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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개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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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민음사>

 

 

아메리칸 드림의 화려한 시작

 

노인들이 책상 위에서 결정한 전쟁에 천만 명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철조망과 기관총, 그리고 참호전과 무모한 돌격으로 요약되는 제 1차 세계대전은 자국의 젊은이들을 더 많이 죽이는 쪽이 승리하는 전쟁이었다. 베르됭 단일 전투에서만 4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승전국 프랑스는 최종 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 한 세대가 사라져 버렸다.

 

이 끔찍한 전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나라는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이었다. 미국은 전쟁 전 유럽에 37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에서 전쟁 후에는 126억 달러의 채권국이 되었다. 유럽에 군수품을 수출하기 위해 공장들의 기계는 멈출 줄 몰랐고, 미국 자본은 유럽에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종전 후, 1922년부터 1929년까지 주식의 수익 증가율은 무려 108퍼센트에 달했으며 기업의 이익은 76퍼센트 증가하였다. 전쟁의 최종 승자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었다. 미국 자본과 월스트리트였다.

 

1920년대, 부와 출세라는 야망을 품은 젊은이들은 동부로 동부로, 레밍스 떼처럼 대이동을 시작했다. 동부에서도 주식과 채권의 거리인 뉴욕 월스트리트는 그들이 야망을 불태울 최적의 용광로였다. 학벌이나 가문의 후광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불법마저도 감수할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금주령이라는 희대의 악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주를 만들어 판매하는 일은 위험하지만 최고의 수익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뉴욕은 돈과 재즈가 흘러넘치는 도시였고, 하루도 빠짐없이 환락의 파티가 열리는 곳이었다. 바야흐로 치명적인 향기와 그보다 더 위험한 가시를 가진 아메리칸 드림이 화려한 막을 올린 것이다.

 

나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중서부 지방은 이제 세계의 활기찬 중심지가 아니라 우주의 초라한 변두리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동부로 가서 채권 사업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중서부의 꽤나 괜찮은 가문의 일원이자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닉 캐러웨이’도 동부의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 근교의 길쭉한 섬, 롱아일랜드의 웨스트에그에 있는 월세 80달러짜리 방갈로가 닉의 새로운 안식처가 되었다. 방갈로 벽에는 닉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켜 줄 책들이 꽂혔다.

 

나는 은행 경영, 신용 대출, 채권 투자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샀다. 조폐국에서 갓 찍어 낸 화폐처럼 황금빛과 붉은빛을 번쩍이며 내 서가에 꽂혀 있는 그 책들은 오직 미다스 왕과 J.P 모건과 마이케나스만이 알고 있는 눈부신 비밀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는 듯했다.

 

좁은 만을 사이에 두고 웨스트에그와 마주보고 있는 이스트에그는 전형적인 상류층 거주지였다. 해변을 따라 궁궐처럼 번쩍이는 하얀 저택들이 있었고 그곳에는 백만장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 저택들 중 하나에는 닉의 먼 친척인 데이지와 그녀의 남편이자 닉과는 예일대학교 동창이며 역시 백만장자인 톰 뷰캐넌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닉의 방갈로 오른편에는 이스트에그의 저택들조차 고개를 숙일 엄청난 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저택의 주인은 백만장자를 넘어 억만장자라고 알려진 개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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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아일랜드 지도 (민음사 판 ‘위대한 개츠비’ 중 삽화)

 

 

아름다운 데이지와 백만장자 톰 뷰캐넌, 그리고 개츠비

 

캔터키주 루이빌 명문가의 딸인 데이지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루이빌의 젊은 아가씨 중 가장 인기가 있었다. 흰옷을 입고 흰 로드스터를 몰고 다니는 그녀와 단 한 시간만이라도 만남을 가지기 위해 캠프 테일러에서 온 젊은 장교들은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녀의 집 전화벨은 하루 종일 울려댔다. 데이지가 사랑에 빠졌다. 한 젊은 장교와 로맨틱한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명문가인 그녀의 집안이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 데이지의 연인은 제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위해 떠나야 했고 데이지는 집안의 반대로 뉴욕항을 떠나는 연인을 배웅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세계대전은 끝났고 사교계에 데뷔한 데이지는 백만장자인 톰 뷰케넌과 결혼했다. 톰은 그녀에게 35만 달러짜리 진주 목걸이를 선물했다. 결혼식 전날 데이지는 연인의 편지를 받았고 술에 취해 울었다. 그리고 외쳤다.

