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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더 가까운 대만땅, 금문도  

 

1949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대만으로 쫓겨갈 때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게 금문도(진먼다오)였다. 당시 장제스는 금문도에 4만 명의 국민당군을 남겨놓고는 말했다.

 

"죽음으로 금문도를 사수하라!"

 

잔인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국민당으로서는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금문도는 대만에는 최후의 보루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손톱 사이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였다. 중국의 하문시(샤먼시)와 불과 4km 정도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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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문도와 금문도는 명나라 때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두 섬은 짧은 곳 기준으로 2km도 안 되는 거리였다. 이 두 섬은 예로부터 형제섬으로 서로 교류가 많았다. 실제로 1949년 10월 17일 하문시로 출근하거나 장사를 하러 가거나 장으로 보러 갔던 금문도 주민 7천 여 명은 이날 배를 타지 못하게 됐고 중국에 머물게 됐다. 한국과 같은 이산가족이 이렇게 만들어진 거다. 연평도·백령도와 같은 서해 5도와 북한 사이의 긴장감 정도로 판단하면 된다. 참고로 대만 본토에서 금문도는 2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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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중국 공산당은 난징, 상하이, 우한, 창사를 공격했다. 베이징에선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그때. 장제스는 눈물을 머금고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옮겼다.

 

중국 공산당 군은 그 뒤를 쫓아 대만으로 가는 길목인 금문도를 공격하게 된다. 공산당 군은 2만 명의 병력을 편성해 금문도로 밀고 들어갔지만...이들을 맞이한 건 호련 장군 휘하의 4만 명 국민당 군이었다. 2만 명의 공산당 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해안가에서 박살이 난다.

 

이 상륙작전이 훗날 '금문전투'라 불리는 전투다. 1949년 10월 25일부터 27일까지 벌어진 전투였는데, 막장 중의 막장 전투였다. 이 당시 인민해방군은 적의 병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중화민국 애들은 2개 사단도 안 될 거다. 다 합해봐야 1만 2천 명? 그냥 우리도 한 2만 명 보내면 확 쓸어버릴 수 있을 거야."

 

라고 낙관적으로 보고는, 1차로 9천 명의 상륙 병력을 보내고, 이후 1만 명을 추가 상륙해서 박살을 내자는 작전을 짰다. 그렇게 해서 수백 척의 '낚싯배'를 징발한 인민해방군은 여기에 병력을 실어서 금문도로 보낸다. 원래 계획이라면, 금문도의 룽커우에 상륙했어야 할 인민해방군은 때마침 불어 닥친 태풍에 휩쓸려 룽커우를 지나 구닝터우에 상륙하게 된다. 금문전투를 '구닝터우 전투'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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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TN2 화면캡쳐>

 

 

금문도가 대만의 최전선이 된 이유 그리고 6.25  

 

이렇게 상륙하는 데까지는 좋았지만, 상륙할 때 이미 발각이 됐다. 인민해방군은 기세 좋게 내륙까지 진출했지만,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조 때 상륙한 건 좋았지만, 간조가 되면서 이들 상륙용 '낚싯배'가 돌아가 추가 병력을 실어 나를 수 없게 됐다. 이걸 놓치지 않고 중화민국군이 화염방사기·기름·수류탄 등등으로 배들을 박살 냈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인데, 어찌어찌 병력을 추가로 더 상륙시켰지만 고지대에서 전차·화염방사기·기관포 등등으로 무장한 중화민국 군에게 '썰려' 나간 거다.

 

인민해방군은 상륙작전의 기본이 안 돼 있었다. 상륙 거점 확보에 실패했고, 선박 부족으로 지속적인 보급이나 병력 충원이 어려웠고, 선박이 거의 다 '목선'이었기에 중장비를 실어 나를 수도 없었다. 이러다 보니 보급이나 화력에서 밀렸고, 결국 박살이 난 거다. 본토에서 판판이 깨져야 했던 중화민국 군대는 간만에 공산당 군대를 박살 낸 거였다. 덕분에 중화민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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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TN2 화면캡쳐>

 

이때부터 금문도는 대만군의 최전선이 된다. 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언제 점령이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이미 중국 본토는 공산군이 다 장악한 상황. 당시 중국 본토의 인구가 5억 수준이었다면, 대만의 인구는 채 1천만이 되지 않았다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후퇴하는 도중이었다. 9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인구에서 이미 밀렸다. 중화민국 군이 금문도 포격전 이후에도 유지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는 40만 명 수준이었다(징병제로). 중국은 어떨까? 지금 군대를 최대한 줄이고 줄였음에도 중국 인민해방군의 숫자는 200만 수준이다.

 

애초에 싸움이 안 되는 체급이다. 중화민국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건 '바다'라는 천연의 장벽뿐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관문이 되는 금문도를 목숨 걸고 사수해야 했다. 첫 번째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국민당군은 그대로 금문도를 굳혀서 버텨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은 공산당 편이었다. 중국 본토의 크기만 봐도 알 수 있을 거다. 이들은 해군을 키우고, 상륙 병력을 가려 뽑아서 금문도를 점령할 생각을 했다.

