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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노인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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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민음사>

 

 

패배를 배워야 먹고 사는 세상

 

오늘도, 사는 게 참 힘들다.

 

세계일보.PNG

출처-<세계일보> 링크

 

‘일가족 자살’이라는 이 상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단어가 미디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할 정도로 먹고살기 힘든 사회다. 직장인들의 평균 근속 연수는 11년 내외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그중에서도 800만 명, 40% 정도는 늘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다. 결국은 자의로 타의로 자영업의 길에 뛰어들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 자영업자들의 1년 생존율은 60%가 조금 넘는다. 5년 생존율은 30% 정도이다. 말이 좋아 생존이지 수익을 낸다는 말이 아니다. 보증금을 까먹으며 아둥바둥 버티는 것이다. 보증금마저 다 떨어지면 빚으로 버틴다. 버티고 버티다 마지막으로 전화기 한 대 남았을 때, 그때 폐업하는 것이다.

 

흔히들 정글을 지배하는 법칙을 '약육강식'이라고 말한다. 먹이사슬 상위에 있는 포식자들의 잔인한 약탈과 사냥은 당연한 것이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인간은 ‘법과 질서’라는 지배원리에 합의했다. 폭력과 야만이 아닌 정의롭고 공정한 법과 그 법을 지킴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질서 속에 인간 사회가 영위된다고 한다.

 

문제는 이 말이 어린이들 동화책 속에서나 통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동물은 배를 채우면 사냥을 멈추지만, 인간은 다르다. 부자들의 탐욕은 멈추는 법이 없다. 세상 그 어떤 자본가도 스스로 자본의 증식을 멈추지 않는다. 더군다나 법은 부자들이 만들었다. 법은 편파적이다. ‘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심히 괴롭히고 부자들은 법을 지배한다.’ 그래서 정말로 사는 게 힘들다.

 

한 방에 훅 가는 세상이다. 살기 위해서, 저 추운 생존의 정글로 쫒겨나가지 않기 위해서 그 어떤 굴욕과 모욕도 참아야 한다. ‘빛나는 자긍심’ 따위의 단어들은 철없는 사춘기의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한다. 가슴 속 깊은 곳에 감춰두고 꺼내서는 안 된다. 직장 상사의 같잖은 호통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야 하며, 가끔씩 내 몸을 건드리는 늙은 지도 교수의 손길도 참아내야 한다.

 

그들이 내 인생의 갑이다. 인생은 내 것이지만 결정권자는 내가 아니라 갑들이다. 그들에게 패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하루에 몇 번씩 패배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권을 항상 ‘부자 되는 법, 몇 살까지 얼마 만들기’ 등의 ‘자기 계발서’들이 차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소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가난한 데다가 늙기까지 한 어부이다. 위에서 말한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보았다면 따귀라도 한 대 맞을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

 

 

가난하게 늙은 어부,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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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민음사판 ‘노인과 바다’ 속 삽화

 

84일간,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한 카라브해 멕시코 만의 어부 산티아고는 나이가 자명종인 노인이다. ‘산 날’보다 ‘살 날’이 훨씬 적으니, 인생이 아까워서인지 늘 일찍 잠에서 깬다. 더군다나 어부인데 투망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

 

85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여 복권을 사고 싶었지만, 복권값 2달러 50센트조차 수중에 없는 가난한 노인이다. 한때는 그에게도 카사블랑카 부두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거대한 흑인과 24시간 동안 팔씨름을 벌일 정도로 강철같이 빛나는 육체를 가진 젊은 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일한 말동무인 어린 소년 ‘마놀린’으로부터 9월에는 꼭 몸을 따뜻하게 담요를 덮고 자라는 잔소리를 듣는 노인이다.

 

노인은 깡마르고 여윈 데다 목덜미에는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다. 열대 지방의 바다가 반사하는 햇볕 때문에 그의 두 뺨에는 양성 피부암의 갈색 반점들이 나 있었다. 이 반점들은 얼굴 양쪽 훨씬 아래까지 번져 있었다. 두 손에는 큰 고기를 잡으면서 밧줄을 다루다가 생긴 상처가 깊게 파여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새로 생긴 상처는 아니었다. 고기가 살지 않는 사막의 침식 지대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지닌 상처들이었다.

