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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를 탄 중국

 

1958년 7월 이라크 왕국에서 혁명이 발생했다. 레바논 위기를 지켜본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가 이라크(당시 이라크는 요르단과 연합해서 아랍 연방을 설립했다)에 병력 파병을 요청했다. 이라크의 파이살 2세는,

 

“그래, 병력 보내줄게.”

 

하고는 병력을 보냈는데, 이때 요르단으로 갔어야 할 병력이 방향을 바꿔 바그다드로 향한다. 쿠데타였다. 파병 병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 황당한(!?) 사건은 곧 혁명으로 발전한다.

 

아브드 알카림 카심이 이끄는 쿠데타 병력은 바그다드에 진입한 후 파이살 2세를 비롯한 왕족들을 깡그리 총살하고는 공화국을 선포해 버린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중동 지역에 이권을 가졌던 미국과 영국의 눈이 돌아갔다. 이들은 불길이 요르단까지 퍼지는 걸 막기 위해 급하게 병력을 보낸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중국이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지금이 기회다!”

 

미국이 중동에 시선을 빼앗긴 이때 중국은 금문도를 탈환하겠다는 의지에 불타올랐다. 금문포전 혹은 823포전이라 불리는 ‘금문도 포격전’이 시작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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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구글맵>

 

이 대목에서 잠깐 고민해 봐야 하는 게, ‘이 당시 중국이 금문도를 점령할 생각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점령할 생각도 없는데 왜 공격해?”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점령할 생각 없이도 포격전은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도 잘 알지 않은가? 연평도 포격전을 겪어보지 않았나?) 중국은 1950년대 중반부터 전투기를 대량으로 배치한다. 동남 연안 지역에 철도·비행장·해안 포대를 강화했고 해군의 함대 전력까지 충실히 다져놓는 등 전쟁 준비를 해놓은 게 사실이다.

 

이런 중국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대만군도 1958년 8월 15일부터 대대적인 병력증원을 시작한다. 금문도 포격전을 배경으로 한 대만 영화 <823 금문 포격전>을 보면 대만군이 사전에 병력을 증파하는 장면이 잘 묘사돼 있다.

 

대규모 공세 준비는 사전에 발각되기에 십상이다. 대만은 대비하였다. 기습은 물 건너갔다. 이렇게 공세 대비를 마친 섬에 대한 상륙작전은 상당한 희생을 전제로 한다. 뻔히 대만이 눈치챌 공세 준비를 한 마오쩌둥에게 이라크 혁명 세력을 측면에서 지원하려고 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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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항구에 모인 대만군

출처-<영화 '823 금문 포격전' 화면 캡쳐>

 

중국의 포격 개시 & 미국의 대만 헬프

 

중국은 1958년 8월 23일 459문의 대포를 해안가에 방열했고, 곧이어 2시간 동안 이어질 포격을 시작했다.

 

포병들이 대포를 쏘는 것과 발맞춰 80여 척의 군함들도 금문도를 향해 포탄을 날렸다. 하늘에는 200여 대의 전투기들이 날아가 금문도를 폭격했다. 이날 하루에만 양측은 5만 7천 발의 포탄을 사용했다. 대만군은 첫날 부사령관을 포함해 많은 병력을 잃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강경 대응을 할 듯이(?!) 나선다. 당장 항공모함을 포함해 7함대를 급파했고 당시 최신예 전투기였던 ‘과부제조기’ 스타파이터를 보낸다. 더불어 당장 개발·배치된 지 3년도 안 된 사이드와인더(Sidewinder) 열추적 미사일을 대만 공군에 건넸다(이 미사일을 F-86세이버에 달았는데, 당시 기술자까지 파견해서 미사일을 달아줬다). 8인치 곡사포와 155미리 견인포 등등을 공급해 준 것뿐만 아니라 중국군의 공습에 대비해 나이키 허큘리즈 대공미사일(Nike-Hercules, 미국에서 개발한 고체 연료 추진 방식의 고고도 및 중고도 지대공 미사일)까지 건네줬다.

 

제7함대는 중국에 대한 압박과 대만의 금문도에 대한 해상보급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 당시 미국은 중국과의 전쟁은 피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대만이 중국에 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모든 걸 지원해 줬었다. 군사력으로 중국을 압박하지만, 전투는 피했던 미국. 대만으로선 아쉽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미국은 할 만큼 해줬다. 이런 상황에서 포격전은 계속 이어졌다.

 

양쪽은 서로 합해 60만 발이 넘는 포탄을 날렸다(중국군 47만 4천 발, 대만군 12만 8천 발 이상). 이러다 보니 대만군의 포탄 보급이 문제였다. 해상 보급을 위해 수송선과 전차상륙함(Landing Ship, Tank (LST))이 동원돼 병력과 포탄을 실어 날랐고, 이 보급선을 노린 중국군의 공격이 이어졌다.