 

“자, 여기 있어.” 그녀는 침대 위에 올려놓은 휴지통을 뒤지더니 진주 목걸이를 꺼냈어요. “이걸 갖고 내려가서 임자가 누구든 그 사람한테 돌려줘. 가서 데이지의 마으음이 변했다고 전해 주고. ‘데이지의 마으음이 변했다.’라고 말이야!”

 

명문가의 여자답게 데이지는 이것을 해프닝으로 끝냈다. 다음날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톰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남태평양으로 무려 석 달짜리 신혼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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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와 톰 뷰캐넌 (영화 '위대한 개츠비' )

 

톰 뷰캐넌은 당시 미국 상류층이 가져야 할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남자였다. 그 조건은 우선 돈과 스포츠였다. 원래 부유한 집안의 자식인지라 돈은 차고 넘쳤다. 이미 대학생 시절부터 그는 돈을 물 쓰듯 했다. 닉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집안은 돈이 많았다.

 

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부유층의 특권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노동을 해야 했기에 그들이 운동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부자들은 달랐다. 먹고 살기 위해 몸을 쓰지 않는 그들은 건강 유지를 위해 스포츠를 즐겼다. 더구나 부자는 인종적으로도 우월해야 했으며 아름다운 여성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도 운동을 통해 몸을 가꾸는 것은 필수였다. 톰은 대학 시절 미식축구 선수였으며 졸업 후에는 폴로를 즐겼다.

 

승마복의 여성적인 우아함조차도 그의 몸집이 지닌 엄청난 힘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신은 번쩍이는 부츠가 맨 위쪽 끈이 팽팽할 정도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어깨가 움직일 때는 얇은 상의 아래로 우람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지렛대의 힘을 가진 육체, 한마디로 무자비한 육체였다.

 

세 번째 조건은 정부(情夫)를 두는 것이었다. 돈이 주는 자유를 누리기에는 쾌락만 한 것이 없다. 쾌락 중에서도 으뜸은 아내 몰래 정부를 두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여성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야말로 부자의 조건이자 우월한 남성의 증명이었다.

 

웨스트에그와 뉴욕시의 중간쯤에는 차도와 철로가 만나 400m 정도 나란히 달리는 곳이 있다. 뉴욕시의 쓰레기 매립장이 있는 ‘쓰레기 계곡’이다. 그곳에는 부자들의 자동차를 고쳐 주며 먹고 사는 정비사 ‘조지 윌슨’의 정비소가 있었다. 윌슨에게는 그의 재산에는 과분하게 육감적인 아내 ‘머틀’이 있었고 그녀가 바로 톰의 정부였다. 머틀에게 톰은 가난한 남편이 해 줄 수 없는 모든 것, ‘아파트와 강아지’ 같은 것들을 해 줄 수 있는 남자였다. 톰을 만나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류층 흉내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눈에 띄었던 강렬한 생명력은 상당한 거만함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웃음이며, 그녀의 몸짓이며, 그녀의 말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가식적으로 변했고, 그녀가 그렇게 부풀어 오를수록 방은 점점 더 비좁아지는 것만 같았다.