 

노인은 이제 먹는 것도 귀찮아져서 고기를 잡으러 갈 때도 점심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물병 하나만을 조각배의 뱃머리 위에 놓아둘 뿐이었다. 그러면 하루를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꿈은 꾸었다. 비록 여자 꿈도 폭풍우가 부는 바다 꿈도 아니었지만 늘 꿈을 꾸었다. 죽은 아내의 꿈조차 꾸지 않았지만 늘 아프리카 대륙의 대초원을 지배하는 사자들 꿈을 꾸었다.

 

노인은 곧 잠이 들었고, 아직 소년이었을 시절에 본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황금빛으로 빛나는 긴 해변과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해안선, 그리고 드높은 갑(岬)과 우뚝 솟은 커다란 갈색 산들이 꿈에 나타났다.

 

사자들은 황혼 속에서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뛰어 놀았고, 그는 소년을 사랑하듯 이 사자들을 사랑했다.

 

 

어부들의 꿈, 블루마린

 

400kg의 거대한 덩치가 시속 100km로 질주하며 주둥이에 붙어있는 길고 날카로운 칼을 휘두른다. 이런 포악한 생명체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입에 문 낚싯바늘을 스스로 뱉어낼 정도로 영악하기까지 하다. 실존하는 동물이다.

 

중력의 법칙이 지배하는 육지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바다에서는 가능하다. 워낙 힘이 좋아 낚시에 걸려도 섣불리 배 위로 끌어올려서는 안된다.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녀석의 몸부림과 주둥이의 칼날에 목숨까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강한 육체를 가진 자만이 녀석을 잡을 수 있다. 실력 없는 낚시꾼은 가히 잡을 엄두도 내지 못할 놈이다.

 

그러나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물기 묻은 아름다운 푸른 등, 수백만 원 정도는 쉽게 넘어가는, 거대한 몸집에 걸맞는 값비싼 몸값, 이런 것들 때문에 가히 어부들의 꿈으로 불러 손색이 없는 녀석이다. 이놈이 바로 블루마린, 청새치이다.

 

산티아고가 고기를 잡지 못한지 85일째 되는 날,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다. 전날 사자꿈을 꾼 노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행운을 빌어주는 소년의 배웅을 받으며 작은 조각배에 올랐다. 손에는 소년이 챙겨준 정어리와 미끼가 들려 있었다. 노인은 부두의 어부들이 보내는 비웃음을 더 이상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드넓은 바다에 작은 조각배는 위험한 것이지만 노인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면 먼바다까지 나갈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노인은 쉬지 않고 꾸준히 노를 저어 나갔다. 힘을 아끼기 위해 가끔씩은 조류에 배를 맡기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해가 뜨자 하늘에는 군함새 한 마리가 그 검고 길쭉한 날개를 뽐내며 떠 있었다. 길조였다. 군함새가 배회하는 곳의 바다에는 싱싱한 물고기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싱싱한 날치 떼가 수면 위를 튀어 올랐고 그 날치를 잡아먹으려는 만새기 떼가 덩달아 날뛰었다. 그러나 노인은 만새기를 낚지 못했다. 

 

노인은 먼바다까지 나갔다. 이제 더는 해안의 초록빛 선이 노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이었다. 노인이 드리운 낚싯줄에 달려 떠 있던 푸른 막대기가 갑자기 물속으로 푹 잠겼다. 노인은 직감했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청새치 한 마리가 노인이 드리운 정어리들을 뜯어 먹고 있음을.

 

어느 순간 노인의 손에 쥔 낚싯줄을 통해 거세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육중한 생명체의 감촉이 전해졌다. 청새치 중에서도 굉장한 놈이 미끼를 문 것이다. 격한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노인은 그놈을 조금도 끌어 올릴 수 없었다. 노인은 줄을 등에 감고 버텼다. 줄이 쉿쉿 소리를 내며 팽팽해졌다. 노인은 결코 줄을 놓지 않았다. 배가 놈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노인이 탄 작은 배는 북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이 되었다. 얼마나 힘이 좋은 녀석인지 하루종일 노인과 조각배를 끌고 다녔다. 

