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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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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창비>

 

 

폭력이라는 나쁜 피

 

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 패지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줄에 걸린 목에서 피가 흘러. 목이 아파 낑낑대며, 개는 질질 끌리며 달려, 여섯 바퀴째, 개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 섞인 피, 번쩍이는 두 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 일곱 바퀴째......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그날 저녁 우리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인간이라는 생물 종의 몸속에는 ‘폭력’이라는 나쁜 피가 흐르고 있다. 최초 인류의 경제활동은 수렵이었음을 기억하자. 인간도 동물이며 동물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포식의 욕망은 오직 살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다른 개체보다 강한 생존 능력을 가진 개체가 번식에서 유리하다는 거부할 수 없는 진화의 법칙, 자연선택을 고려한다면 현생 인류는 가장 폭력적인 유전자의 보유자들이다. 순박하고 맑은 눈을 가진 어린아이에게 잠자리를 잡아 주었을 때, 서슴없이 잠자리의 날개를 떼는 것이 낯설지 않은 이유이다. 따라서 폭력은 당연히 인간의 가장 고유한 특질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인류 문명의 발달과 함께 폭력도 진화했다. 인류의 첫 공동체인 원시공산제 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해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종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신석기혁명을 통해 농경과 목축이라는 생산경제로 바뀌면서 폭력은 같은 인간을 대상으로 행해지게 된다. 잉여 생산물로 인한 사유 재산의 발생과 계급의 분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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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 아닌 이익을 위해, 기득권 유지에 도움이 되는 체제를 위해 폭력은 사회 구조적으로 행해진다. 그리고 문화와 관습, 합법이라는 공식적인 지위까지 부여받았다.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자각, 브래지어를 벗은 영혜

 

‘나’가 ‘영혜’와 결혼한 이유는 평범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특별한 매력이 없는 만큼 특별한 단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녀에게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한마디로 편안함이었다. 그래서 영혜와 결혼한 것이다. 

 

딱 하나, 영혜에게도 특별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영혜가 브래지어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영혜는 유난히 브래지어를 답답해하고 싫어했다. 나중에는 아예 브래지어를 풀어 버렸다. 옅은 색의 얇은 상의를 입어 윤곽이 역력히 드러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영혜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브래지어 후크를 풀어 버리곤 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근육 지배의 상징물처럼 된 코르셋(코르셋은 장파열 등으로 여성들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했다)을 벗어 던지는 것으로 가부장에 저항했지만, 영혜가 브래지어를 벗은 것은 자신의 가슴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 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당연히 결혼 생활은 무미건조한 것만큼이나 순탄했다. 영혜가 해 준 얼큰한 닭도리탕에 밥을 세 그릇이나 비울 정도로 ‘나’의 결혼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물론 둘 사이에 약간 언성을 높이는 일들도 있었다. 그래봐야 사람 사는 공간에 충분히 있는 그런 작은 소란이었다. 전혀 심각하지 않고 마음에 남겨두지도 않을 성격의 일들이다. 사례를 하나 들자면 영혜가 출근 시간에 쫒기는 ‘나’를 위해 급하게 언 고기를 썰 때 있었던 일이다. 

 

제기랄, 그렇게 꾸물대고 있을 거야?

 

알지, 당신이 서두를 때면 나는 정신을 못 차리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허둥대고, 그래서 오히려 일들이 뒤엉키지. 빨리, 더 빨리, 칼을 쥔 손이 바빠서 목덜미가 뜨거워졌어. 갑자기 도마가 앞으로 밀렸어. 손가락을 벤 것, 식칼의 이가 나간 건 그 찰나야.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붉은 핏방울 하나가 빠르게 피어나고 있었어. 둥글게, 더 둥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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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일회적이 아닌 삶의 한 부분이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가해지고 행해진다.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하루에도 몇 번씩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남편이 영혜에게 행한 이 작은 폭력,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작은 폭력 앞에서 아무도 죽일 수 없는 둥근 가슴을 사랑했던 영혜는 모든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행동, 육식의 거부

 

모든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 영혜의 행동은 새벽에 갑자기 일어나 냉장고를 뒤지는 것으로 시작됐다. 마치 몽유병을 앓는 환자처럼 영혜는 어둠 속에서 냉장고를 뒤졌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모든 육류들, 고기가 들어간 냉동 만두까지 찾아내어 쓰레기 봉투에 담았다. 오싹함과 함께 섬뜩함마저 주는 이 새벽의 광경 앞에서, 남편은 자신의 발에 밟힌 비닐봉지의 물컹한 촉감에 당황하며 늘 그렇듯 영혜의 손목을 잡고 힘으로 제압하며 남자, 남편의 권위를 담아 뭐하는 짓이냐고 거센 호통까지 쳤다. 그러나 영혜는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했다.

