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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어의 결점에서 시작한 일본어 공부

 

일본에 호기심이 생긴 건 한국어 때문이다. 동기가 된 삶의 조각들이 있다.

 

조각 1.

 

고등학생 때다. 대입 시험을 통해 고향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성문종합영어>, <맨투맨> 등 여러 참고서를 들춰봤다. 하루는 EBS의 영문법 맛보기 강의를 들을 때였다. 그때 강사 말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영어 문법이 어려운 이유는 문법 용어들이 일본에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문법(文法)'이란 단어 자체를 일본인이 만들었어요. 가령 to부정사(不定詞)라고 할 때 '부정사', 이런 단어들은 일본식 조어에요. '사'는 변호사, 판사같이 역할에 부여하는 것입니다. 부정 즉 정해지지 않은 채 다양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붙인 용어가 '부정사'입니다. 부정사란 낱말 자체가 직관적이지는 않죠? 한국인 정서에 맞지 않는 일본식 단어이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그 후 교과서 용어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 필자의 머리를 덜 탓했다.

 

조각 2.

 

대학교 전공인 심리학 수업 중에 '가치중립성(과학이 객관성을 지니기 위해 가치 판단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태도)'이란 단어를 여러 차례 마주쳤다. 그리 어려운 개념도 아니고 여러 번 언급된 용어인데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어 원서를 보다가 납득했다. 가치중립성은 'value free'의 번역어다. '가치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다. 영어 원서 단어를 확인하니 막혔던 개념이 머리에 쏙 들어왔다. 기껏해야 1년간 미국 어학연수를 한 게 전부인 필자가 한국어보다 영어로 개념이해가 쉽다는 건 문제다.

 

value free를 가치중립으로 번역한 게 문제다. 가치중립(中立)은 '두 가치의 가운데 선다'는 뜻을 암시한다. 두 가치의 중앙값을 내포한다. 가령 선과 악이 있다면 정가운데 있는 상태가 가치중립성이다. 이건 선하거나 악한 상태이지 선함과 악함을 벗어난 상태는 아니다. 원 단어(value free) 뜻과 다르다. 이런 단어들을 만날 때마다 필자는 께름칙했다.

 

'가치중립'은 일본에서 들어온 낱말일 터이다. 일본어 사전에도 '가치중립(價値中立)'이 나와 있다. 수많은 학계 용어들이 일제시대 일본에서 들어와 지금도 학교뿐 아니라 일상에서 쓴다. 일본인들은 가운데 중(中)과 설 입(立)을 다양한 단어에 활용한다. 서울시 '중구(中區)'는 일본이 만든 지명이며 '입장(立場)'이란 단어도 일본에서 들어왔다. 아래는 일본인이 만들어 한국인·일본인이 함께 쓰는 어휘 일부다.

 

주식·회사·연애·개인·사회·문화·자연·자유·공간·시간·평등·권리·인권·정의·의무·도덕·경제·대통령·민주주의·공산주의·긍정·부정·능력·정치·전화·방송·발명·생산·실내·중심·공원·기관·물질·사진·과학·철학·우편·운동·야구·유격수·복지·진화·간부·만년필·영화·공항·숙제·산소·수소·교육·대학·매상·소포·수입·건물·선불·후불·수하물·엽서·입장·조합·추월·취급·할인·합승·견적·각서·시합·주식·충치·할증·계주·역할·할인·수당·개시······.

 

새로운 일본인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 

 

"너네 그거 알아? 일본어 '비묘우나산카쿠칸케(微妙な三角関係)'가 한국어로 '미묘한 삼각관계'인 거?" 

 

이런 표현 음가가 흡사한 걸 들으면 다들 우리가 아는 일본의 리액션 "에~~"를 한다. 이어서 '가방'이 일본어 '카방'이고 '구두'가 쿠츠'인 거까지 설명하는 레퍼토리다. 일본어를 처음 배울 때 음가가 대동소이한 단어들이 많은 게 '두 나라 언어 구조가 흡사하고 한자문화권이라서'라고까지만 여겼다. 이제와 생각하니 소릿값이 비슷한 단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일본인이 만든 단어들을 한국인이 고스란히 쓰기 때문이다. 씁쓸한 마음으로 다음에 일본인 친구들을 만나면 이런 설명을 덧붙여야 하나 싶다.

 

번역은 그 자체로 원작의 의미손실이 일어나는 작업이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의 쿠션을 한 차례 맞고 들어온 번역어들을 사용하다 보니 의미손실이 더 크다. 언어란 본디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 일본산 단어들을 다른 외래어들처럼 쓰면 되지 않겠나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일본제 단어들은 1800년대 구한말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한국인들이 고민할 시간 없이 수용했다는 점이다. 일본식 단어들은 일본인들의 생활 습속(習俗) 안에서 탄생한 단어들이다 보니 한국 문화 맥락과 잘 맞지 않아서 확 들어오지 않는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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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문제가 가슴에 걸려서 모국어인 현대 한국어를 그 뿌리부터 한번 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한국어는 1854년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1854년 미 해군 제독(태평양 함대 사령관) 매튜 C. 페리가 흑선(黒船)을 타고 일본에 와서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을 맺는다. 일본이 미국과 수교를 맺자 러시아·프랑스·영국 등도 열도에 손을 뻗친다. 그 후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한다. 

