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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의 격

 

“자 여기 순서대로 첫 경험 언제인지 얘기해 보세요.”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이윽고, 

 

“그거 얘기하기 좀 그러면 첫딸(소위 딸딸이라고 하는 자위행위를 표현하는 속어)은 언제였는지 얘기해 봅시다.”

 

놀랍게도 이 얘기는, 대사관에서 일을 시작하게 될 신입사원을 환영회 때, 한 외교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어떻게 하면 저런 얘기를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맨정신으로, 그것도 처음 일을 시작한 직원을 앞에 두고 할 수 있을까 의아했다. 해당 외교관의 만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몇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한 영국 외교관 왈, 모 행사에서 마주한 해당 외교관은 자신의 부인이 부부관계를 거부해 힘들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사석도 아닌 공식적인 자리에서 상대국 외교관을 두고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질 않겠지만, 두 눈과 귀로 보고 들은 일이다. 그리고 먼 훗날 들려온 이야기 하나 더. 

 

지난 2019년 4월, 우리나라와 스페인과의 전략대화 행사에서 태극기가 많이 구겨진 채 게양이 돼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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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그냥 보기에도, 네모반듯한 자국이 미리 준비해서 게양을 한 게 아닌, 보관함에서 바로 꺼내어 게양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논란의 여지가 없이 이는 사전 행사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업무량이 많고 적음을 떠나, 국기를 게양하는 건 아주 기본적이며 중요한 일임에도 이런 실수를 한다는 건 납득이 어려운 사례다. 

 

태극기 보관은 원형이 손상되지 않게 보관해야 하며, 구겨짐 혹은 기타 원형이 손상되었을 경우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다림질을 한 후 게양하는 게 원칙이다. 

 

이는 총리 훈령 433호에 나와 있는데, “국기가 훼손된 때에는 방치하거나 다른 용도에 사용해서는 안 되며 깨끗하게 소각해야 한다. 때가 묻거나 구겨진 경우에는 국기의 원형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를 세탁하거나 다려서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때문에 당시 여론은 들끓었고 각종 언론들도 나라 체면이 구겨졌다며 엄청난 비난 세례를 퍼부었다. 이내 외교부 장관이 직접 사과 발표를 해 일단락됐다. 

 

2019년, 아주 잠깐이지만 온 국민을 창피함에 몰아넣은 ‘구겨진 태극기 논란’의 담당자 중 한 사람이 바로 그 외교관이었다고 한다. 평소 정해진 규율이나 구태의연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며 격의 없음을 자부해 온 그 외교관은 결국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가면을 쓰고 국가 망신을 시켰던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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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태극기를 손으로 펴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어떤 사람은 형식적인 것 보단 실질적으로 나눈 대화가 무엇이고, 얻은 건 뭔지 등 실리적인 게 더 우선이지 의전(儀典)이 뭐 그리 중요한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각 국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고 각기 우선순위를 비롯해 전통이나 문화 등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약속된 하나의 방식이 없다면 국제 외교는 상당히 혼란을 빚을 것이다. 그 약속된 하나의 방식이 국제관계에서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인 의전이다. 

 

때문에 타 국과의 관계에서, 정해진 절차와 순서에 따라 일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국가 간의 행사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여권의 경우만 해도 겉표지부터 속지 등의 디자인은 다 다르지만, 내용(사진, 이름, 생년월일, 발행일자 등)은 통일되어 있다. 국가 간에 약속된 하나의 시스템인 것이다. 

 

대통령의 격

 

윤석열 대통령은 중앙지검장 시절 평검사들과도 격없이 지내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후 검찰총장이 된 그는 자신을 지휘하는 부처장이었던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의 관계도 스스로 격없이 만들어 버린 최초의 검찰총장이 되었다. 당시 추 장관에게 항명하며, 그는 희대의 명(?)대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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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시사저널>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 분립의 나라이며, 검찰은 행정부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법무부 산하 기관 중 하나로 속해있다. 대검찰청의 장인 검찰총장도 법무부 장관의 지휘 아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시스템이다. 요즘 누가 ‘부하’하는 말을 쓰겠느냐마는 엄밀히 따지면, 당시 윤 총장 스스로 칭한 ‘부하’가 맞다. 