 

모든 육식을 거부한 영혜의 행동이 남편에게는 사소한, 작은 폭력이 아닌 견딜 수 없는 심각한 폭력으로 다가왔다. 남편의 일상은 느리지만 강렬하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남편은 점점 가정에서 편안함이 아닌 낯선 것이 주는 기이함과 불길함에 시달려야 했고 점점 말라가는 아내와는 소통이 아닌 단절감을 느껴야 했다. 이제 안방은 더 이상 부부간의 사랑이 행해지는 공간이 아니었다. 오직 어둠과 정적이 주는 오싹함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이제 남편은 폭력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었다.

 

사회생활은 필연적으로 원치 않는 자리에 참석해야 할 시련을 주기 마련이다. 밤마다 육식의 꿈에 시달려 불면증까지 앓고 있는 영혜의 얼굴은 검게 변해 있었다. 이런 영혜를 데리고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은 남편에게는 영혜의 채식만큼이나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최자가 사장이었고 과장급인 남편의 참석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남편은 살기 위해서는 도저히 이 부부동반 모임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남편은 영혜에게 진심으로 간절하게 화장하기를 부탁했다. 들뜨고 거칠게 마른 아내의 얼굴 피부에 바른 분은 아내를 헝겊 인형처럼 보이게 했으나 남편은 아내를 이끌고 사장이 예약한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그저 아내가 이 중요한 자리에서만큼은 무난히 넘어가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아내는 약간 달라붙는 검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두 개의 젖꼭지가 분명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웨이터가 자신의 접시에 탕평채를 덜어놓으려고 국자를 드는 찰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안 먹을게요.”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좌중의 움직임이 멈췄다. 의아해하는 시선들을 한몸에 받은 그녀는 이번엔 좀더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다음 음식은 깐풍기였고, 그 다음 음식은 참치회였다. 모두가 먹는 동안 아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작은 도토리알 같은 유두를 블라우스 속에서 뚜렷이 내민 채, 거기 모인 사람들의 입술과 그 움직임을 샅샅이, 빨아들이듯 지켜보았다.

 

남편의 바람은 허망할 정도로 부질없이 깨졌다. 사장 주최의 부부동반 모임에서조차 영혜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고 모든 육식을 거부했다. 모임의 화제는 순식간에 채식주의로 바뀌었고, 아내는 모임에 참석한 모두를 끔찍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전무의 아내, 사장의 아내 등의 호기심과 경멸에 찬 시선 앞에서 남편은 절망과 좌절의 진땀을 흘려야 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릿속과 이 자리가 까마득히 깊은 함정처럼 느껴졌다. 

 

 

저항, 폭력과 인생의 불협화음

 

인간은 고등 동물이다. 동물은 약육강식의 법칙 앞에 굴복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폭력과 폭력이 맞부딪힐 때 약자는 또 다른 폭력에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위기를 해결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직 인간의 폭력만이 개별 개체에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해지고 심화된다.

 

영혜의 육식 거부는 남편이 어찌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영혜는 채식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던 남편은 처가에, 특히 장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장인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에 적격인 사람이다. 그는 늘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었으며 목소리가 컸고 그 목소리만큼이나 대가 센 사람이었다. 그는 훈육의 이름 하에 딸자식에 대한 육체적 폭력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영혜는 열여덟 살까지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으며 자랐다.

 

그러나 남편과 아버지 모두 포식자의 폭력이라는 존재의 불가피성을 거부하는 영혜의 의지를 과소평가했다. 채식의 길로 들어선 영혜는 자신이 다시 육식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해칠 수 없었던 영혜의 둥근 가슴은 누군가를 찌를 것처럼 뾰족해지고 있었다. 본성을 거부한 대가였다. 