 

싸움은 곧 목숨을 건 사투로 바뀌었다. 미끼를 문 청새치가 노인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굉장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노인과 조각배를 무려 사흘간 끌고 다녔다. 노인은 버텼다. 낚시줄을 움켜쥔 손에 쥐가 나면 다른 손으로 바꿔 쥐고 찢어진 손바닥을 바닷물에 담가 가며 버텼다. 등짝은 통증의 한계를 넘어 아예 감각이 없어졌지만 버텼다.

 

잠깐씩 쪽잠을 자며 정어리와 만새기를 칼로 토막내어 질겅질겅 씹으며 버티고 또 버텼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눈앞마저 순간순간 가물가물해질 정도의 상태이기에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모든 고통과 마지막 남아 있는 힘, 그리고 오래전에 사라진 자부심을 총동원해 고기의 마지막 고통과 맞섰다.

 

노인이 원하는 것은 한가지였다. 낚싯줄에 걸린 이놈이 죽어버려 가라앉지 않는 것이었다. 노인은 이 거대한 청새치를 끌어 올릴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녀석이 죽기 전 마지막 몸부림 때문에 수면 위로 몸뚱아리를 드러내기만을 바랐다. 그러면 녀석의 등짝에 작살을 꽂아 잡을 수 있었다. 사투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 녀석의 은빛 살갗과 자줏빛 줄무늬가 노인의 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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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알렉산더 페트로프 감독의 애니메이션

‘노인과 바다’ 

 

노인은 낚싯줄을 놓고 한쪽 발로 그것을 딛고 서서 작살을 힘껏 높이 치켜들었다가 마지막 힘을 다해,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의 가슴 높이까지 솟아오른 고기의 가슴지느러미 바로 뒤쪽 옆구리에 콱 꽂았다. 작살의 날이 고기의 살 속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는 작살에 기대어 그것을 더 깊숙이 박고 나서 자신의 온 무게를 실어서 밀어 넣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450kg짜리 청새치도 잡아본 경험이 있는 노인이었지만 이 녀석은 훨씬 거대한 놈이었다. 조각배에는 실을 수조차 없었기에 노인은 그놈을 배 옆에 묶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본능에 따라 출발했던 곳, 남서쪽으로 배를 저어가기 시작했다. 속은 매스꺼웠고 의식은 가물가물했기에 혹시 이것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손과 등의 통증이 노인에게 꿈이 아니고 현실임을 가르쳐줬다. 노인은 이 희생자와 마치 형제처럼 나란히 바다를 항해했다.

 

좋은 일이란 오래가는 법이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해피엔딩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단어였다. 상어는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녀석이 뿌린 먹구름 같은 시꺼먼 피가 상어를 불렀다. 그것도 덩치가 아주 큰 마코상어(청상아리)였다. 노인은 희망을 버렸다. 희망을 버리자 머리가 맑아졌다. 상어는 날쌔게 다가와 노인이 잡은 청새치의 살점을 뜯어갔다. 살점이 뜯기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노인은 상어의 대가리를 겨누어 두 눈을 잇는 선과 코에서 등허리로 똑바로 뻗어나간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작살을 푹 찔러 넣었다.

 

노인은 마코상어에게 물어뜯긴 고기의 살점을 잘라 질겅질겅 씹었다. 이번에는 두 마리의 갈라노(얼룩덜룩한 상어)였다. 노인은 덤비라고 외쳤다. 그리고 두 손의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으려 칼을 잡아맨 노를 움켜쥐고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상어들을 노려보았다. 

 

골과 척추가 연결된 갈색 머리통과 등 위의 선이 뚜렷이 나타났다. 노인은 그곳을 향해 노에 매어 놓은 칼을 푹 찌르고 난 뒤 뽑아서 이번에는 고양이 눈깔 같은 누런 눈알을 향해 다시 한번 더 내리 찔렀다. 상어는 고기에게서 미끄러지듯 떨어져 나가며 죽으면서도 물어뜯은 살 조각을 삼키고 있었다.

