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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파계승하면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어 치우고 여성과 뜨밤을 보내는. 그러면서 뭔가 좀 맛이 간 승려를 일컫곤 한다. ‘타락한 승려’에 대한 비판과 성토는 오늘날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 시대에도, 심지어 붓다가 살아있을 때도 제기되던 구질구질한 문제이다. 어떤 문화적 전통에서 특정한 문제가 2,500년쯤 반복됐다면, 사실 그 전통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래서 승려의 육식과 결혼 문제는 20세기 한국불교사를 관통하는 결정적 장면마다 모두 발을 대고 있다.

 

나에게는 평생의 화두가 하나 있다. 언젠가 ‘한국불교 100년사’라는 장기 연재 글을 딴지에 싣고 싶다는 희망이다. 킹치만,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랄까? 언젠가 좀 더 짬이 먹고 고료도 팍팍 뛰고 그리고 그런 걸 넉넉히 쓸 정도의 부와 명예를 가지게 되면 쓸 생각이다(검찰에라도 한 번 잡혀가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 이 기사는 일종의 프리퀄이다.

 

그럼, 승려의 육식과 결혼 문제를 논했던 100년 전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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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과거, 승려의 결혼을 대처(帶妻) 또는 취처(娶妻)라는 용어로 설명하곤 했다. 과거 사람들의 글에 이러한 단어가 남은 것은 시대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현대인들도 아직 대처나 취처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여기선 ‘결혼’으로 바꿔서 사용하도록 하겠다.)

 

육식과 결혼, 불가에선 어떻게 다뤘나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말하기에는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듯하다. 육식은 식욕의 해소, 결혼은 성욕의 해소를 의미한다. 당최 이놈의 욕망이란 그칠 일이 없어서, 아무리 충족해도 만족을 모른다. 하나가 충족되면 다른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충족되지 않으면 자신을 들들 볶게 된다. 왜 그런 말 있지 않은가.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그냥 ‘사는 게 괴롭다’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결코 욕망을 무한히 충족할 수 없음에서 오는 본질적인 괴로움

 

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교는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는 것을 추구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다.

 

욕망을 차단하는 것은, 본질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기 안 먹고 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붓다가 살아있을 때, 이미 육식 문제로 한바탕 거하게 싸우기도 했다. 그 결과 붓다가 직접 이런 룰을 만들기도 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죽인 고기라는 것을 알면서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잘못이다. 만약 자기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지 않았고, 듣지 않았으며, 고의로 죽였다는 의심이 없는 ‘깨끗한’ 생선과 고기는 먹어도 좋다고 나는 허락한다.”

 

- 『근본설일체비나야파승사』

 

하루에 단 한 끼, 그것도 탁발을 통해 얻은 음식에는 고기가 종종 들어 있었다. 수행자는 음식을 고를 수 없으며, 주어진 음식이 무엇이든 감사히 먹어야 한다. 붓다의 저 말은 수행자를 위해 도축된 음식이 아니라, 소위 말해 ‘짬 때린’ 생선과 고기라면 먹어도 괜찮다는 말로써, 탁발 문화 속, 현실적 중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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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노상탁발>

 

그런데 현대의 도축 시스템은 불특정 다수를 위해 수많은 고기가 도축된다. 비록 특정 승려를 위해 도축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소비자’를 위해 생산된다는 점에서 과연 ‘깨끗한 고기’가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후기 인도 불교에서부터 피어났다. 이 시기 나타난 경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고기를 죽이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기를 매입할 수 없게 된다면,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이 판매하기 위해 죽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입자 또한 살생하는 자와 다름이 없다.

 

- 『능가경(楞伽經)』

 

어떤가. 현대의 일부 반육식주의자 논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당시 불교에서 극단적인 반육식주의가 나타난 것은 다양한 까닭이 있는데, 하나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이때는 이미 모든 중생(중생에는 동물도 포함된다)에게는 이른바 불성(佛性, 부처가 될 포텐셜)이 있어, 누구나 포텐만 터뜨리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곧 부처가 될 중생을 잡아먹는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익숙한 동아시아 불교는 바로 이 시기 경전을 주류로 삼아 흘러왔다. 그래서 승려의 육식에 대한 비판이 비교적 적은 남아시아 불교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승려의 육식이 문제가 된다. ‘중이 고기를 처먹어서 얼굴에 기름기가 반질반질하고 살이 뒤룩뒤룩 쪘다’라며 까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육식은 이미 붓다가 제한적으로 허용했다는 점에서 결혼보다는 사정이 낫다. 붓다는 언제나 고행에도 치우치지 않고 타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강조했는데, 비록 몸뚱어리는 실체가 없고 장애를 만드는 것이지만, 수행하기 위해선 우선 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건강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따라서 적당한 육식은 현대에서도 괜찮은 것 같다.