 

금문도 포격전은 단순한 포격전이 아니다. 하늘에선 미그기와 세이버가 공중전을 벌였다(세계 최초로 공대공 미사일을 활용한 공중전이었다. 애초에 불리할 걸로 예측된 대만군이 사이드와인더 미사일로 미그기를 학살한다. 그 대가로 사이드와인더 기술이 소련 측으로 넘어간다). 해상에서는 이 수송선을 사이에 두고 해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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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 F/A-18 호넷에 장착된 사이드와인더

출처-<위키피디아>

 

지상에서는 당연히 수만 발의 포탄을 서로에게 날리며 치열하게 싸웠다. 덕분에 금문도의 고도가 2미터나 낮아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된다. 사족으로 금문도에서는 이때 날아간 포탄들을 수거해서 칼로 만들어 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포격전은 뒤로 갈수록 흐지부지되었다. 1958년 10월 5일 중국이 금문도에 대한 포격을 1주일간 중단한다고 말했는데, 이후 계속 소강상태로 이어진다. 미국과 소련의 압박 때문에 포격전이 잦아든 것이다. 포격전은 이렇게 흐지부지 이어지다가 끝났다. 8월 23일 시작한 포격전은 10월 5일 끝났다고 보면 된다. 즉, 한 달 남짓 대포를 쏘다가 끝났다는 거다.

 

이 한 달간 포격전으로 대만군이 440명 전사했고, 중국군도 460명 전사했다. 해전과 공중전에서는 대만군이 중국군을 학살해 버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대만군의 승리라 할 수 있다(공대공 미사일 때문에 중국군 전투기가 20여 대 이상 격추됐고, 중국군의 어뢰정과 고속정도 대만군에 의해 숱하게 격침됐다).

 

포격전 후 금문도의 사정

 

문제는 이다음부터였다. 금문도 포격전 이후 대만군은 금문도를 ‘거대한 벙커’로 만들어 버린다. 대만군은 중국군과의 포격전을 경험한 후 ‘땅굴’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군항·비행장·무기 저장고·탄약고에 심지어 고량주 창고까지 다 집어넣는다. 주민 4만여 명을 동시에 생활할 수 있는 거주구까지 팠다.

 

군항(軍港)을 땅속에 팠다면 이해가 가는가? 실제로 대만군은 그러했다. LST 42척을 정박시킬 수 있는 굴을 팠다. 지하갱도 길이만 10여 킬로미터를 훌쩍 넘었다.

 

이 조그만 섬에 10만 병력이 몰려들게 됐고, 이 군인들을 위한 것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화 <군중낙원>을 보면 이 당시 대만군을 상대하던 ‘위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 대만군은 금문도의 병력을 위한 위안부를 직접 운영했다. 공식적으로는 특약차실(特約茶室)이라 불린 위안부 거주지는 금문도에 10여 곳이 생겨났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 바로 이 <군중낙원>이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대만군이 어떤 식으로 근무하는지, 군과 위안부의 상관관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20세기와 21세기 대만의 차이를 확인했다 할 수 있다. 20세기에 만들어진 <823 금문포격전>에서 대만 병사들은 마을 여자들에게 수작을 거는 ‘건전한 모습’으로만 나온다. 반면 21세기에 나온 <군중낙원>은 적나라하게 자신들의 치부를 보여줬다. 한 번쯤 꼭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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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중낙원>

출처-<링크>

 

다른 식으로 군인을 위로한 게 금문 고량주이다. 원래 군의 경제력을 재고하기 위해 50년대부터 만들어진 술인데 수수로 고량주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쌀을 아낄 수 있었다. 도수도 세서 군인들에게 좋았다. 금문포 포격전 이후, 굴 안에 갇힌 군인들의 정신적 위안을 위해(셸 쇼크 같은 걸 예방하기 위해) 군인들에게 나눠줬다. 이게 낯선 모습은 아니다. 2차 대전 때 스탈린은 병사들에게 보드카를 나눠주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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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관광지로도 활용되는 금문고량주 공장

출처-<링크>

 

한때 양안 갈등의 최선봉에 있었던 금문도. 그러나 이것도 이제 옛말이 됐다. 10만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금문도는 과거의 모습이다(현재 대만군 숫자가 21만인데... 10만을 금문도에 배치할 수도 없다). 이제 잘해야 6천 명 수준의 병력만이 금문도에 남아 있다. 

 

앞으로 중국과 대만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 중국과 대만의 군사력 차이를 고려했을 때 만약 중국이 금문도를 점령하겠다고 마음 먹는다면... 2차 금문도 포격전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터이다. 60년 전 어뢰정이나 고속정을 끌고 다니던(마오 아저씨가 이상한 ‘생각’으로 중국을 연안해군으로 만들어버렸던) 중국이 아니다. 그 실력은 차치하더라도 항공모함 전단(戰團)을 끌고 다니는 게 지금의 중국이다.

 

대만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무력으로 중국을 상대할 생각은 못 할 거다. 결국 믿을 건 미국의 ‘대외정책’일 터이다. 미국의 지원이 없는 대만은 마음대로 무기도 살 수 없는 나라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