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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퐈 추천18 비추천0

딴지보다 거상

 

지난 수개월 동안 딴지 편집부로부터 집요한 원고 독촉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글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거상이라는 게임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 편집부가 아니다. 겜하느라 글 쓸 시간이 없다고 나몰라라 하던 중, 급기야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에게 전화가 왔다. 

 

죽돌 : (다짜고짜)직업 의식은 어따 팔아 묵었습니까. 왜 글을 안 쓰는 겁니까.     

 

씻퐈 : ...?! 저 회계산데요? 

 

죽돌 : 회계사가 뭡니까. 게임할 회! 글 쓸 계! 직업 사! 게임하면서 글쓰는 직업 아입니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작은 소리)윌아. 내 말이 맞나 아이가.

 

(옆에서 뜬금 소환된 딴지 기자)윌 : 맞아요.   

 

씻퐈: (미친놈들인가....) 

 

당최 자기들끼리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여튼 이런 로직으로 오늘은 MMORPG에 대한 글을 써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나는 회계사이기 때문이다(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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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때문에 천하제일의 꿈이 늦춰졌다... 

출처-<링크>

 

RPG란 무엇인가 

 

게임 장르 중에는 RPG(Role Playing Game)라는 게 있다. RPG는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재미를 찾는 게임이다. 아재들이 어렸을 때 즐겼던 술래잡기·경찰과 도둑·오징어게임(?)과 같은 놀이들도 큰 의미에서는 롤플레잉 게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맥락 없이 덜컥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깊이 몰입하기는 어렵다. 경찰과 도둑을 하다가 도둑에 감정 이입해서 실제 경찰을 피해 다니는 초등학생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게임회사들은 RPG를 비디오게임(다시 말해 상품)으로 만들면서 판타지 세계관을 끌어 들여왔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과 몬스터가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도적·전사·마법사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모험을 즐긴다. 근본 있는 RPG들은 대부분 플레이어들이 역할 수행에 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플레이어에게 높은 자유도를 부여한다. 게임사가 정해준 루트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직접 루트를 만들어가는 모험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기존의 문학작품이 작품을 읽고 각자 상상을 하는 식의 수동적인 경험이라면 RPG는 직접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 그 세계를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내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고 상상만 하는 게 아니라 반지의 제왕 게임 속에서는 직접 간달프가 되어 주어진 미션을 깨는 식이다.

 

여기에 게임회사들은 RPG 속에 레벨업·아이템 강화와 같은 성장 요소를 집어넣었다. 한판 즐기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내 캐릭터를 강화하는 재미를 느끼도록 한 것이다. 잘 만든 RPG는 세계관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모험을 느낄 수도 있고 지속적인 성장이 이뤄진다. 그래서 위쳐3·엘든링 같은 명작 RPG에는 유독 N회차 플레이하는 고인물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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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게임 개발사 CD 프로젝트 RED의

액션 RPG <더 위쳐 3: 와일드 헌트>

출처-<링크>

 

RPG에서 MMORPG로

 

여기까지가 RPG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다.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는 대규모 다중접속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의 줄임말이다. 기존 RPG에 대규모 다중접속자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기존 오락실 혹은 CD 게임 시절, RPG 속 세상은 원래 플레이어 혼자서 즐기던 것이었다. 그런데 MMORPG로 넘어오면서부터는 동시에 여러 플레이어가 같은 공간에 접속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단순히 함께 플레잉하는 유저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MMORPG는 RPG와는 전혀 다른 게임이 되어버렸다. 게임의 목적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존 RPG들에는 정해진 엔딩이 존재했다. 집 나간 공주를 구출한다든가 마왕의 목을 따고 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게임은 끝난다. 하지만 MMORPG에는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속해서 콘텐츠가 업데이트되기 때문이다. 패치가 있을 때마다 더 쎈 몹(몬스터)이 등장하고, 쎈 몹들은 기존 몹보다 더 좋은 아이템을 떨군다. 드래곤볼처럼 몬스터와 플레이어의 스펙이 올라가는 현상이 반복된다. 게임이 운영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리 정교한 설정을 갖고 시작한 드라마·소설이라도 연재가 지나치게 길어지면 설정이 꼬이기 마련이다. 출시된 지가 20년이 훌쩍 넘은 1세대 MMORPG(바람의나라·리니지· 거상 등)들의 세계관들은 안드로메다로 떠난 지 오래다. 듣도 보도 못한 악당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건 예삿일이다. 기존 세계관에서 최강이던 보스들은 평타 한방이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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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그런데도 아직 많은 MMORPG들은 서비스되고 있다. 매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MMORPG는 단순히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계속 성장하고 있다. MMORPG에 어떤 점이 수십 년째 유저들을 그 세계 속에 붙잡아두고 지갑을 열게 하는 걸까?

 

다른 유저들의 존재 때문이다. MMORPG 세계는 나 혼자만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유저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여러 인간이 모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위계질서와 커뮤니티가 생겨난다. 상위랭커들은 남들보다 우위에 서려고 오늘도 '빡겜'을 한다. 일반 유저들은 게임 내에서 만난 인연(파티원·길드원) 때문에 계속해서 게임에 접속한다.