 

닉의 이웃이자 대저택의 주인인 개츠비는 톰을 능가하는 부자였다. 그의 저택에서는 주말마다 화려함의 끝을 달리는 파티가 열렸다. 값비싼 샴페인이 최신 재즈 음악과 함께 흘러넘쳤다. 그 파티에는 유명 연예인들부터 예술가들, 그리고 사업가와 정치가들까지, 뉴욕의 유명 인사들로 드글드글했다. 마치 그의 파티에 참가하지 못하면 유명 인사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개츠비는 부자 가문의 상속자이며 옥스퍼드를 졸업했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았다는 것 정도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닉이 은빛 후춧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있을 때 우연히 어둠 속 개츠비의 그림자를 본 적이 있었다. 대저택 속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 있는 개츠비는 만 건너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츠비가 바라보는 곳에는 데이지의 집 앞 부두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녹색 불빛이 작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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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가 바라보던 만 건너편 데이지 집 쪽의 녹색 불빛

(영화 '위대한 개츠비' )

 

닉은 유명 인사는커녕 채권회사의 봉급장이에 불과했지만 개츠비의 이웃이란 이유로 파티에 초대받았다. 개츠비의 롤스로이스가 마치 버스처럼 손님들을 실어 날랐다. 개츠비의 저택은 160제곱미터가 넘는 잔디밭과 정원이 있었고 대리석으로 만든 풀장과 멋진 해변이 있었다. 이 전체가 파티장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했고 온갖 명품으로 치장한 선남선녀들이 샴페인과 칵테일을 마시며 웃고 떠들어댔다. 뉴욕에서 온 자동차들은 저택 안 도로 깊숙이까지 다섯 겹으로 주차되어 있었다. 닉에게 개츠비가 다가왔다. 닉이 그림자 실루엣이 아닌 실제 개츠비를 처음 만난 것이었다. 개츠비는 닉이 생각했던 버릇없는 젊은 억만장자와는 많이 달랐다.

 

그는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미소였다.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확신을 내비치는, 평생 가도 네댓 번밖에는 만날 수 없는 보기 드문 미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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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이 모든 것이 개츠비의 계획이었다. 데이지의 저택 건너편에 대저택을 구한 것도, 주말마다 성대한 파티를 연 것도. 그리고 닉에게 접근해 호의를 베푼 것도. 데이지의 첫 연인인 젊은 장교가 바로 개츠비였다. 개츠비에게도 데이지는 인생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데이지가 결혼한 다음부터 개츠비에게 데이지와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아니 인생 그 자체가 되었다.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자신이 돌아온 것을 알리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데이지와의 자연스러운 재회를 위해 데이지의 친척인 닉에게 접근해 호의를 베푼 것이다.

 

닉에게 개츠비의 계획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닉은 개츠비의 매력에 빠졌으며 이미 둘 사이에는 우정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닉은 자신의 방갈로에 데이지를 초청했다. 물론 그때 이웃인 개츠비가 우연히 들르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닉의 초청으로 데이지가 방갈로를 방문한 날, 비가 내렸다. 그녀가 활기 넘치는 목소리로 “오빠, 정말로 여기 사는 거예요?”하고 물을 때 가벼우면서도 위엄 있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데이지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닉이 현관문을 열자 개츠비가 서 있었다.

 

개츠비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아령이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윗도리 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찌른 채 슬픈 표정으로 내 눈을 응시하며 물웅덩이 속에 서 있었다.

 

데이지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고, 내가 들어가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거울 앞에 가서 손수건으로 눈물 자국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츠비에게는 그야말로 놀랍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글자 그대로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희열을 드러내는 말이나 몸짓은 없었지만 새로운 행복의 광휘가 그로부터 뿜어 나와 작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데이지는 개츠비에게 인생의 전부였다. 개츠비의 순정은 둘을 오 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개츠비는 데이지와 함께 자신의 저택에서 롱아일랜드 해협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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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대한 개츠비' 

 

