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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5월

 

5월은 슬픈 달이다.

 

5.16, 5.17 두 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광주의 비극이 있었다.

딴지일보의 영원한 정치부장 물뚝심송님이 돌아가셨고

그리고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정치인이었던 그가 서거한 달이다.

 

2009년 : 트라우마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수험생이었던 나는 아침 8시쯤 독서실에 왔지만, 공부하기 싫어 휴게실에서 인터넷을 하며 놀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9시가 되기 조금 전에 자리로 돌아왔다.

 

10분 정도 인강을 듣고 있었을까. 같은 독서실에 다니던 친구 녀석이 벌게진 눈으로 내 자리에 오더니 노트에 '돌아가셨다' 5글자를 적고 울음을 삼키는 것이었다. 나는 입 모양으로 '누가?'를 물어보았지만, 친구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오열하면서 열람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니 아침에 읽었던 인터넷 뉴스에서 탤런트 여운계 씨가 별세했다는 기사를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게 저렇게 슬퍼할 일일까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렇게 슬퍼하면서까지 알려줄 만한 죽음은 떠오르지 않았다. 열람실 밖에 나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비극이 일어났음을...

 

그 해 초부터 돌아가는 소식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는 있었다. 전달에는 봉하마을에 있던 그를 서울까지 소환조사하며, 헬기까지 보내 굴욕적인 모습을 생중계했던 것도 보아 알고 있었다. 그는 흰머리가 늘어 늙고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인간적인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내 앞날이 급한 수험생이었다.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연일 계속되는 부정적인 언론보도와 이렇다 할 변명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설마 하면서도 좀 더 지켜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노무현은, 잘못이 없다면 억울함을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이고, 잘못이 있다해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MB와 검찰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에 반대하는 촛불집회로 곤욕을 치른 이명박은, 그 집회의 배후에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는 의심을 갖고 주변 사람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자금줄을 캐겠다며 양초 만드는 회사나, 노 대통령이 즐겨 찾던 삼계탕집까지 세무조사를 실시했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미 그때는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먼지 털이식으로 수사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별건으로라도 기소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묻는 대체역사러들에게 답변해 주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꿩 대신 닭이라고, 대신 타깃이 된 한명숙 전 총리처럼 그도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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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노무현의 편지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알았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그렇듯, 청문회 스타로 등장했다가 줄을 잘못 선(?) 바람에 낙선을 거듭하는 불운한 정치인 정도의 이미지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2000년 총선. '또' 패한 노무현에게 막 생겨나던 인터넷 민심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도 학생 신분이었지만 노무현 의원의 홈페이지였던 노하우(노무현과 하나 되는 우리라는 뜻)에 글을 남겼고, 만원 정도 후원금을 보냈다. 그리고 두 달 뒤쯤, 야인이 된 노무현 전 의원에게서 답장(?)이 왔다.

 

안녕하십니까, 노무현입니다.

보낸사람 노무현 <mhroh@hanmail.net> 

 

안녕하십니까. 노무현입니다.

답신이 늦어 죄송합니다.

 

제가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한 선거에 패하고 나서 아픔도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저를 믿고, 도와주시고,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참으로 미안하더군요.

 

이때 선생님의 저에 대한 격려의 글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홈페이지에 워낙 많은 글이 실려 전부 출력해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돌려보았습니다.

 

글쎄, 뭐랄까요.

감동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제가 헛되게 산게 아니구나, 제 선택은 옳았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옛말이 있지요.

우리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제게 무엇을 바라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란 말이 생각납니다.

제게 보내주신 이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 변치 않으려 합니다.

 

마음을 글로 전한다는게 참 어렵네요.

 

이 소중하고, 귀한 인연.

헛되이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가장 아름다운 인연으로 가꾸고 키워보려고 합니다.

 

최근 인터넷을 매일 한 시간 이상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공부할 자료들,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많이 도와주십시오.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저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졌으면 합니다.