 

손수 키워 경쟁하는 잼

 

유저 사이 경쟁은 MMORPG의 핵심적인 재미 요소다. 단순히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재밌어서 혹은 캐릭터가 강해지는 게 재밌어서, 고인물들이 수십 년째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아니다(단순 노가다 위주 RPG는 원래 금방 질린다). 이를 통해 게임상 내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들보다 강해지기 때문에 재밌는 거다. 여기서 핵심은 ‘격차’이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일수록 내 캐릭터는 남들보다 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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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출처-<링크>

 

이러한 격차를 내며 고인물 캐릭터는 게임 내에서 전능한 힘을 얻게 된다. 이 힘을 가지고서 플레이어는 적군을 썰고 다니는 야차가 될 수도, 아니면 나보다 약한 길드원들을 도와주는 천사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전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상위 랭커들은 일반 유저들로부터 선망과 질투를 동시에 받는다.

 

“노력한 만큼 강해지고,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

 

얼핏 들으면 당연한 말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이런 일은 잘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체능 분야에서, 재능 없이 노력만으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공평해 보이는 공부도 사실은 재능이 많은 영역을 차지한다.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은 많고 성실함이 재능인 인간도 많다. 애초에 대부분의 입시나 시험은 상대평가다. 구조적으로 공부를 잘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학생은 어차피 한 줌에 불과하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일반인에게 현실은 좌절의 연속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더 좋은 학벌·직장·소득·집)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감이 존재한다. 현실에서 스스로 슈퍼 갑이 되어 무언가를 성취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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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YTN>

 

그런데 MMORPG 속 세계에서는 이런 성취의 경험을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느낄 수 있다. 경쟁 상대가 같은 서버 내에서 같은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임 내 경험치와 재화가 계속 늘어나는 RPG의 특성상 이러한 격차는 계속해서 누적된다. 남들보다 좀 더 먼저 시작해서 더 오래 플레이하면 높은 확률로 게임 내에서는 남들보다 우월해질 수 있다. MMORPG 속 세상에서는 현실에서 느끼기 힘든 성취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 기쁨이 비록 대체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MMORPG에서는 남들보다 강해지는 것이 수치상으로 계측된다.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에서는 원하는 성적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가 불명확하다. 시험 당일에 컨디션과 내가 아는 내용이 얼마나 시험에 출제되느냐에 따라서 성적이 바뀌기 때문이다. 재수 없으면 더 열심히 공부하고도 시험성적은 오히려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런데 MMORPG에서는 레벨이나 전투력이 수치상으로 표기된다. 몬스터를 잡거나 레이드(규모가 크고 난이도도 높은 특별한 보스/던전을 공략하는 것)를 돌 때마다 내 캐릭터가 성장하는 것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다. 노력에 대한 보상 (경험치·아이템)이 바로바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초창기 MMORPG 갬성

 

초창기 MMORPG 리니지·바람의나라 등에서 가장 중요한 성장 요소는 ‘시간’이었다. 초기 RPG 콘텐츠 대부분은 반복 노가다 위주였다. 몬스터를 많이 잡을수록, 플레이어는 더 많은 경험치·재화·아이템을 얻는다. 이 시절 게임개발사들은 게임에 접속하여 플레이할 수 있는 권리, 즉, 월정액을 주 수익모델로 삼았다. 이는 나 같은 올드 게이머들이 그리워하는 좋은 시절이었다. 누구나 월정액을 결제하기만 하면 같은 조건에서 게임을 할 수 있었으니까.

 

2000년대 초 게임회사 개발사들은 정말 순수했던 것 같다. 독창적인 세계관·게임성을 가지고 유저 유치 경쟁을 했었으니까. 이 시절 바람의나라·리니지 같은 대형 MMORPG들이 소설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근본 있는 게임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정도로 탄탄한 세계관 설정, 그리고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일반적인 문화 콘텐츠의 소모 주기가 매우 짧은 것과 달리, 게임업계에서 가치 있는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는 대부분 2000년대 초중반 벤처창업 붐 시대 때 개발되었던 게임들이다. 이러한 흐름이 계속되었다면, 정말로 우리나라가 실리콘 싸다구 날리는 IP강국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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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 초창기 삼삼오오 모여서 버그베어를 잡는 법사촌 모습

출처-<링크>

 

그러나 이런 벤처 창업 붐의 이면에는 처절한 실패들도 있었다. 아직 살아남은 리니지·바람의나라·라그나로크 같은 장수게임은 한 줌에 불과하다. 그 외에 수많은 게임들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해 소리 없이 서비스 종료되었다. 이 시절은 게이머에겐 참 좋았지만, 투자자에게는 매우 괴로웠던 시절이었던 셈이다.

 

이때, 자타 공인 레전드, 와우(World of Warcraft, 월드 오브 워크레프트)라는 게임이 등장한다.

 

<계속>

 

※ 참고로 해당 글은 “중년게이머 김실장” 유튜브 채널에서 김실장 님의 강의를 일부분 참조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일반 유저로써 막연히 느꼈던 것들을 김실장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좀 더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게임을 좋아하거나 게임 분석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구독해보시길 강력하게 권합니다. 

 

 

추신

 

딴지스 여러분 덕에,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딴지 연재물을 확장하여, 이때다 싶어 열쒸미 공부, 정리하여 낸 책입니다. 아마, 현직 회계사 중, 저만큼 회계공부를 싫어했던 회계사는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저만큼도 공부를 안 했다면 못 붙으셨을 테니까요). 회계 공부를 싫어했던 제가 스스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계실 독자분들 상정해 쓴 책이다 보니 재밌습니다(아마도...). 그동안 회계 공부가 하기 싫었다거나, 회계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분들(사실상 전원)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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