“안개만 끼지 않았더라면 만 건너에 있는 당신 집이 보일 겁니다. 당신 집의 부두 끝에는 항상 밤새도록 초록빛 불이 켜져 있더군요.”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고,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귀에다 뭐라고 속삭이자 감정이 왈칵 솟구치는 듯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분홍빛 구름과 황금빛 파도처럼 피어오른 환상이 걷히자 남은 것은 아픈 진실이었다. 개츠비의 모든 경력은 꾸며진 것이었다. 개츠비는 부자 가문의 상속자가 아니라 가난이 싫어 17살에 가출한 용감한 소년 ‘제임스 개츠’였다. 그의 부모는 무능하고 별 볼 일 없는 지독히도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사실인즉, 롱아일랜드 웨스트에그의 제이 개츠비는 스스로 만들어 낸 이상적인 모습에서 솟아 나온 인물이었다.

 

개츠비는 데이지와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꾸며냈다. 데이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그로서는 명문가의 후예이자 부자가 되어야 했다. 그것만이 데이지의 사랑을 얻는 길이었다. 개츠비는 밀주업자였고 불법 채권업자였다. 개츠비는 목숨을 걸고 불법적인 일에 뛰어들어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새로운 신분을 창조하여 데이지 앞에 선 것이었다. 가히 ‘위대한 사랑’이었다.

 

데이지가 자신의 집으로 개츠비를 초대한 날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친 순간 그들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 서로를 응시했다. 그녀는 힘겹게 시선을 식탁 아래로 돌렸다.

 

“당신은 언제나 멋져 보여요.” 그녀가 되풀이해 말했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었고 톰 뷰캐넌은 바보가 아니었다. 톰은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고 너무도 더운 날이었기에 톰의 제안으로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외출하기로 했다. 플라자 호텔의 스위트룸에 이 드라마에 출연한 모든 사람들이 모였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주인공은 톰 뷰케넌이었다. 그는 이미 개츠비의 진실에 대해서 조사한 바가 있었다. 톰은 데이지와 닉 앞에서 침착하게 때로는 격하게 개츠비를 추궁했다. 개츠비의 진실이 하나하나 까발려졌다. 그러나 개츠비는 오직 하나만을 원하고 있었다.

 

“데이지, 이젠 모든 게 끝났소. 이제는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요. 저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그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비로소 데이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개츠비는 사력을 다해 데이지에게 변명과 함께 자신의 진심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마음은 움츠러들었고, 그녀는 방을 뛰쳐나가 개츠비의 노란색 롤스로이스에 올랐다. 개츠비는 옆자리(조수석)에 올라탔다. 롤스로이스는 출발했던 곳, 이스트에그를 향해 질주했다.

 

이 드라마의 중요한 조연 둘이 빠졌다. 윌슨과 머틀 부부이다. 그 시각에 그들은 더 격렬하게 다투고 있었다. 머틀의 외도를 눈치챈 윌슨은 배우지 못한 노동자의 방식으로 격하게 머틀을 추궁했고 견딜 수 없었던 머틀은 거리로 뛰쳐나갔다. 데이지가 몰던 롤스로이스가 쓰레기 계곡을 질주하고 있었다. 롤스로이스가 머틀을 들이받았다. 머틀은 무참하게 목숨이 끊긴 채 끈적끈적한 검붉은 피와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시체가 되었다.

 

 

사랑의 종말

 

닉은 잠을 잘 수 없었다. 해협에서는 안개 경보 소리가 신음을 내듯 끊임없이 들려왔고 기괴한 현실과 잔인하고 무서운 꿈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밤새 뒤척였다.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이 톰의 무자비한 악의 앞에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면서 그 길고 은밀했던 광상곡 연주가 모두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개츠비를 남겨 둔 채 부유한 자기 집 안으로, 그 부유하고 충만한 삶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닉은 개츠비에게 뉴욕을 떠나라고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데이지의 마음을 알기 전까지는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 개츠비는 아직도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붙들고 있었고 이미 데이지를 위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결심까지 한 상태였다. 그런 개츠비를 닉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1만 5,000킬로미터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지진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윌슨은 무참하게 죽은 아내 머틀로 인한 분노와 자책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리볼버 권총을 들고 개츠비의 집으로 향했다. 개츠비의 집은 톰이 가르쳐 주었다. 개츠비는 홀로 풀장에서 누군가의 전화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 어디서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총소리가 들렸다. 개츠비의 시체는 매트리스 위에서 풀장 위를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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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장 위를 떠다니는 개츠비의 시체