 

국공내전 당시 활약했던 정예병들을 밑으로 내려보내 상륙 병력으로 활용하면 끝이다. 이미 백전연마한 정예 강군이 있지 않은가? 적당한 해군력만 확보하면 바로 밀어붙이면... 한순간에 금문도를 점령할 듯이 보였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중국 입장에서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 부르는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금문도로 가야 했을 백전연마의 노련한 병력이 한반도로 빠진 사이 금문도에는 '불안한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이 당시 중화민국군의 해-공군이 인민해방군의 해-공군을 능가했다. 중화민국은 해-공군의 우위를 앞세워 금문도를 지켰고, 인민해방군은 이를 치기 위해 해-공군을 확충하겠다고 나섰다.

 

이 불안한 평화가 깨진 건 대만 쪽의 사소한(?) 움직임 때문이다. 대만이 금문도 쪽에 병력을 증파한 것이다. 대만이 '본토수복'을 외치던 1950년대 말, 금문도에는 10만 명이 넘는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여담을 하자면 80년대까지 대만군은 '본토수복'을 외쳤지만, 그때는 겉으로만 그렇게 말했을 뿐 실제로 본토수복이 가능하리라곤 아무도 믿지 않았다. 90년대 돼서야 대만군은 자기들이 어떤 수준인지 인정했다.

 

본토수복에서 대만방어로 역할이 전향되어가면서 병력을 감축하고 있는 대만군.jpg

본토수복에서 대만방어로 역할이 전향되어가면서

병력을 감축하고 있는 대만군

출처 - <유원 한겨레>

 

이 좁은 섬(백령도보다 약 3배 정도 크다)에 군인만 10만 명을 배치한 거다. 벙커를 3층으로 파 놓고 해안가에는 수천 개 지뢰를 깔아뒀다. 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요새화에 들어가게 된다.

 

 

천조국의 등장 

 

이 당시 금문도의 주민들은... 말 그대로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체제싸움 때문에 졸지에 이산가족이 돼야 했고, 양안 관계의 접전지가 되자 일상생활 자체가 '통제'됐다. 이들 주민은 섬 전체의 요새화 작업에 동원돼서 벙커를 파야 했다. 일상생활도 계속 통제됐다. 1949년부터 대만은 계엄령을 내렸는데, 1987년 7월이 돼서야 계엄령이 해제됐다. 그러나 금문도는 중국과의 최전선이라고 1992년까지 계엄령이 이어졌다. 이들은 늘 군사훈련에 끌려가야 했고(여차하면 전투에 투입돼야 했으니까), 군 건설작업에 동원됐으며, 생활도 통제됐다. 나중에는 국외의 가족들이 보내는 송금마저 끊어버려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노인들이 자살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구닝터우 전투를 대표하는 건축물.jpg

구닝터우 전투를 대표하는 건축물

출처 - <링크>

 

시대의 희생양이란 말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들은 체제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싸우든 말든 이들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영향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이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 거였다.

 

충칭에서 회담하는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jpg

충칭에서 회담하는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

출처 - <링크>

 

이렇게 금문도가 착실히 요새화되고 병력이 증원되자, 중국이 발끈하게 된다. 1954년 중국이 금문도에 포격을 날린다. 대만도 가만있지 않았고 반격한다. 연평도 포격전을 보면 알겠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그냥 쏘면 된다.

 

이 상황에서 힘을 쓴 건 미국이었다. 이대로 대만이 중국에 넘어가는 걸 원치 않았던 미국은 중국에 압력을 가한다.

 

"너희 계속 그러면 우리가 핵 떨어뜨린다?"

 

미국의 핵 협박에 중국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대만과 포격 중지를 합의하게 된다. 미국은 대만과 방어조약을 체결한다.

 

중국으로서는 모양새 빠지는 상황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핵 앞에서는 달리 다른 수가 없지 않은가? 첸쉐썬 박사가 양탄일성(两弹一星, 두 개의 폭탄과 하나의 인공위성. 중국 핵 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중국에서 일컫는 말)으로 원자폭탄·수소폭탄·인공위성을 날린 후에야 중국은 미국에 고개를 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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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에서 3년만에 수학과 항공공학 박사학위를 딴

천재 과학자 첸쉐썬의 말년 모습 

출처 - <아주뉴스>

 

이 당시 중국의 핵 개발은 미국의 핑퐁외교로 이어진다. 중국에 핵이 있기에 미국이 중국과 외교를 한 것이다. 대만 역시 핵의 위력을 잘 알았기에 신주 프로젝트로 핵을 몰래 개발하려 했지만... 핵무기 연구센터 부소장이었던 이가 이를 폭로하는 통에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된다.

 

미국의 핵 협박 때문에 금문도에 대한 포격을 중단했지만 중국은 금문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기회를 찾던 중국. 그들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