 

2. 메이지 정부 주도 '번역주의'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일본은 장인정신(또는 오타쿠 정신)을 번역에서도 발휘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년) 직후 정부 산하 번역국을 만든다. 메이지 원년(1868)부터 1882년까지 15년간 일본인들이 번역한 서양 서적은 1,410종이다. 일본은 서양 책을 통해 그들의 철학·과학·기술을 빨아들인다. 풍부한 인적 자원이 주요했다. 서양에 유학하고 돌아온 일본인은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에 160여 명에 달했다. 1890년경까지 3,000명을 넘었다. 

 

19세기 후반 일본은 기회와 운이 따랐다. 서구는 서구대로 제국주의 속에서 주도권 경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크림전쟁(영·프vs러, 1853~1856), 남북전쟁(미 남부vs북부, 1861~1865), 보불전쟁(프vs독, 1870~1871)을 치르느라 극동(Far east)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그 틈새를 살린 건 한·중·일 중 일본이 유일하다.

 

책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낯선 개념들을 번역하며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5~1901)는 다양한 단어들을 번역한 대표적인 선구자(先驅者)다. 그는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공부하였다. 탈아입구(脱亜入欧)를 표방한 사상가이다. 갑신정변·삼일천하로 알려진 급진 개화파 김옥균의 조언자이자 일본 1만 엔권에 새겨지기도 했던 인물이다. 자유(自由)·경제(經濟)·연설(演說)·사회(社會)·문명(文明) 등은 그가 만든 조어이다. 도쿄 게이오(慶應)대학 설립자이기도 한데 게이오대학은 와세다(早稲田) 대학 라이벌로서 두 대학은 한국 연고전처럼 정기적으로 "소케이센(조경전, 早慶戦)"을 치른다. 최초 미국 시민권자 서재필(Philip Jaisohn)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아 서구 언어의 한글 번역에 관심을 기울였을 정도로 개화기 일본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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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1월 1일부터 발행하여 2024년 상반기에 교체될 예정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들어간 1만 엔권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은 외국어 단어 하나를 새로운 일본 단어로 나타내려고 고심을 거듭한다. 여러 개 단어들을 혼용하다가 점차 한 단어로 좁혀 가기도 하였다. 가령 과학(科學, science)이란 단어도 학문(學問)·기예(技藝)·지혜(知慧)·지식(知識)·박학(博學)·이학(理學) 등 여러 단어들과 경합했다. 1880년이 지나면서 과학으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쓰인다. 

 

요즈음도 번역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런데 발달한 사전도 없던 시절 구미(歐美)에서 들어온 새로운 개념어들을 번역했을 작업을 상상해보라. 낯선 개념들을 이해한 후 새로운 단어로 창작까지 해야 했다. 개념어 하나가 일본어로 번역되기까지 짧게는 20여 년, 길게는 40여 년 기간이 걸렸다.

 

가령 일본 지식인들은 society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처음에 몰랐다. 나라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society'라는 개념은 당시 동아시아에 없었다. 기존에 쓰이던 단어인 '세상'이라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는 너무나 일상적이었다. 기존 단어 뜻과 섞이어 오용되는 것을 막고자 지식인들은 모일 사(社)와 모일 회(會)를 합쳐 '사회(社會)'를 조어(造語)한다. 이 단어가 정확히 society 뜻을 반영한다는 확신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세간(世間)에 정착되기를 바라며 던진 셈이다. 일종의 모험이었다.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적 개인(個人)이란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individual'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고심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individual' 개념을 받아들이는 세계관의 한계를 느끼며 번역을 보류하기도 했다. society나 individual은 당시 일본 현실에 존재하던 게 아니다. 앞으로 현실에 조성(造成)해야 하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더욱 번역하기가 까다로웠다. 

 

일본 지식인 일부는 19세기 후반에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상·하류 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된다는 의견 등에 부딪혀 실현되지는 않았다.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이 마냥 터무니없다고만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 번역이 그만큼 고된 작업이었던 터라 원어(原語)를 익혀 개념들을 수용하는 방법도 생각한 것이었다. 

 

번역어들에 오역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을렀다거나 무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번역은 구미와 동아시아라는 공간이 만나는 것뿐 아니라 수백 년 어긋나고 있던 시대와 시대가 만나는 일이었다.

 

일본식 한자 조어를 받아들인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아편전쟁(1차-1840년, 2차-1856년)에서 패한다. 패한 직후에 승전국 영국의 사신이 오자 청나라 황제는 삼궤구배(三跪九拜)의 예(禮)를 하라는 오만함에 취해있었다. 구석 땅덩어리 하나 잃는다는 인식뿐이었다. 그런 중국이 청일전쟁(1894년~1895년)에 패하고 나자 위기를 실감한다. 일본에 많은 이들을 유학 보냈다. 일본이 서구 언어에서 번역한 한자 조어들을 가져다 쓰기 시작한다. 1896년부터 1911년 사이에 958권의 일본어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1905년과 1906년에 일본에 유학한 중국인 학생은 8천 명을 넘었다. 중국 문자인 한자로 만들어진 단어들을 수입한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베트남도 마찬가지로 일본 유학생 등을 통하여 일본제 한자어가 흘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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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청군의 두 번째 주요 전투인 1894년 9월 15일 평양 전투를 묘사한 그림

