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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8일, 한국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는 한경닷컴에는 “석·박사 모시려면 판교도 멀다.”··· 대기업 R&D 줄줄이 ‘수도권행’이란 신문 기사가 나왔습니다. 기사 내용은 지방의 대기업 연구소가 인재 확보를 위해 수도권으로 옮겨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기사가 나오면 대부분 사람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할 거 같긴 합니다. 연구소란 곳은 우수인력이 모여야 기술개발도 하고, 제품 개발도 할 터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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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다른 한 편 실제 연구소에서 근무해본 입장에서 이 기사가 재벌의 이해(利害)를 대변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울러 연구소란 곳이 정말 우수인력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대한민국의 서울 집중 현상은 심각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국토 균형발전 계획이 시행되면서 주요 공공기관이나 공사들이 지방으로 이전했음에도 여전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많은 기업들이 집중해있고 기업들은 계속 서울 근처의 수도권에 기업 시설들을 설립합니다. 저 기사에 보면 판교도 멀다고 합니다. 도대체 뭘 하길래 멀다고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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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제석 광고연구소>

 

한국의 대기업들과 그 협력사들은 제품을 판매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만으로 돈을 벌지 않았습니다. 대기업 협력사 혹은 한국 제조업들의 평균 순이익률이 매출액 대비 5% 내외라는 것을 보면 정말 사업성이 없다는 걸 알 수가 있죠. 그런데도, 협력사들이나 대기업들이 사업을 영위하는 것은 실제 제품을 판매해서 얻는 수익과 함께 막대한 부동산 수익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위 기사가 나온 시점이 윤석열 씨가 당선되고 나서 친기업적인 행보를 보일 거라 예상되던 때입니다. 시점에 맞춰 기업들의 부동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나온 기사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더구나 그 기사를 작성한 신문사가 다른 곳도 아니고 한국경제기 때문이지요. 이번 글에서는 연구소 연구직이 석·박사급의 사람이란 조건을 붙여야만 할 정도의 자리인지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연구소가 수도권에 들어서야 하는 주요 명분도 사라지겠지요.

 

쪼개고 쪼개져 파편화된 연구 구조

 

개발 프로세스란 것은 특정 제품 개발을 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구분하여 제품개발의 완성도를 높이고, 비용을 줄이기 위한 일종의 연구소 내 내부 규정입니다. 이 개발 프로세스는 크게 상품기획·디자인과 개발·신뢰성 검토·양산성 검토와 같은 큰 단계가 있습니다.

 

디자인을 예로 세부 단계를 설명하면 콘셉트(concept) 도출·외부 디자인·내부 디자인·결합성 검토·샘플(sample) 제작·금형 제작 등의 단계들이 있고 이 단계 밑에 더 작은 단계의 테스크(Task)들이 있습니다. 이 테스크 밑에는 보고서 및 데이터가 수반되는 액티비티(Activity)들이 있습니다. 아무튼 쪼개고 쪼개고 쪼개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개발 프로세스에는 단계별로 최소 0.5일~5일 정도의 액티비티들이 수백 개 모여 있습니다. 각 액티비티는 팀장 같은 이들이 관리하지요. 특정 테스크가 며칠 내로 완료되어야 하고, 총 몇 개의 활동이 있는데, 어느 정도 진척이 되어 있다는 식의 관리지표를 가지고 팀별 성과를 측정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액티비티들은 지극히 사소하고 단순한 작업의 반복인 일이 많습니다. 그런 단순 반복 작업을 액티비티로 규정하는 것이 회사입장에서 좋기도 하지요. 연구원의 자유도가 줄어들고 제품의 완성도와 품질을 일정하게(품질을 좋게가 아니고 ‘일정하게’가 중요합니다.) 유지할 수 있을 터이니까요. 또 그래야 그 자리에서 일하던 사람이 그만두어도 쉽게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개발 진행 중인 제품이 기존 제품의 변형 또는 설계 변경일 때에는 이전에 수행한 액티비티들을 그대로 수행하면 되는 때도 많습니다. 대부분의 제조업에서는 플래그십(flagship, 한 기업이 내세우는 주력 상품이나 대표 상품) 제품 1개를 만들고, 그에 따른 변형 제품을 추가로 개발하지요. 가령 최근 애플은 폼 팩터(Form Factor, 컴퓨터 케이스 따위의 하드웨어 크기, 구성, 물리적 배열)를 고정하고 제품마다 개별 프로세스를 거치도록 제품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중복 부품들은 당연히 새로운 개발 혹은 신뢰성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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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갓잇코리아>