 

인생이 원래 그렇다. 힘든 일을 끝내고 나면 휴식이 아닌 더 힘든 일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청새치의 복수인 듯했다. 청새치가 넓고 깊게 뿌려놓은 피 냄새에 계속 상어 떼들이 달려들었다. 청새치의 살덩어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싸움의 와중에서 칼을 매달은 노도 잃어버렸지만, 노인은 결코 묶어 놓은 청새치를 풀어서 버리지 않았다. 청새치의 살덩어리를 잃을 때마다 배가 가벼워져 싸움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고 잃어버린 칼 대신 몽둥이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놈들과 싸우는 거지. 죽을 때까지 싸울 거야.” 그가 말했다.

 

계속되는 사투의 결과로 노인은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였고, 입속에는 마치 구리를 맛보는 듯한 느낌이 돌 정도로 탈진한 상태였지만, 기어코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에 도착한 노인은 자신의 판잣집에 도착할 때까지 다섯 번이나 쉬어야 했다. 그리고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졌다.

 

이튿날 마을의 어부들은 노인의 조각배에 묶여있는 5.5미터짜리 청새치의 뼈에 놀라 웅성거리고 있었다. 관광객 중 한 여자는 그 청새치 등뼈의 거대한 크기에 놀라 “저게 뭐죠?”라고 물었다. 부두 선술집의 웨이터가 ‘티부론(상어)’라고 말하자 여자는 “상어가 저토록 잘생기고 멋진 꼬리를 달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청새치는 잃었지만, 노인에겐 자부심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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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소년 ‘마놀라’의 격려와 위로 속에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자 꿈을 꾸면서......

 

 

파멸하되 패배하지 않는 인생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말할 수 없어도 왜 사는지는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그렇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행복할 것이라 믿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더 불행할 것이라 믿는다면 이 힘겨운 생을 지탱할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등 생명체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생존이 아닌 행복한 삶을 위해 살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보통 행복의 요소로 돈, 건강, 가족, 사랑 등을 이야기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심리적 상태를 간과한다면 그것은 나무 한 그루에 매몰되어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전체집합이 없는데 어찌 부분집합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전체집합의 이름이 바로 ‘자긍심’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위에 말한 행복의 요소 중 그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다. 자신도 싫어하는 존재를 타인이 사랑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자기 존재에 대한 긍지가 있을 때에만 그 존재가 빛나는 생명체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이 나에게 굴욕을 강요한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모욕을 감수하라고 말한다. 이들의 말대로 오늘 내가 무릎을 꿇어 내일 행복해질 수 있다면 무릎을 꿇으면 된다. 그러나 아니다. 나로부터 자긍심을 빼앗아 ‘착한 머슴’으로 만들려는 불순한 선동이다. 오늘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 내일인데 어찌 오늘의 나를 멸시하며 쌓은 시간들로 행복한 내일을 만들 수 있겠는가. 

 

맞서 싸워야 한다. 파업하지 않는 노동자, 파업할 줄 모르는 노동자는 그 누구의 존중도 받을 수 없다. 그의 통장에 찍히는 월급이 생존이야 유지해 주겠지만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공항에 직장 상사를 마중 나갔을 때 자신의 캐리어를 노룩 패스로 내게 던진다면, 자신이 소유한 회사의 비행기에서 일한다고 무릎 꿇고 라면을 끓여 오라고 한다면, 심지어 사장이 사무실에서 내 뺨을 때린다면, 어깨 펴고 가슴 내밀고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승산 없는 싸움이다. 모든 인생의 종착역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인생 마지막은 패배로 끝나게 되어 있다. 이 마지막 단 한 번의 멋진 패배를 위해 우리는 모든 부당한 굴욕과 모욕을 거부해야 한다. 파멸의 협박에 굴하지 말고 맞서 싸워야 한다. 

 

"그대가 자긍심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릇되다고 알고 있는 일을 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것보다, 옳다고 알고 있는 일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낫다."   

 

-윌리엄 존 헨리 보에커-

 

오늘도 나를 부당하게 모욕하는 것들에 맞서 힘겹게 선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든 분들께 경의를 표하며 일곱 번째 인생탐구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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