출처-<위키피디아>

 

메이지 시대(1868년 – 1912년)에 만들어진 번역어는 수만 낱말에 이른다. 일본제 한자어는 비판도 있었다. 기존에 쓰여왔던 전통 한자어의 용법으로 어색하다거나 개별 문자의 의미만으로는 원(原) 단어의 뜻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익숙한 한자음만 자국식으로 바꿔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간편함 때문에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에 폭넓게 수용되었다.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문을 연 후 불과 50년 만에 청나라와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긴다.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다. 플라자 합의(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5대 선진국 프랑스·서독·일본·미국·영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 모임에서 발표한 환율에 관한 합의) 이후 탈탈 털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방구 좀 끼는 인구 1억 2,500만의 경제 규모 3위 대국이자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사족. 대항해시대부터 일본은 제한적이나마 유럽과 이미 교류하였다. 조선 정조 20년인 1796년 그들은 네덜란드어-일본어 사전인 <파유마화해(波留麻和解)>를 간행하였다. 일본 최초의 난일(蘭日)사전으로 64,035단어를 수록했다. 

 

3. 번역을 통한 수용에서 문화 수출로 

 

2021년 26개 한국어 단어가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되어 한국에서 화제였다. 기존에 23개가 올라 있었는데 단숨에 그 이상의 단어가 올랐다. 일본어 단어는 몇 개가 등재되어 있을까? 540개다. 한류(K-WAVE)는 지난 20여 년 활성화되었다고 한다면 '재팬 웨이브'는 19세기 자포니즘(Japonism, 19세기 중-후반 유럽에서 유행하던 일본풍의 사조)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20세기에는 와패니즈(Wapanese 'Wannabe', 'Japanese'의 합성어로 일본 문화에 빠진 서양인들을 지칭)들에 의해 100년 이상 황금기를 풍미했다. 세계인들이 잘 쓰는 일본어들을 아래에 적어 봤다. 

 

스시·라멘·토푸(두부)·가라오케·데리야키·닌자·사무라이·사케·교자·기모노·망가·가부키·쓰나미·벤또·낫또·모치(떡)·미소(된장)·사시미·샤부샤부·소바·타코야키·텐푸라·하이쿠·오타쿠·쇼군·아이키도(합기도)·가라테·스모·주도(유도)·게이샤·센세이(선생)·시바이누·스도쿠·카미카제·와사비·고(바둑)

 

일본어는 종성(終聲, 받침소리)이 거의 없다. 모음도 매우 적다. 대부분 아·이·우·에·오 같은 단모음이다. 이에 따라 소릿값이 한정된다. 발음하기 쉽고 음가가 한정된다는 특성은 외국인들이 일본어를 발음하기 쉽게 만들었다. 비일본어 화자가 소리를 내기 어려운 음가를 쓰는 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바로바로 다른 나라 언어에 녹아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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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트콤 <프렌즈>에서 일본어 단어 우나기(うなぎ [鰻], 장어)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 한 장면

출처-<링크>

 

가령 한국은 고추장을 Korean Hot Sauce라고 할 때 일본은 와사비를 wasabi라 하며 전 세계에 일본어 단어들을 퍼뜨렸다. 이는 자국과 자국어에 대한 자존감 문제도 있으리라 본다. 일본어 단어들을 퍼뜨리겠다는 의도였든 아니면 그런 의식조차 없이 일상에 쓰는 단어를 그대로 표기한 것이든 결과적으로 전 세계 다양한 분야에 일본어 단어들은 퍼져 있다. 

 

단어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자국의 지식과 정서를 세계에 퍼뜨린다. 1950년대부터 국가와 민간이 손잡고 2만여 종의 번역작품을 해외에 선보였다. 참고로 외국에 소개된 한국 문학은 2,000종 정도다. 1964년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 문학상을 타고 26년 뒤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가와바타는 "이 상의 절반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설국>의 번역가) 씨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상금 50%를 번역가에게 보냈다고 한다. 오늘날 무라카미 하루키·히가시노 게이고·요시모토 바나나 등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소설가로 통한다. 할리우드에서는 <닌자 거북이>, <라스트 사무라이> 같은 제목을 자연스레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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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 거북이(Ninja Turtles)

출처-<The Hollywood Reporter>

 

일본은 언어란 수단을 잘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번역도 잘하고 언어를 통한 문화수출도 잘하는 등 수용·전파에 모두 성취가 있었다. 그런데 전술 이야기만으로는 일본 언어생활의 단면만 이야기했다는 상념을 지울 수 없다. 번역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마무리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 그것도 일본이 바람직하게 언어를 활용한 부분만 보여준다고 여긴다. 이제 그 남은 부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4. 번역에 치우친 나라 그리고 히키코모리

 

번역이 일본인들의 사고 양식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매뉴얼 문화다. 규칙 문화다. 일본인들은 끊임없이 지시를 만들고 지시에 따른다. 공항과 지하철역에 가면 끊임없이 안내 방송이 나온다. 하네다 공항에서 노숙한 일이 있다. 밤새도록 끊임없이 에스컬레이터 탈 때 주의하라는 안내 방송을 들었던 장면이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소수 번역가가 원서를 옮긴다. 다수는 본국어로 읽으면 된다. 다수는 소수가 사용한 어휘·맥락 안에서 번역물을 이해한다. 소수가 선택한 번역물만 읽어야 하며 선택하지 않은 것들은 읽지 못한다. 번역 작업을 통해 일본 지배층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고자 했다. 국가주의(내셔널리즘)의 일환이다. 매뉴얼도 같은 맥락이다. 무언가 통제하고 통제받기를 좋아하는 집단주의 문화가 번역에 있다. 