 

막상 하루하루 하는 일은 단순 반복 업무이지요. 제조업 연구소에 입사했다가 자신이 생각했던 연구소 모습과는 달라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필자는 연구소 내에서 신입사원의 입사와 퇴직자에 대한 1차 필터링(filtering) 당사자로 퇴직자 면담을 진행했었습니다. 많은 퇴직자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연구소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퇴사한다고 말하더군요. 생산라인과 같이 제품의 부품을 하나하나 조립만 하지 않을 뿐이지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라인으로 인식하는 곳에서 과연 석·박사급 인력이나 유니콘에 입사할만한 우수인력이 필요할까요?

 

고학력이 필요하지 않은 업무 특성

 

연구소의 업무는 회사 내 다른 부서의 업무와 많이 다르긴 합니다. 아무래도 기술 쪽의 일이다 보니, 해당 직무(ex. 소프트웨어 개발·하드웨어 개발·금형·디자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래야 관련된 업무를 할 터이니 말이지요. 그러나 그 업무 수준이 4년제 대졸자만이 해야 한다거나 석·박사급이 해야 하는 업무 수준은 아닙니다. 오히려 해당 분야의 고졸자·2년제 대졸자가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업무입니다.

 

대부분의 하드웨어 개발 업무들은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워낙 발달해서 더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신기술이나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기술들은 공부도 해야 하지만, 일정 수준까지만 하면 실무적으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 역시도 4년제, 혹은 석·박사 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업무도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들은 석·박사 인력보다는 개인의 개발 역량이 훨씬 더 중요한 평가를 받습니다.

 

정리하자면 연구소 내 업무들은 일정 수준의 학력을 이수한 사람들이 전문업무에 따른 학습의 과정을 통해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업무 구조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학력 인플레는 잘 아실 터입니다. 연구소 또한 연구원들의 오버 스펙(Over Spec.)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정부 기관은 연구소를 평가하는 잣대로 석·박사 인력수를 평가지표로 놓기도 합니다. 석·박사급 인력이 들어와 실제 하는 일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일을 함에도 말이지요.

 

연구소에는 두 종료가 있습니다. 흔히 상용화된 기술들은 선행기술(prior technology)과 (현행)적용 기술로 구분합니다. 선행 기술은 향후 3년 이내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거나 (현행)적용 기술에서 생긴 문제를 향후 몇 년 내에 해결하기 위한 기술 영역입니다. 이 선행 기술 영역에서는 원천기술에 대한 학습도 포함하기 때문에 관련 학위는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반적인 선행기술 연구소는 석·박사급 고급 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소에서는 다 퉁쳐서 석·박사 인력을 채용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일부 연구소를 제외하면 석·박사급 인재가 필요하지 않은데 이런 고학력 인재들을 채용하는데 지방은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연구소가 자리할 부동산의 가치 상승에 따른 부동산 이익 때문이라는 게 필자의 추정입니다.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참 높은 수익 창출 수단이자 명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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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위 기사에서 인재를 목적으로 수도권에 연구소를 건립한다는 이야기가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이자 헛소리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지방으로 가면 우수인력(석·박사)들을 못 구하는 게 아니라, 연구소 자리의 부동산 가치가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상 역량에 맞는 일을 시키지도 않으면서 말이지요.

 

꼰대들의 연구소

 

퇴사 후 몇 년 뒤, 함께 근무하던 후배와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기억나는 말이 바로 “꼰대들의 연구소”였습니다. 여타 부서에도 꼰대가 많지만, 유독 연구소에만 꼰대들이 많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연구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전형적인 남성적 마초 문화에서 성장했기 때문이지요. 남중·남고·공대의 테크트리(Tech Tree)를 타고 입사한 사람들도 적지 않으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십몇 년 전까지 공대에 여성이 들어오는 경우가 적었으니 당연한 현상입니다.