 

이후 그는 검찰을 나와 정치에 뛰어들었다. 문재인 정권이 부동산 가격을 올려 내 집 마련을 막은 이유는 사람들이 내 집을 갖게 되면 보수화가 되기 때문이라는 등의 막말을 하면서도 기어코 대통령에 당선된 그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청와대만큼은 단 하루도 안 들어간다며 급작스럽게 용산을 집무실로 정하고 국방부 직원들을 일시에 내보내며 안보와의 격을 허물었고, 북한과의 긴장을 가장 걱정한다면서 지하벙커 위치를 노출시키고, 국방부 예산을 1조 5천억 원이나 깎으며 북한과 격의를 허물었다. 또한 서초구 자택에서 출퇴근으로 시민 출퇴근길에 민폐를 끼치며 시민들과의 격의를 허물었다. 최근에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다음 날 늦은 밤에 거나하게 술 취한 사진이 보도되며 알코올과의 격도 허물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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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그래서였을까. 외교에서도 그의 행보는 격의 없는 파격 그 자체였다. 얼마 전 한미정상회담 기간에 윤석열 대통령이 미 국가 연주 중 가슴에 손을 올린 행동은 충격 그 자체였다. 국내에서야 어떻게든 물고 빨아주는 보수언론 덕에 그나마 커버가 되겠지만, 외교에서의 의전 무시는 망신 중에 그런 개망신도 없는 일이다. 나름대로 상대국에 대한 예의라며 좋게 포장은 했지만, 아직까지 타 국의 국가가 연주되는데 예(?)를 표한 지도자가 없었던 걸 생각하면, 역대급 타국 정상과의 격의를 허물었던 의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격의 없는 대통령의 영향력

 

이렇게 전방위로 격을 허물던 그가 세계적인 잡지인 TIME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100인’에 들어갔다고 한다. 

 

총 6분야 – 아티스트(Artists), (혁신가)Innovators, (위대한 인물)Titans, (지도자)Leaders, (상징적 인물)Icons, 선구자(Pioneers) – 로 나뉘어진 이번 100인 선정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도자’ 부문에서 선정되었다. 

 

이미 많은 분석 기사들이 흘러나왔지만, 반응은 반반이다. 대단하다 혹은 별거 아니다. 혹자들은 진영 논리에 따라 평가가 나뉠 수 있다고도 한다. 때문에 보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해당 타임(TIME)이 어떤 기준으로 올해의 100인을 선정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필수적이다. 

 

타임은 자신들의 선정기준 및 지표(barometer)로

 

‘누가 눈에 띄는 이슈를 가져다주었는가 혹은 가져다줄 것인가?’

 

에 집중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선정 그 자체로 좋은 의미인지, 그 반대일지에 대한 평가는 배제되어있다. 

 

결국, 선정성(煽情性)이 있는가에 따라 선정(選定)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선정(選定)된 것 자체보단, 왜, 어떤 이유로 선정(選定)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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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IME> 홈페이지

 

가령,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100인에 선정된 중국의 국무원 부총리 ‘쑨춘란’(孫春蘭, Sun Chunlan)의 경우, 시진핑의 총애를 받고 있는 유일한 여성 간부 - 다른 여성 간부의 경우에 대부분 남자 간부의 부인인 경우가 많다 – 이며, “제로 코로나” 정책을 펼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녀는 2,6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도시 상하이를 주도적으로 봉쇄 조치하며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데, 이를 감안하면, 과연 이 100인에 속하는 게 좋은 일인지는 따지고 봐야 할 일이다. 시진핑이라는 거대 권력에 충성하며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압적인 정책가가 과연 긍정적인 측면에서 선정이 된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100인 선정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타임지는 윤석열을 선정한 이유로 여러 가지를 나열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포퓰리스트((populist) - 정치적인 야망을 달성하고자 대중의 인기만 신봉하는 자'