 

이는 번역 밖의 언어 행위를 봐도 이해할 수 있다. 국제 시대에 외국어를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타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조국과 조국 안에 있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오늘날 일본을 보라.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천명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자신과 달리 1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 일본인들은 영어를 못한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친구 삼고 싶지 않은 나라라 일컫던 한국 사람들보다 못한다. 스웨덴 교육기업 EF 에듀케이션 퍼스트가 실시한 2020 EF 영어 능력 지수 랭킹에 따르면 한국은 100개국 중 32위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싱가포르·필리핀·말레이시아에 이어 4위다. 세 나라는 영어가 공용어이므로 제2외국어로 영어를 쓰는 나라 중에는 사실상 1위다. 이웃 나라 일본은 전체 55위, 아시아 9위다. 한국과 일본은 숙련도를 기준으로 한 그룹 자체가 다르다. 한국은 'Moderate proficiency(중간 숙련도)' 그룹이고 일본은 'Low proficiency(낮은 숙련도)' 그룹이다. 

 

세계적인 경제·문화강국이며 그렇게 구미를 동경하는 나라에서 왜 외국어 학습을 못 하는 것일까? 많은 학교에 수영장을 두고 수영과 같이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잘 가르치는 나라에서 국제화 시대에 영어교육은 왜 뒤처지는 것일까? 시스템과 규칙을 자랑하는 나라라면 영어 교육도 체계적으로 환경을 조성하여 실행할 수 있지 않을까? 못 만들지는 않을 터이다. 어쩌면 안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내향성(introversion)에 답이 있다고 본다. 내향성 문화는 한국도 있지만 한국은 외향성(Extraversion) 문화도 동시에 있다. 대학교에서 팀플(조별 과제)은 일상이며, 콘서트장에서 떼창은 밈(meme)이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억지로 회식을 권하지도 술을 권하지도 않는다. 가라오케에서 떠밀려 노래할 필요도 없다. 

 

한국의 화병(hwa-byung)은 한국 스트레스 사회를 표상(表象)하는 단어다. 화병은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일본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도 옥스퍼드 사전에 있다. 히키코모리(hikikomori)와 오타쿠(otaku)다. 일본의 언어 활용을 보면 히키코모리가 떠오른다. 일본인들은 외국 여행은 어느 정도 하지만 외국에 잘 정착하지 않는다. 대학원·어학원 등에서 공부하고 한국인·중국인보다 상대적으로 바로 귀국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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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그들은 집에서 보는 매체 속에 모든 것을 담길 원한다. 만화책·콘솔게임·TV 예능 방송이 발달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 여긴다. 집에만 머무르는 히키코모리는 일본 전체 문화를 은유한다. 일본인들은 자기들 틀 안에서만 움직이기 좋아한다. 혹은 다른 이들이 틀을 정해주기를 바란다. 오타쿠도 마찬가지다. 오타쿠란 말 자체가 집(お宅)을 뜻한다. 히키코모리와 오타쿠는 때때로 소통 부재를 의미한다.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근다. 일본은 타인들이 만든 문화를 자신들 세계에서 응축·굴절·왜곡한다. 그런 문화에 적합한 것이 번역이다. 번역서·매뉴얼·서류 등 모든 것들을 지면에 담아 축소한다. 

 

한번은 일본 항공사 스튜어디스인 친구와 전철을 타고 이동할 때였다. 친구는 장거리 비행 후 피곤할 터였다. 그런데도 전철에서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유니폼을 꼿꼿이 차려입고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조금 편하게 입고 있어도 되지 않아?"

"안돼. 일본에서는 내가 유니폼을 입고 흐트러져 있잖아? 누가 보고 회사에 전화한다구.."

 

전철에서 전화도 안 하는 그들이 조용히 타인들을 감시한다는 듯한 이야기다. 꽉 짜인 매뉴얼을 벗어나는 행동을 두고 보지 않는다는 것으로 들렸다. 일본인들은 매뉴얼에 정해진 대로 행동하기를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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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흡수하는 것이다. 쌍방향이 아니다. 전 세계에 일본 단어들과 일본 문화가 퍼져 있다고 전술(前述)하였는데 그것은 서양인들이 관심을 갖고 가져간 것이다. 그것 또한 일본인들의 확장성을 나타낸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인들은 흡수에 강하다. 한자를 흡수하여 히라가나·가타카나를 만들었으며 불교를 흡수하여 신불습합(神佛習合, 일본 전통 신앙인 신도와 외래 종교인 불교가 융합하여 나타난 신앙 형태)으로 자신들만의 종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확장에 약하다. 확장의 시작은 타인들과의 소통이다. 타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화를 통한 언어학습은 실시간 돌발 상황이 곧잘 발생한다. 일본은 예측 가능성이 적은 상황을 극도로 꺼린다. 여전히 시험 영어·매뉴얼 같은 영어를 배우는 이유다. 식민지 때부터 일본의 영어 학습법과 시험 제도를 이어받은 한국도 비슷한 모습이 남아있지만 원조만큼은 아닌 듯하다.