 

1년에 몇 번씩 새로 출시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발표하는 애플의 이벤트를 보고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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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프로덕트(product) 매니저 Colleen Novielli

 

올 3월에 애플에서 야심 차게 개발하여 출시한 M1 Mini·M1 Ultra 제품 시연 장면입니다. 이 장면 이외에도 한 7~8년 전부터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나오는듯합니다. 이분은 Colleen Nivielli라는 프로덕트 매니저입니다. 저 날의 하이라이트는 지금 사진에서 보시는 바로 새로 나온 Mac Mini와 Mac Studio였습니다. 제품의 사양(spec.)이 워낙 경쟁사 대비 압도적이라 인크레더블(Incredible,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이란 단어가 여러 번 들리더군요. 이 제품을 개발하는데 전체적인 관리(Managing)를 담당하는 사람이니까 저렇게 나와서 발표를 할 터입니다.

 

경험을 한번 되돌려, 한국에서 제품 발표하는데 여성이 나와서 저렇게 발표하는 걸 보신 적이 있는지요? 더러 있겠지요. 필자의 현장 경험에서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여성 인력이 그나마 역량을 발휘하는 마케팅 필드에서 저런 세미나·이벤트를 할 때도 대부분 남성이 나와서 발표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연구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의 장점을 도외시한 채 연구소의 남성주의적 문화에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인 연구소에 있습니다. 여성이 그만큼 설 자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소프트웨어 연구소는 그나마 많은 여성이 있지만, 하드웨어 쪽으로 가면 디자인 영역 외에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여성인력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꼰대가 자생할 수 있을 만큼 경직된 연구소 문화가 있습니다. 여성이 없으니 더 편하다는 남성주의적 문화가 팽배하는 한 한국의 연구소는 경직된 문화일 수밖에 없으리라 여깁니다. 노동시장에는 많은 여성인력이 있음에도 연구소에서는 채용을 꺼립니다. 어쩌면 한국의 제조업 연구소가 이만큼 성장하는 데에는 꼰대식 문화가 한몫했을지 모르지만 이 성장률에도 슬슬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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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애플과 같이 시장의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천기술에 대한 관심과 실행이 매우 필요합니다. 최근 몇 년간 연구·개발 업계에서는 만능 물질로 불리던 그래핀이나 CNT(Carbon nanotube, 탄소 나노튜브)와 같은 소재를 연구하거나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한다거나 하는 원천기술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런 소재를 연구하고 상용화하는 데에는 기존 개발 프로세스와는 다른 프로세스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연구소 문화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전체 연구 프로세스와 프로세스 내 액티비티 내용을 이야기하며 고학력자가 필요하지 않은 연구소의 현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현 연구소 문화의 경직성까지 이야기하였습니다. 연구소 문화로 마무리하는 이유는 연구소의 수도권 이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연구소 문화의 변화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본질은 위치가 아니라 문화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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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그림왕 양치기 그림 中 꼰대 그림>

 

최근 몇 년 사이에 대기업의 연구소들은 선행기술 연구소 혹은 첨단 기술 연구소와 같은 선행기술만을 연구하기 위한 별도의 연구소를 조직하여 연구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행기술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별도의 프로세스가 만들어져도 그에 맞는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성과는 매우 제한적일 것입니다. 이는 연구소는 연구소대로 연구원은 연구원대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겠지요.

 

다음 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기존 연구소의 문화, 한국의 사회·문화적 선진화에 걸맞은 연구소의 문화에 관하여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앞서 기고한 4편에서 ‘리틀 보이(Little Boy)’를 투하한 미군이 괴로워했다는 이야기에 여러 분들이 사실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맥락에 부합하는 사례를 글에 실던 중에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기고할 때 주의하겠습니다. 

 

 

스타워즈 덕후, 농구 덕후, 애플 덕후.. 라고 생각만하고, 실제로는 잘 모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