 

그러나 결혼은 사정이 다르다. 붓다가 살아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강하게 금지시켰다. 조계종과 태고종 등의 승단에서 남자 승려는 비구계(比丘戒)라는 룰을 지켜야 하는데, 그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일부러 남근(男根)을 희롱하여 정액(精液)을 배출하지 말라(몽정은 제외한다).

음욕(婬欲)의 뜻으로 여인의 몸을 만지지 말라.

음욕의 뜻으로 여인과 음란한 말을 나누지 말라.

 

- 『사분율(四分律)』

 

이러한 룰은 2번째로 무거운 중죄로, 아주 오래전부터 강조됐다. 또한, 승려의 결혼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사유재산의 성립이다. 수행자가 사유재산을 만드는 것 또한 무거운 죄 중 하나였고, 혜민의 ‘풀소유’ 논란에서 보듯 지금도 금기이다. 따라서 결혼은 파계 종합선물세트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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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승 놀이> /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재밌는 건, 텍스트에 따르면 위와 같은 룰을 범하여 파계하더라도 승려 자격을 잃지는 않는다. 진심으로 참회하면 승려의 자격은 간신히 유지된다. 다만 현대 조계종은 결혼 사실이 드러나면 승려 자격을 박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 여기까지가 승려의 육식과 결혼에 대한 배경 정보였다. 이제 100년 전, 조선으로 돌아가 보자.

 

100년 전,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를 만났을 때

 

19세기 말, 조선 불교는 ‘조선화’돼 있었다. 건국 초기 조선의 사대부들은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 한반도 전역에 펼쳐진 다양한 종파는 선(禪)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禪宗)과 교리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교종(敎宗), 두 개로 통합되었고, 절들 또한 통폐합되면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불교는 국가 권력과 적절히 타협하고, 민중 속으로 스며들어 생존했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는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고, 내로라하는 사대부 가문들과도 가깝고도 먼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수행을 담당하는 이판승과 살림을 담당하는 사판승으로 나눠진 체계는 조선 불교의 생존 전략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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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타. "이판사판"의 유래가 이판승과 사판승이다. 숭유억불 정책의 조선시대에

이판승이나 사판승, 즉, 스님이 된다는 건 신분의 최하층이 된다는 의미니

"끝장"으로 간다는 걸 가리키게 된 거다.   

출처: SBS

 

그런데 19세기 말, 청일전쟁 승리의 여파를 타고 일본의 정토진종, 조동종, 일련종 등 다양한 종단이 경쟁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한다. 이유는 당연히 제국주의적인 침략이었다. 이때 일본에서 ‘호국불교’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호국불교는 임진왜란의 승병장 사명대사라는 이미지로 대표되지만, 일본 승려들의 ‘호국불교’는 지극히 제국주의적이었다.

 

동시에 일본 불교는 아주 빠르게 세계 속으로 떠났다. 근대적 의미의 ‘불교학’, 즉 원전 텍스트를 수집·번역·분석하고, 학술적 체계를 갖춘 논문을 써내는 불교학은 서구에서 시작되었다. 인도를 영국이 꿀꺽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도저히 접할 수 없었던 고대 인도의 원전들을 바탕으로 ‘레알 불교’의 맛을 선사하던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일본 불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들은 서구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면서 빠르게 세계 불교학의 주요 축 중 하나로 성장한다.

 

조선의 불교는 어떠했는가. 조선의 불교는 선 수행 중심이었고, 그래서 이론적 논의는 그리 깊어지지 못했다. ‘공부’는 ‘마음공부’만을 뜻했고, 문자는 오히려 공부에 방해된다는 사조가 강했다. 고려대장경의 성립 이후 19세기까지 조선에는 ‘새로운 텍스트’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들어오는 각종 불교 문헌에는 생전 처음 접해본 산스크리트어 텍스트들, 그들이 수백 년 동안 읽던 대승불교 경전과는 너무도 다른 초기불교의 텍스트들이 속속 포함되었다. 일본 불교가 서구 학자들의 논문을 보고 충격을 입은 것처럼, 조선의 불교도들 또한 일본 불교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혹자는 “이거 개쩐다!”하면서 경이로움까지 느꼈을 것이다.