(영화 ‘위대한 개츠비’ )

 

우리가 개츠비의 시체를 들고 집으로 간 뒤에야 정원사가 조금 떨어진 잔디밭에서 윌슨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 어처구니 없는 학살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개츠비의 파티에 모였던 수백 명의 인사 중 그 누구도 개츠비의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오직 닉만이 홀로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닉은 마치 개츠비처럼 간절하게 데이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데이지 역시 오지 않았다. 전화 한 통도 없었다. 데이지는 이미 남편 톰과 함께 여행을 떠난 후였다. 가장 더러운 도시 뉴욕에서 가장 깨끗한 사랑을 실현하려 했던 개츠비의 꿈은 이렇게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물론 얼마 후 불어닥친 대공황의 광풍 앞에서 그 화려했던 아메리칸 드림도 종말을 고했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인생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날 기적처럼 사랑이 다가온다. ‘그녀’는 ‘그이’의 미소 하나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고 그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샴푸 냄새에 취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그 어떤 부자보다 행복하다. 둘은 분홍빛 구름 위에 올라타 마음껏 세상 위를 부유한다. 오죽하면 아인슈타인은 만유인력마저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을까.

 

그러나 사랑마저도 인간 존재의 특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사랑에도 온갖 사회적 잣대들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재산, 학벌, 외모, 전망 등등이 그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 만물은 변화한다. 오늘의 태양은 어제와 태양과 다른 것이다. 굳이 변증법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우주의 물리 법칙이다. 시간이 흐르며 어느덧 맑고 아름다웠던 사랑은 점점 퇴색하게 되고 그녀와 그이는 적당히 새로운 사랑, 또는 사랑과 비슷한 만남과 타협하게 된다. 불순한 시대일수록 순수한 사랑이 퇴색하는 속도는 더욱 빨라지며 그것을 거부할 시에는 가혹한 처벌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개츠비가 떠난 후 데이지는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간직한 데이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 갑자기 그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전에는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끝없는 매력, 그 딸랑거리는 소리, 그 심벌즈 같은 노랫소리......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이, 그 황금의 아가씨가......

 

개츠비는 데이지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개츠비가 깨닫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 오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우주의 질서를 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온 사회를 지배하는 불순한 시대였다. 시대가 불순한 만큼 개츠비의 지극히도 순수한 사랑은 더욱 빛이 났다. 그러나 시대와 사랑의 간극이 넓은 만큼 그 결말을 비참하고 잔인했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개츠비가 간직한 과거의 사랑은 이미 퇴색한 지 오래였고 그것을 오늘의 현실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생이란 과거의 추억으로 쌓는 계단을 오르다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계단을 거꾸로 오를 수는 없다. 개츠비는 데이지와 함께했던 시간을 과거의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자신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았어야 했다. 개츠비의 사랑과 아메리칸 드림이 함께 종말을 맞이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허구이듯 개츠비의 추억 속 사랑도 현재 시점에서는 허구였으니까.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 김기림 ‘길’  -

 

마냥 기다린다면 이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는 돌아올 것인가? 만약 내기를 해야 한다면 돌아오지 않는 쪽에 거는 것이 돈을 벌 확률을 높여줄 것이다. 한없이 예쁜 사랑의 경험이 있는가. 있다면 가슴 속 깊은 곳에 감추어 둘 일이다. 그리고 ‘오늘’과 ‘나’에 충실하면 될 일이다. 그 예쁜 사랑은 문득 떠오를 때, 가끔 한번 꺼내 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인생탐구를 통해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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