 

일본 젊은이들은 기독교·천주교 신자가 아니면서 교회·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일본인들은 구미 문화를 동경하고 그들을 흉내 낸다. 구미인들이 일본인에게 기대한다고 생각하는 근대화의 모습으로 민주주의·법치주의 등 구색을 갖추었다. 그렇게 의회·법원을 만들었다. 일본에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근대화를 위한 도구였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성취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던 듯하다. 

 

2022년 미국은 3억 3천만 인구에 변호사가 약 132만 명이다. 일본은 1억 2천만 인구에 변호사가 4만 1천 명이다. 한국은 약 3만 명이다. 인구 1만 명당 변호사 수에서 일본은 현저히 적다. 일본에서는 대인 갈등이 송사(訟事)로 잘 가지 않는다. 일본에서 갈등 해결은 법률 논리로 해결할 것이 아니다. 일본 내각 총리 임명식에서 대신들이 19세기 서양식 연미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걸 볼 때마다 여러 생각이 스친다. 일본에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구색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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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앞줄 가운데)와 초대 내각

출처-<위키피디아>

 

근대화(modernization)와 근대성(being modern)은 다르다. 근대화는 기술 발전·공업화 등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근대성은 심리와 의식의 측면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자주성을 견지할 능력이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일본인들은 근대성을 갖추었을까.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순종적이며 국민이 주인이란 의식이 떨어진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번역을 통해 근대화(modernization)는 이루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정신적인 활동인 외국어 학습은 근대성과 관계가 있다. 외국어 학습이 근대성을 이루는 충분조건이라고 보지 않는다. 모두가 외국어 학습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일본인들이 여러 방면에서 근대성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언어 면에서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5. 21세기 일본인 언어 구사의 불안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45명이 지난 7일부터 등교하지 않는다. 일본인은 원래 영어발음이 불량한데 영어교사인 전중용승(田中龍勝)이 가르치는 발음대로 영어를 배워서는 도저히 세상에 나가 활용할 수 없으니…조선 사람으로 영어교사를 바꿔달라는 것…."

- 1920년 5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럿셀'을 '라세루'라 한다…그 외에 '구리-무'(크림), '다꾸씨'(택시), '밧데리'(배터리), '화스토'(퍼스트), '보인또'(포인트), '시구나루'(시그널), '마구네슈무'(마그네슘)...."

- 1930년 5월 1일 <별건곤> 주요한(1900~1979)의 글 中

 

필자는 일본어 소리·한자에 매력을 느꼈다. 일본에 살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일본어 때문이었다. 일본 문화와 일본어를 접하며 명(明)과 함께 암(暗)도 발견했다. 외국어(영어) 학습이 약한 것에는 일본어에서도 연유한다. 일본의 히라가나·가타카나로 인하여 외국어 음가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국제시대 외국과의 교류에 있어서 간극을 벌리는 작용을 한다. 

 

가령 파서블(Possible)을 일본어로 포시브루(ポシブル)라고 쓴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은 일본에서 '밋숀 인포시브루(ミッション:インポッシブル)'다. 머니(money)는 마네(マネー)가 된다. Mcdonald는 마크도나르도(マクドナルド), Starbucks는 스타박크스(スターバックス)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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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유튜브 채널 パラマウント・ピクチャーズ(日本版)>

 

음가 체계가 언어마다 다른 법이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알고 있지 않아 자문화 중심주의가 흐를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일본어 음가가 한정적이어서 발음 왜곡이 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본다.

 

더불어 일본은 자기식대로 영어 단어를 만들거나 변형도 곧잘 한다. 굳이 일본어 단어가 있음에도 영어표현을 많이 쓴다.

 

주차권은 파킹그치켓토(パーキングチケット, parking ticket)라 한다. 성희롱을 뜻하는 'sexual harassment('セクシュアルハラスメント')'는 일본에서 세쿠하라(セクハラ)다. 두 단어의 앞부분만 떼어서 붙인 것이다. 편의점(convenience store)은 콘비니(コンビニ)다. 오믈렛 라이스(omelet rice)를 줄여 오므라이스(オムライス)라 하는 식이다. PC(Personal Computer)는 파소콘(パソコン, 퍼스널 컴퓨터를 줄임)이다. 노트북(랩탑)은 노토파소콘(ノートパソコン)이 된다. 풀네임으로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일상적인 용어들이다. 

 

일본에서 만든 스킨십푸(スキンシップskin+ship)란 단어가 있다. 살갗을 맞대는 것 또는 교우 관계하는 것을 일컫는다. 개인의 매력적인 특징(best feature)은 일본어로 챠무 포인트(チャーム‐ポイントcharm point)라고 한다. 호텔 같은 숙박시설에서 아침에 깨워주는 것(wake-up call)은 모닝구 코루(モーニング・コールmorning call)다. 개인의 인상을 바꾸는 것을 일본어로 이매지첸지, (イメージチェンジ, image change), 줄여서 이매첸이라 하는데 이 또한 영어에 없는 단어다. 