성심껏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6월 6일은 정치인 최초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팬클럽이 행사를 해서 대전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덕분으로 '바보 노무현'이 '행복한 노무현'이 될 것 같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노무현 드림 -

 

수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보낸 일종의 스팸메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정치인과 인터넷으로 소통하고 피드백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가 결성된 이유는, 그의 바보 같은 정치 행보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소통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을 모여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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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 그의 바람

 

2002년 대선은 개인적으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대통령선거였다. 2002년 초의 분위기는 요즘 쓰는 말로 하자면 '어대창(어차피 대통령은 이회창), 어후제(어차피 후보는 이인제)'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회창, 이인제 대세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깨고 국민통합을 할 수 있는 후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거대 언론에 맞서 할 말은 하는 후보, 고졸 출신으로 학벌 지상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후보라는 점에서 노무현은 시대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매력적인 후보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국민참여경선이라는 히트작이 결합하며 노무현 바람, 소위 '노풍'이 불기 시작했다. 광주 경선에서 노사모의 활약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가져온 노무현 캠프는, 이인제의 시대착오적 색깔론마저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와 같은 진정성 넘치는 멘트로 받아치며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이후 노무현 후보는 YS시계사건, 지방선거와 재보선의 참패, 후보교체론과 단일화 압박 등 무수히 많은 고비를 넘나들었고, 나는 인터넷 지지 글과 희망돼지 후원금을 보내며,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밭갈기 영업을 하는 개미 지지자 중 하나가 되어 월드컵보다 뜨거운 2002년을 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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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의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2002년 12월 18일, 그러니까 선거 전날 밤이었다. 친구들과 노무현 유세를 보고 맥주를 한잔 마신 뒤, PC방에 들러 게임을 하려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는데,

 

초기화면에 띄워진 포털 뉴스에 정몽준이 노 후보 지지를 철회할 것 같다는 속보가 굵은 글씨로 떠 있었다. 선거 운동 종료 2시간 전쯤이었다. 게임은 물 건너갔고 뉴스 속보로 나오는 정몽준 측 김행 대변인의 성명을 보는데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싶었다.

 

맥이 탁 풀리면서, 우리나라는 정말 희망이 없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다음날 나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내며 한 표를 호소했다. 노무현에게 냉담하던 TK 출신 친구와는 한 시간을 붙어 설득하며 투표소까지 데려가기도 했다.

 

대망의 오후 6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TV가 없어 인터넷으로 VOD를 보는데 카운트다운 도중에 버퍼링이 되었고, 버벅거리는 동안 멀리서 '와~'하는 함성이 들렸다. 그사이 다시 켜진 VOD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에 2% 정도 앞선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2004년 : 매를 든 도둑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나라는 대통령에게 맡기고 학생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건 아니고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몸담고 있던 새천년민주당이 분당되어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직업정치인도 아니고 학생일 뿐이던 내가 할 일은 딱히 없어 보였다. 이듬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찍어야겠다는 정도의 막연한 생각뿐. 그렇지만 정국 상황은 생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2004년 3월, 노무현이 떠난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연합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였다. 사유는 여러 가지였으나, 측근 비리를 제외한다면 노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에서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것, 그리고 대선 당시 노무현 캠프에서 약 113억 원에 달하는 불법 자금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소위 '차떼기' 방식까지 사용해 조달한 당시 한나라당의 불법대선자금은 823억 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 측에 너희는 잘못이 없느냐고 항의하자, 노 대통령이 자신의 불법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10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밝혀진 불법 자금이 한나라당의 (1/10을 넘어) '무려 1/7'에 달했는데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원수로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다른 데도 아니고 '차떼기 정당' 한나라당에서 묻는다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있을 수 없었지만,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야당 연합은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국회의장의 경호권을 발동하여 본회의장에서 농성 중이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낸 뒤 압도적인 다수의 힘으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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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사지가 번쩍 들려 끌려가던 유시민 의원, 사자후를 토하던 정동영 의원, 나라 잃은 표정으로 애국가를 부르던 김근태 의원 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중계되었다. 학생 식당에서 밥 먹다 그 장면을 본 나는 알 수 없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같이 먹던 친구는 아마 내가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나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엄청난 탄핵의 역풍, 촛불의 회오리바람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은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에도 한나라당과 조중동, 검찰까지 합세한 보수 대연합은 노무현을 무던히도 괴롭혔고 그들의 횡포는 노무현에서 문재인을 거쳐 이재명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가끔 2004년 촛불집회 때 열심히 부르던 윤민석 작곡가의 '너흰 아니야' 노래가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언 18년이 지났지만 '너흰 아니야'의 대상이 아직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아프고 괴롭다.