 

입 안에 침이 고여.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

 

그래서 더욱 절박하게 채식에 매달리고 있었다. 영혜에게 채식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남편의 장인, 영혜의 아버지는 평생의 노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몸집으로, 그러면서도 나이 때문에 구부정한 모습으로 남편의 장모이자 영혜의 어머니가 내민 굴무침을 거부하는 영혜에게 다가가 먹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영혜는 거부했다. 아버지는 점점 분노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직접 자신이 탕수욕 한 점을 젓가락에 끼워 영혜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또다시 먹으라고 명령했다. 영혜의 가족들이 딱 한 번만 타협할 것을 영혜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혜는 단호히 거부했다.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쥐었다. 

 

“아버지!”

 

처형이 외치며 장인의 팔을 잡았다. 장인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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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거부하는 영혜.

영화 <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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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혜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아버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영혜의 입술에 아버지는 강제로 탕수육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억센 손가락으로 영혜의 입술을 벌리려 했고 영혜는 이빨을 악물며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 더 영혜의 뺨을 후려갈겼고 와중에 영혜의 입이 벌어지자 그 순간에 탕수육을 쑤셔 넣었다. 육식의 폭력 앞에서, 영혜는 상 위에 놓인 과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씩 응시하다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었다. 영혜의 손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붉은 피는 음식이 담긴 흰색 접시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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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영혜는 끝까지 불협화음을 선택했다. 

 

 

폭력과 인생의 협화음, 불협화음

 

폭력은 우리 몸 속을 흐르는 나쁜 피이다. 폭력이 인간의 본성이란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진화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이고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생은 늘 폭력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문명의 변화 발전과 더불어 폭력의 대상과 그 작용방식에 변화가 있었지만 물리적인 강제력을 가지는 유형무형의 힘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따라서 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휴머니즘과 폭력’이라는 그의 에세이집을 통해 폭력을 인간의 불가피한 문제, 즉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라고 말했다. 

 

영혜가 식물이 되기로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 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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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이 식물이 될 수는 없다. 존재의 전환은 곧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폭력과 인생의 협화음, 그리고 불협화음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 폭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폭력과 인생의 협화음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주어진 유일한 해결책이란 것이다.

 

인생 탐구의 과정이 여기까지 도달했다면 남는 것은 절망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생에는 그 어떤 고귀함도 없다. 그저 강자가 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가 될 뿐이다. 그래야 피해자의 입장일 때보다 가해자의 입장일 때가 더 많을 테니까.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그것은 인간이 대단히 모순적인 존재란 것이다. 인간은 본성에 충실한 동물이지만 동시에 본성을 제어할 이성을 갖고 있는 생명체다. 인생과 폭력의 협화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폭력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이성적으로 통제하자는 말이다.

 

폭력을 이성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폭력의 행사와 관용적 수용의 대상을 구분하고 그 경계선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내 처음 너희들과 이 섬으로 올 때에는 먼저 부자가 되게 한 다음에, 따로 문자도 만들고 옷이며 갓 같은 것도 지어 입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땅은 좁고 내 덕도 부족하니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날까 한다. 너희들은 아이를 낳거든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도록 가르치고, 또 하루라도 먼저 난 사람이면 서로 음식을 양보하는 따위의 덕을 길러야 한다."

 

-박지원, ‘허생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 끝 무렵,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허생전이다. 유학자이되 가장 진보적이었다는 실학파의 박지원 선생이 쓴 글이다. 절망적인 인식 수준이다. 왼손과 오른손 사용의 차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음식을 먹는 순서는 나이가 아니라 배고픔의 정도여야 한다. 이것이 합리성이다.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질서’이다. 모난 돌은 정을 맞아야 했다. 대부분이 오른손잡이라면 왼손잡이는 허용되어서는 안 되었다. 왼손잡이를 허용하는 순간 질서는 깨지고 다양성이 체제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획일성이 합리성보다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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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 링크 

 

위의 허생전보다 더 끔찍한 것은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 집권당 대표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영혜가 채식을 선택함으로써 당해야 했던 폭력,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가하는 폭력, 신체적 힘의 우위를 이용해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일부 남성이 일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 이 모든 폭력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에 맞서 우리는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아니면 관용적인 태도로 수용하든지 더 나아가 같이 합류하여 폭력의 가해자가 돼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바로 폭력과 인생의 올바른 협화음을 이루는 척도가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폭력적인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의 사용에 대한 이성적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인생과 폭력의 올바른 협화음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인생을 보다 의미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것이 여섯 번째 인생 탐구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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