 

일본의 언어생활을 보면 그들의 욕망과 현실이 모두 보인다. 영어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 영어 단어들을 많이 쓰려는 욕망이 있다. 한정된 음가로 인해 동음이의어가 많아서 구별 지으려고 영어를 빌려 쓰는 목적도 있으리라 본다. 그렇게 쓰는 영어 단어 중에 본래의 뜻을 왜곡하여 쓰는 영어단어들이 많이 생겼다. 자기식대로 외래 대상들을 굴절하는 터이다. 이에 따라 국제어인 영어와의 간극은 더 벌어지는 것이라 본다. 

 

디지털 시대의 문제도 있다. 요즘 일본에 한자를 쓸 줄 모르는 젊은이들 수가 늘고 있다. 스마트폰 자동완성 기능으로 인해 한자를 직접 쓸 일이 줄었다. 타이핑도 로마자(알파벳)를 이용하여서 한다. 일본어 소릿값을 로마자로 치고 한자로 변환한다. ka를 치고 히라가나(), 가타카나() 또는 음가가 같은 한자(家, 可, 加 등)를 고르는 식이다.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는 가독성을 위해 한자 사용이 필수다. 한자를 입력하려면 (1)로마자로 히라가나 음가를 입력하고 (2)같은 음가를 가진 한자 목록 중에 원하는 한자를 찾아서 선택하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 영어나 한국어 타자 입력보다 절차가 많다. 모국어를 입력하는 데 있어서 외래 문자가 필요한 것 또한 유쾌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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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가나·가타카나가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950~1000년이다. 한글 창제는 1443년이다. 한글이 일본어보다 약 500년 뒤에 개발된 최신식 언어라는 이점이 공교롭게 컴퓨터 시대와 맞아떨어진 것일 수 있다. 타자기가 발명된 것은 영미권이기 때문에 로마자에 편리한 것에 일본어가 맞추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측면도 있다. 어쩔 수 없다고 하여도 결론이 불편하다는 사실은 현실이다. 컴퓨터 사용으로 인해 자신들의 언어 문자인 한자를 잘 익히지 못하고, 입력 속도도 다른 나라 언어보다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입시 영어 문제도 있다. 한국 병폐인 시험 영어는 일본이 원조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문법·독해식 영어 교수법을 한국에 도입한다. 메이지 시대(1868-1912) 초기에 상급학교 진학용 영어 시험은 영어를 일본어로 정확하게 번역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문법·독해식 영어 교수법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한자 때문이다. 오랜 시간 한자를 암기하고 이를 시험 치던 방식이 효과가 있었고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번역을 통한 근대화에 성과를 보이자 이를 영어 학습법에 도입한 것도 있다. 국가주의 시대에 시작한 시험 중심 영어교육은 학생들을 통제하기 편했을 터이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의 일본은 어떨까? 구글 번역과 네이버 번역은 꽤 쓸만하다. AI가 발달하면 일본의 언어 문제는 사라질까? 미지수다. 노예의 역설이 있다. 주인은 노예를 부린다. 노예는 일하고 주인은 논다. 시간이 흐르면 노예는 실무에 능숙해지나 주인은 무능해진다. 이기(利器)가 발달할수록 사람이 멍청해지는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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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안에서 문장 뜻 그대로 자동번역해 주는 네이버 라인(LINE) 서비스

출처-<링크>

 

지도와 지구본 보기를 좋아하는 필자는 2010년 지도책만 가지고 한 달 유럽 배낭여행을 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주변 친구들이 방향감각이 좋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몇 년 뒤 구글맵을 쓰기 시작하고부터 종종 길을 찾을 때 갈피를 못 잡는다. 내비게이션이 도입된 이후 영국 택시기사들이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고 한다. AI가 나오고 구글 번역이 있다고 하여도 사람이 언어를 익히며 문화를 체화(體化)하는 것에는 가치가 있다.

 

일본인들은 국가에 의해 축소·굴절·왜곡된 역사교육을 받았고 본질을 벗어난 영어교육을 받았다. AI 시대가 되면 일본의 근대성(being modern)은 달라질까? 노예의 역설을 생각하면 여전히 요원할 듯하다. 

 

6. 일본에 없는 21세기 필수 요소 2가지

 

일본인들의 영어 구사력이 떨어지는 것은 나라 크기에서도 연유한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로 약 1시간 10분이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오키나와까지 비행시간이 약 3시간 40분이다. 서울-제주 거리(454km)의 5배다. 4월에도 스키를 탈 수 있는 홋카이도부터 휴양 섬 오키나와까지 개성이 뚜렷한 지역이 많다. 미국을 제외하고 선진국 중에 인구 1억이 넘으며 일본만 한 영토를 가진 나라는 없다. 일본인들은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충분한 영토·자연환경과 내수시장을 누린다. 내향성과 맞물려 일본의 지리·자연 조건은 일본인들에게 외국어를 말하고 들을 필요성을 덜 느끼게 했다. 

