억울하고 인정하기 싫어진다. 인간이란 존재를 포유류라는 생물학적 특징으로만 설명한다는 것은 인생과 축생(畜生)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직계 혈연 조직을 의미하는 ‘가족’은 절대적 가치가 되었다. 헐리우드 영화부터 딴지일보 게시판까지, 가족의 가치는 늘 옳은 것이고 대부분의 공감을 얻는다. 아이들에 대한 각종 범죄나 학교 폭력에 대한 기사라도 뜨면 내 아이가 당했다면 죽여 버릴 것이라는 ‘살인 충동의 분노’까지도 이 공감의 예외는 아니다. 내 가족의 안녕과 이익은 절대선이다.

 

입시 교육과 과도한 사교육을 비판하지만, 자신의 아이는 스스로 그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내 아이는 명문대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 재벌 2, 3세들의 무개념적이고 심지어 반사회적이기까지 한 행태에는 분노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대기업에 가족 중 하나가 입사라도 하면 잔치라도 벌일 기세가 된다. 실제로 대단히 진보적인 지인에게서 자신의 아들이 국내 1위라는 모 법무법인에 인턴으로 들어갔다며 술을 사겠노라는 연락을 받은 적도 있다. 이제 가족은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왜 가족은 이데올로기가 된 것일까. 이제는 비밀도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이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가정이다. 안정적인 가정이 유지되어야 안정적인 체제 유지가 가능하다.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그리고 우리의 이기심이 오직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어야만 체제가 부조리함이 있어도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체제는 구성원 모두가 ‘소시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 미디어를 포함하여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고 있다. 체제 유지를 위해 신화나 종교가 했던 역할을 이제 현대 사회에서는 가족이 하고 있는 것이다. ‘닐로브나’가 ‘빠벨의 어머니’일 때는 체제가 위험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러시아의 어머니’가 될 때 부조리한 체제는 위험에 봉착하는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22살의 풋풋한 청년이자 청계천 피복 공장의 노동자였던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 그가 이 끔찍한 죽음의 대가로 요구한 것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너무나도 소박한 것이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죄책감마저 느끼게 했다. 그가 전신 화상의 고통 속에 죽어가며 어머니에게 남긴 말은 저들과 타협하지 말고 싸워달라는 부탁이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마지막 부탁에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고 약속을 지켰다. 이소선 여사는 그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모든 회유와 협박에 맞서 전태일의 요구 조건을 국가가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기 전까지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시체 인수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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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영정을 품에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여사

출처-<전태일 재단>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파악한다면 포유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인간을 들여다보면 복잡계 내에서도 가장 최상단에 위치한 생명체일 것이다. 닐로브나가 보여준 자식에 대한 사랑, 즉 생물학적 사랑을 뛰어넘는 더 큰 사랑,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한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친족의 범위를 넘어 더 보편적이고 더 공동체적인 큰사랑으로 나아갈 때 그것이 축생과는 다른 인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네 번째 인생탐구의 결과이며 당연한 말이지만 판단과 동의는 언제나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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