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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아침,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토요일이었다. 날씨는 맑았다. 아침 10시 무렵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나와 거실 바닥에 있던 리모컨으로 TV를 켜며 소파에 앉았을 때 MBC 뉴스 속보가 떴다. 그가 떠났다고. 잠시 뒤 아내가 방에서 나와 같이 뉴스를 보았다. 잠시 뒤,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다.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을 때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섬광기억'이라고 한단다. 미국인들이 9.11 테러의 소식을 접하던 때에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하던데, 내가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아마도 나에게 노무현의 죽음은 그런 정도의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청문회 스타 노무현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중학생이던 88년 5공 비리 청문회였다. 당시 청문회는 TV에서 생중계했는데 나 같은 중학생들에게 그런 게 재밌을 리가 없었다. 우리에게 당시 청문회는 학급회의 때 “증인은 블라블라”나 “증인! 위증하지 마세요!”라는 의원들의 말투를 흉내 내며 노는, 그저 어른들의 싸움 정도로만 소비되고 있었다. 그 청문회에서 노무현이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 던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가 명패를 왜 던졌는지보다는 그게 전두환을 맞혔는지 아닌지가 더 궁금했었다. 하지만, 그런 꼬마였던 나에게도 재벌들을 불러다 놓고 ‘권력에는 돈 주는 건 안 아깝고, 일하다 죽은 직원한테 주는 돈은 아깝냐’는 그의 질타는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절대권력을 가진 권부에게 5년동안에 34억 5천만원이란 돈을 널름널름 갖다 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주려고 일하다 죽은 노동자에게 4천만 원 8천만 원 주느냐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까? 그것이 인도적입니까? 그것이 기업이 할 일입니까?”

 

싸움의 본질

 

세월이 흘렀다. 그때 그 중학생이 자라 직장인이 되어 있었던 2002년,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지던 사람으로 기억하던 그 사람이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

 

그는 아주 낮은 지지율로 시작했다.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인제를 꺾고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되어 있었다. 당시 민주당의 주류세력은 기득권에 저항하는 사람을 불편해했다. 당내 경선에서 이겨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노무현을 흔들었다. 제대로 된 선거 캠프가 차려지기도 전에 한동안 다른 후보로 교체해야 상대 후보를 이긴다는 주장이 계속 나왔다. 최근에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된 사람들이 민주당에 대해 찐따같다며 답답해하는데, 민주당은 원래 그랬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당이다. 당시 개혁국민정당 소속 문성근의 연설을 들어보면 그때 민주당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도대체 이게 뭔 지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뭔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노무현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게 되었다. 지금 개딸이나 냥아들이 하고 있는 바로 그거다. 그 과정에서 당시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까지도 노무현한테 왜 저러는지, 조선일보와 그 친구들은 왜 노무현을 없애고 싶은 건지,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유시민이 쓴 책의 머리말을 읽었을 때, 비로소 이 싸움의 본질이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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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통의 경우 편 가르기보다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믿는다. 그러나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싸움과 관련해서는 이런 고전적 처세술이 통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싸움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독재와 반독재 같은 거창한 이념의 틀이 아니라 그냥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에 불과한, 그런 '시시한' 싸움이었다. 그동안 벌어진 복잡해 보이는 수많은 사건은, 맥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니 누가 상식적인 주장과 행동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단순한 사건들이었다. 단지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다를 뿐이었다. 그 싸움에서 노무현은 입장이 아닌 상식을, 그것도 거대한 정치-검찰-재벌-언론의 기득권 동맹에 맞서서 씩씩하게 상식을 따라 행동하던 아주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도 정치검찰의 광대를 자처하는 언론의 조잡한 몸짓에 맞춰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는 주정뱅이들의 저잣거리 조리돌림을 실컷 당한 후에.

 

그날 노무현의 죽음은 '몰상식의 승리'였다.

 

노무현의 시대

 

2002년, 노무현은 노무현의 시대를 예견했다. 그날이 오면 본인은 없을 것 같다는 예감도 덧붙였다. 그런 세상이 오기만 하면 되지 거기에 본인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담담한 예지도 남겼다. 