 

더불어 20세기 미국 경제를 위협했던 유일한 나라인 일본은 콧대가 높았던 것도 당연하다. 미국에 버금하며 프랑스·독일·영국보다 우위에 섰던 기분이 일본어 자체에 대한 자부심에도 작용했을 터이다. 30년간 경제 호황을 거치면서 선진국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일본이 벤치마킹해야 하는 역할 모델(role model) 국가는 없었다. 오히려 한국·대만·싱가포르 등 아시아 신흥국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일본어를 학습했다. 일본을 벤치마킹했다. 자신들의 언어가 경쟁력 향상을 위한 수단이 되다 보니 일본인들에게 선진 문물 도입을 위한 외국어 학습 필요성은 반감했을 터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 중고등학교 영어교육에 적용하는 문법-번역식 영어 교수법, 시험을 목표로 하는 영어와 결합하면서 외국어 학습 동기가 감소하는 데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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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2010년대 20대 시절 필자 주변에 영어·중국어 등을 능숙히 구사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토익 900은 껌인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취업하기 험난했다. 일본에서는 대기업 입사에 토익 700점대만 되어도 충분하다고 한다. 시험 점수 자체에 대한 관용도 있겠지만 그 이상의 점수로 인력을 추려 뽑을 여력이 없는 것도 한몫하리라 본다. 

 

일본에서는 "3달 만에 400점대에서 650점대로 상승!" "2달 만에 750점 달성!" 등의 영어학원 광고가 있다. 요즘 한국에서 잘 보기 힘든 광고다. 2020년 기준 한국인 토익 평균 점수가 683점, 일본 평균 점수는 531점이다. 일본은 인구가 줄고 있어 노동력이 부족하다. 젊은이들은 기업을 골라서 취업하는 상황이다.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젊은이들 취업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구직자 입장에서는 좋지만 국가 간 개인 경쟁력 측면에서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영어만이 아니다. 컴퓨터 활용 역량에서도 한·일 젊은이들은 차이가 난다. 2010년대 한국은 집마다 컴퓨터가 있던 시절,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생 시절 한국 학생들 손에 든 노트북은 캠퍼스 흔한 풍경이었다. 필기를 노트북으로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대학생이 되어도 컴퓨터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파워포인트나 엑셀을 잘 다루지 못한다고 한다. 서류·도장 문화, 복잡한 타자 입력방식도 영향이 없지 않으리라 본다. 

 

21세기 국가 또는 개인에 필요한 역량 두 가지가 있다.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세계화)과 디지털라이제이션(digitalization, 디지털화)이다. 전자는 영어 구사를 후자는 컴퓨터 활용을 하나의 요소라 볼 수 있다. 일본은 지리·산업·문화 여러 원인으로 영어 구사뿐만 아니라 컴퓨터 활용에 있어서까지 21세기 선진국 주요 역량 두 가지에서 멀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일본은 3차 산업혁명(20세기 후반 정보 혁명)기부터 침체기를 맞아 4차 산업혁명기를 마주하고 있다. 일본의 전성기는 1차 산업혁명(18세기 후반 증기기관 발명)과 2차 산업혁명(19세기 후반 전기 혁명) 시기였다. 정교한 기술을 바탕으로 제조업에서 부흥한 일본은 인터넷 시대를 맞아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 감을 못 잡고 있다. 여전히 소재·부품·장비에만 천착하는 모습이다. 구글·애플·아마존 등 세계적인 빅테크 기업 사이에 일본 기업 이름은 없다. 

 

제조업도 IT와 결합하는 게 기초인 상황에서 일본의 앞날이 어떨지 궁금하다. 소니(12조 8061억엔), 파나소닉(3조 2865억엔), 히타치(4조 3313억엔), 도시바(1조 5480억엔), 샤프(1조 1963억엔) 등 일본 5대 전자업체의 시총 합계(23조 1682억엔· 약 247조 2163억원)는 삼성전자(시총 495조)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2021년 기준). 예측 가능성이 높은 산업에서는 강하지만 신속하게 시행착오(trial and error)를 겪으며 성장해야 하는 시장 환경에 약하다. 

 

20세기 그들이 주름잡던 문화산업에서도 불안이 찾아온다. 90년대에 일본 만화가 개방되어 <드래곤 볼>과 <슬램덩크> 등에 잠식되어 가던 한국 만화계였다. 개방은 곧 한국 만화계의 위기였다. 경쟁력을 잃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일본 문화 개방에 반대도 잇따랐다. 그러나 지금 일본 웹툰 시장 1, 2위를 다투는 건 네이버와 카카오다. 글로벌라이제이션과 디지털라이제이션 두 측면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 텍스트 문화를 표상하는 물건이 있다. 명함이다. 일본인들은 사무라이 시대 조심스레 서로 신분을 확인하던 것처럼 오늘날 명함을 통해 서로의 지위를 확인한다. 명함 교환으로 포지션을 확인한다. 해당 관계 역학에 부응하는 정해진 행동양식을 수행한다. 명함은 상황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 돌발상황을 줄인다. 상대 포지션과 자기 포지션 간 역학을 가늠한다. 양자 간 상대적인 지위에 알맞은 매뉴얼을 찾아 그에 맞는 행동을 수행한다. 그렇게 명함은 관계에서 오는 위험(리스크) 감수 없이 안정적으로 행동하는 걸 돕는다. 예상 밖의 상황을 극도로 꺼리는 일본인들은 명함에 관한 매뉴얼대로 행동함으로써 별도의 책임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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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sunagu Japan>

 

20세기 후반 세계의 리더 역할을 한 건 미국이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였다. 20세기 후반 일본은 적어도 아시아의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독일이 폴란드에 하였듯이 한국과 중국에 사죄할 시간이 있었다. 강자의 겸허함과 여유를 지닐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20세기 일본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산업 발전에 집중했다. 미국 울타리 안에서 부하 구실만 했다. 남을 추종하면 자기 책임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리더가 될 기회는 없어 보인다. 그들은 기회를 놓쳤다. 글로벌라이제이션도 디지털라이제이션도 멀어졌다. 