 

그래 너희들이 말하는대로 대통령은 물러나야 할지도 몰라

일가친척 측근 가리지 않고 검은돈 받아 챙겼을지도 모르지

노동자 농민은 죽음으로 외치고 서민은 카드빚 때문에 목을 매는

이 개같은 세상 거꾸로 된 이 나라 누군가는 바로 잡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너흰 아니야 xxxx 너흰 아니야 너흰 나라를 걱정할 자격 없어

채권에 사과상자에 이제는 아예 트럭채 차떼기로 갈취하는 조폭들

그래서 너흰 아니야 xxxx 너흰 아니야 제발 너흰 나라 걱정 좀 하지마

너희만 삥 안 뜯어도 경제는 살아날거야 xxxx 너희들은 아니야

 

2022년 : 노무현 없는 노무현의 시대

 

그가 떠난 지 13년이 지났다. 검찰 그 자체인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비서실의 비서관까지 검찰 출신들이 장악하는 검찰 공화국 시대가 열린 것 같다. 참여정부 때, 그리고 촛불혁명을 통해 우리가 만들려던 세상이 이런 거였나 싶다.

 

앞으로 5년, 검찰 공화국을 만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정의와 공정의 이름으로 법치의 칼날을 휘두를 것으로 예상되며, 그 칼날의 끝에는 대개 윤석열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그동안 검찰의 정의는 조직 논리와 정무적판단에 입각해 선별적으로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다시 기레기 언론은 자극적인 기사로 검찰의 언플을 확대 재생산할 것이고, 피의자가 된 사람들은 유무죄를 떠나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른다.

 

허무하다. 2002년 선거 전날 밤 PC방 그때처럼, 맥이 풀린다. 자다 깬 꿈처럼 허공으로 연기로 사라지는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공허함이 무겁게 내려앉은 5월이다. 노무현이란 사람이 우리 곁에 정말 있긴 있었던 걸까.

 

22년 전 그의 편지를 다시 한번 꺼내 읽어본다.

 

글쎄, 뭐랄까요.

감동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제가 헛되게 산게 아니구나, 제 선택은 옳았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옛말이 있지요.

우리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제게 무엇을 바라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란 말이 생각납니다.

제게 보내주신 이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 변치 않으려 합니다.

 

우리가 원했고, 그가 원했던 세상. 그것은 과연 이룰 수 없는 꿈인가. 바위에 내쳐진 계란인가. 

 

그가 남긴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그가 몸으로 부딪쳐 일깨워준 저들의 야만에 대한 기억, 다수의 의석과 절반에 가까운 지지자,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 5년을 통해 훈련된 경험, 무엇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시퍼런 눈. 흐르는 길이 험해 잠시 돌고 있을 뿐, 강물은 계속 바다를 향해가고 있다. 노무현 없는 노무현의 시대. 우리는 분명 거기에 살고 있다.  

 

그의 삶이 헛되지 않게 하고 싶다.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다. 그의 진정한 친구였던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슴 한구석이 다시 뜨거워지는 5월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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