 

 

문재인의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을 보면, 문재인 정부의 많은 정책은 노무현 정부의 경험과 교훈을 바탕으로 운영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하던 것을 일부는 거의 완성했고, 일부는 하다가 말았고, 일부는 시작도 못 했으니, 우리는 '노무현의 시대' 중 일부를 체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민족이나 사회가 공통으로 겪은 경험을 공유하며 보존하는 것을 집단기억이라고 한다. 집단기억은 사회질서를 정당화하고, 구성원의 정체성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집단에 대한 자부심을 불러일으켜 그 집단에 대한 역할과 책임을 수행하는 동기를 준다.

 

노무현과 같은 시대를 살며 그의 생각이 담긴 말과 글, 그의 꿈이 담긴 정책을 지지했던 나로서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나 따위가 용서하지 못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그를 투신하도록 몰아갔던 권력의 행태를, 노무현이라는 ‘모난 돌’을 어떻게든 깨부수려던 조폭 언론의 저열함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에게 계속 전달하고 대물림하여, 그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집단기억으로 만들어지면 언젠가는 노무현의 시대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반작용

 

13년 전 김어준은 노무현에 대한 추모글에서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라고 했다. 당시에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였던 것을 '정치 예능'이란 듣도 보도 못한 장르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었고, 그 사람들이 결국 문재인 정부까지 만들어냈으니 그 정도면 ‘어떻게든’ 해낸 거다.

 

그런데,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노무현을 투신하게 만든 13년 전의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문재인을 겨냥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치러졌던 많은 선거에서 ‘문재인을 지키겠습니다’라는 구호를 걸었던 자들이 앞으로 문재인을 지킬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안됐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이 문재인을 지킬 방법은 거의 없을 거다.

 

13년 전에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지금의 20대는 대체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우리 세대가 느꼈던 충격은 없을 거다. 어쩌면 그들에게 노무현은,

 

'노무현이 자주 가던 칼국수집까지 뒤지고 다녔던 검찰과, 논두렁에 고급시계를 버렸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한 국정원과, 그의 집을 24시간 망원카메라로 감시하며 모욕주던 조폭 언론의 폭력'

 

이라는 전체적인 맥락이 포함된 '진실' 대신에,

 

‘뇌물수수혐의로 수사를 받다 자살한 전직 대통령’

 

이라는 겉으로 보이는 단편적인 ‘사건’으로만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노무현에 대해 기억하는 것처럼, 지금의 20대도 노무현을 기억해서 우리 사회가 집단기억을 형성하기를 바라지만, 그런 얘기를 직접 하는 건 아마도 내가 20대 때에 어른들이 전쟁과 보릿고개를 얘기하는 것처럼 너무 먼 얘기로 들릴 거다.

 

다만,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다. 앞으로 검찰정부의 노골적인 폭력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그동안 잠시 잊었던 노무현에 대한 집단기억을 스스로 찾아 학습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혹시나 문재인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해본다.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은 오늘의 싸움도, 노무현이 대통령 선거에 나선 20년 전 그때와 부엉이 바위에 섰던 13년전 그날과 같은,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상식만 있으면 누가 맞는 말을 하는지, 누가 개소리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싸움

 

노무현의 시대를 일부나마 체험했던 지난 5년을 돌아본다. 아마도 한반도에 발을 딛고 살았던 수천 년 역사에서 가장 훌륭했던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진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던 나의 어린 시절과 달리, 우리 아이들한테선 그런 류의 동경이나 열등감이 없다. 그래서 지난 5년은 멋진 나라였다. 이것이 긍정적인 집단기억으로 남으면 우리 사회가 과거로 후퇴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지만, 다시 돌아온 그들이 두고 볼 리가 없을 테니, 노무현이 하던 싸움을 김어준은 계속 이어갈 거다.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은 몰상식한 자들이 기득권을 가진 한 끝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무관심은 대체로 몰상식의 편이 된다. 이 싸움은 단순하면서도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계속 지다 보면 지난 5년의 화려했던 역사는, 그저 전설로만 남게 될 거다.

 

40대 초반의 김어준이 50대 중반의 김어준이 되어, 아직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걸 보면, 약간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별일이 없는 한 김어준은 다음 정부에서 환갑을 맞이하게 될 거고 언젠가는 지금의 예리함도 많이 무뎌질 거다.

 

세월이 지나면 또 다른 유시민, 또 다른 김어준이 나타나겠지만, 나는 우리의 영웅 캐릭터가 세상을 해석해주기를 바라기보다는 우리가 스스로 유시민, 김어준의 방식으로 '공정하게 편파적으로' 세상을 해석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깨어있는 시민이 다수가 되는, 진정한 노무현의 시대가 되어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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