 

일본의 탈아(脱亜)는 불가능한 것이었고 입구(入欧)도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탈아입구를 하려던 무리수 때문에 정체는 더 애매모호하다. 1994년 오에 겐자부로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으며 '애매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여전히 일본은 애매하다. 

 

섬은 일본인에게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섬을 만들고 있다. 일본의 언어환경과 언어문화는 21세기 일본에 올가미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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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의 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정영목 | 중앙일보

일본 근대화의 힘은 `번역`에서

[책과 사람]번역과 일본의 근대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9)] 번역을 예술 경지로 승화시킨 니시 아마네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백과사전이 있어서 일본문화가 있었다

인간을 뛰어넘은 자동번역, 일본 사회 속으로 들어가다

르네상스도 근대 일본도 번역에서 시작됐다

1873년 급조된 단어 '미술' 어떻게 내적 언어로 뿌리내렸나

[박상익의 事와 史] 번역청 설립을 공약하라

일찍부터 국가 번역청 만든 중국! 한국은?

[최치현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시 보는 일본(3)] 근대 중국의 일본에 대한 인식

"여자력 높이자"... 日 여성들은 왜 여성다워지려 하는 걸까

개념으로 읽는 한국 근현대(3) '번역'

[가난한 일본] ②올해도 한국에 '구매력 GDP' 추월...'풍요로운 선진국, 자존심 버리자' 자성도

"을노브가 무엇이오" 영어에 푹 빠졌던 조선, 일제의 교육이 망쳐놨다

[책속의 명문장] 루트비히 명언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

언어가 사고와 세계관을 지배하는가 [로버트 파우저의 언어의 역사]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말하는 대로 생각하게 될까?

[강우성 칼럼] '강남 스타일' 넘어 이제는 '코리안 스타일'에 자긍심을

From anime to zen: Japanese words in the OED

Words of Japanese origin

'영어 바이블' 학습서도 진화한다

"응답하라! 1980"…`와패니즈` 부활 꿈꾸는 일본

"일본 결국 사라질 것" 머스크 트윗에…일본 네티즌 반응 보니

'아이 러브 재팬' 와패니즈에 대하여.

일본은 어떻게 '노벨상' 강국이 되었나?

'설국' 노벨상 수상도 제대로 된 번역의 힘

일본은 어떻게 노벨상 강국이 됐나?

Japan's "Hikikomori" Population Could Top 10 Million

英 옥스퍼드 영어사전 '히키코모리' 추가

영어실력 국가별 순위 매겨보니…한국과 일본은 '급'부터 달라

도쿄 신주쿠 거리, 영어 간판이 별로 없다

'영어몰입교육' 日 실패 교훈 삼아야

번역·일본·단테의 신곡

[단독] 삼성전자 시가총액, 日 1등 도요타의 두 배 넘었다

[변호사 3만명시대]③미국이냐 일본이냐 … '변호사 수 싸움' 갈림길 선 한국

한국에는 '오빠'가 있고 세계에는 'oppa'가 있다

 

그 밖의 자료

우리말에 들어온 일본말

일본제 한자어

허경 <프랑스 대표 지성사> 1강 강의록

'한국 0 vs 일본 24'...日이 노벨상에 강한 진짜 이유는?

서울이 부산보다 멀리 있는데 왜 제주행 비행시간은 비슷할까?

삿포로에서 오키나와까지. 물 한잔에 서울제주 5배거리 비행. 실화냐?

위키백과:김옥균

위키백과:니시 아마네

번역의문화, 문화의번역

번역은 어떻게 주체를 생산하는가?

샹그릴라의 일본어 칼럼 (25) 한국어와 일본어의 차이 

신입사원되면 PC 키보드 사용법부터 배우는 일본 "키보드는 낯설다"

위키피디아: 타자기

일본 유명인 인지도(지명도) 랭킹 TOP 100

위키피디아: 가나가와 조약 

일본인이 영어를 못하는 "진짜 이유" 6가지

韓日 영어실력 비교

현행 일본어의 문제점과 일본의 카타카나가 범어의 50음도에서 기원한다는 일본학설 반박

위키피디아: 후쿠자와 유키치

위키피디아: 오에 겐자부로

Oxford Dictionary of English Adds 'Hikikomori'

위키피디아: 히키코모리

Oxfordreferen: hikikpomori

Oxfordreference: otaku

英 옥스퍼드 영어사전 '히키코모리' 추가

일본식 영어 용어, 발음, 문법교육에서 벗어나야

와이셔츠, 니스란 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국인 토익 평균 683점···아시아서 두번째

"3달 만에 400점대에서 650점대로 상승!" "2달 만에 750점 달성!"

일본 토익 vs. 한국 토익, 어디가 어려울까? :: 유학생의 연구실

EBS 지식채널E <경쟁력의 조건> | 401화 | 2008년 02월 25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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