 

로 규정한 점이다. 이와 함께 반페미니스트 여론에 기댄, 성평등에 반대한 목소리를 냈던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특히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분열을 일으킨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를 잘 봉합하는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추가로, 대북 관련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과거 문재인 전 대통령과 어떤 차별화된 정책을 펼쳐나갈지에 대한 행보에도 귀추가 주목된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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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국민에게 격의 없음은 통하지 않는다 

 

외교 의전에서 회담의 격(格)과 형식은 기본 중 기본이다. 나라와 나라가 격을 맞춤으로써 서로를 존중하는 일이어서다.

 

2017년 4월 8일 자 중앙일보 칼럼<'격의없다'는 덕목, 국가 간에는 통하지 않는다>(링크)의 한 대목이다.

 

그르타. 백번 옳은 말씀. 그런데 왜, 남의 나라 국가 연주 중에 가슴에 손을 올리는 윤 대통령의 파격적 행보에 대해선 이렇게 엄중한 소리 하는 자가 없는지. "상대국에 대한 존중의 표시"였다는 대통령실의 말 같지도 않은 해명에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왜 모두 먼 산만 보는지.

 

5년 전에 위 칼럼을 쓰신 중앙일보 김수정 논설위원님은 현재 다른 이슈에 더 바쁘신지, 아직 엄중한 시선을 보여주지 않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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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사회에서 유연한 사고를 유도하기 위한 상급자의 격의 없는 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신분제 사회였던 우리에게 윗사람의 격의 없음은 마친 대단한 기득권을 포기하는 넓은 아량과 인품으로 느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옛날이야기고. 지금 우리 사회는 격의 없음과 예의 없음, 혹은 개념 없음은 엄연히 구분하고 사는 곳이다. 가뜩이나, 단어 하나 손짓 하나에 예민하고 막중한 의미가 부여되는 외교 무대에서 격은, 시작이자 끝이다. 냉철한 국제 관계 속에서 외교의 격은 국민 모두의 안전을 담보한 전선 같은 것이다. 말 한마디로 전쟁이 날 수도, 막을 수도 있는 게 외교다.

 

격의 없는 것이 미덕이 되는 것은 윗사람이 권위를 거두고 아랫사람을 존중할 때다. 국가의 수장이 격을 허물고 외교무대에 나서는 것은 무례나 망신에서 그치지 않는다. 회복할 수 없는 국가의 손해, 더 나아가 국민의 안전까지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위험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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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리가...

 

5년 전, 중앙일보 김수정 논설위원님의 명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더불어 중앙일보 편집국은, 이런 눈 밝은 언론인이 예전처럼 우리 정부의 외교 센스에 대해 더 심도 깊게 다룰 수 있도록 독려해주길 바란다. 아무렴, 용산 공원 개방 이슈가 그것보다 중요할까. 

 

우리는 격의 없이 어울리는 사람의 인성을 ‘덕목’의 범주에 넣는다. 하지만 국가끼리는 아니다. 격을 따지는 건, 친미냐 반미냐, 친중이냐 반중이냐, 친일이냐 반일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 국민 자존심의 문제다. 천하이 같은 외교관이 우리 정·재계를 ‘휘젓고’ 다니게 만든 건 우리 책임이다. 오는 10일 우다웨이 대표의 방한길에 천하이 부국장이 동행한다고 한다. 그가 또다시 우리 외교의 자존심을 훼손하는지, 누가 그 옆에 기대어 사진을 찍는지 지켜볼 참이다. 

 

   2017년 4월 8일 <'격의없다'는 덕목, 국가 간에는 통하지 않는다>(링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