 

그보다 앞서 또 하나의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500년 동안 조선 불교계의 숙원 사업은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하는 것이 바로 그것. 1895년 일련종의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고위 관리들을 만나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해 달라고 청원했고, 박영효 등의 건의로 고종의 윤허를 받는다. 사노 젠레이의 목적은 분명했다. 조선 불교도들에 대한 일본 불교의 포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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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법보신문 (링크)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조선 불교도들은 크게 일본 불교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국권침탈이 이뤄진 1910년, 그리고 총독부가 사찰령(전국 주요 사찰의 주지를 총독부가 직접 임명하는 조치)을 공포한 1911년에 이르면, 똑똑하고 장래가 밝은 젊은 승려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일본 유학승이 126명 이상이 되는데, 일반적인 조선인 유학생 수와 비슷한 수치이다. 이들은 대부분 결혼하고 돌아오거나, 귀국 후 결혼하는 승려가 되었다. 또한, 엘리트 승려로 이름을 날려 큰 손의 ‘스폰서 보살’들 후원을 받으면서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엘리트 승려에게 여럿의 스폰서 보살이 따르게 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총독부의 사찰령으로 인해 조선 불교는 큰(?) 저항 없이(저항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엄청 난리 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총독부의 관리 범위 안으로 들어간다. 조선 말기 불교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이미 권력 친화적인 종교가 되어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 총독부로의 변화는 혹자에게는 자주권과 독립권의 상실이었지만, 친일 승려들에게는 ‘더 든든한 뒷배’를 가지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에는 일본식 사찰이 우후죽순 지어지기 시작했고, 20년대 이후부터 불교는 냉정히 말해 다른 종교에 비해 가장 친일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일본 불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승려의 결혼 허용’이었다. 1872년, 메이지정부는 ‘육식대처승수령’이라는 법령을 반포하여 승려의 육식과 결혼을 허용하면서, 그에 대한 판단을 각 종파에게 맡겼다. 물론 반대하는 종파도 있었으나, 시대적 추세, 후계자 양성, 가족이라는 측면 등에서 승려의 결혼을 인정하자는 논의가 1900년을 전후하여 대세로 자리 잡는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들은 대세를 받아들였고,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 종파들 또한 승려의 결혼에 적극적이었다. 이제 도심의 절이나 산속의 고찰이나 결혼한 승려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승려의 결혼 문제가 전적으로 일본 불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대와 현대의 연구자들 또한 ‘왜색불교’의 영향이라면서 비판하지만, 승려의 결혼 문제는 ‘조선화 된’ 불교의 모습 중 하나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는 ‘대처승(帶妻僧)’이라는 이름, 조선 후기에는 ‘재가승(在家僧)’이라는 형태로 결혼한 승려에 대한 기록이 적잖이 있다. 19세기 이르면, 오히려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찬탄을 받는 승려가 나타난다. 즉, 불교 내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오류’가 바로 승려의 결혼이었고, 불교의 쇠락과 더불어 조금씩 일반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통의 쇠락과 외부의 영향이라는 두 가지 바람을 맞았던 1910년경 조선 불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불전에는 비가 새거나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석가모니 불상이 있다. 쥐의 배설물로 더러워진 3-4권의 경전이 있고, 승려들은 배우지도 않고 무식하다. 승려들은 처나 첩이 있는 경우도 있다. 승려들은 종일 함께하는 사람도 없으며, 일생 동안 한 가지 일을 성취해 내는 사람도 없다. 조선의 승려들은 일본 승려들을 양반이라고 부르면서 비교적 신뢰한다.

 

宗敎ニスル雜件綴

 

매우 편협하고 왜곡된 시선이다. 하지만 이렇게 퇴락한 사찰이 분명히 있었다. 쇠락하고, 시대에 뒤처지며, 조금씩 일본 불교에 경도되어가는 모습. 그것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 불교의 민낯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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