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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19세기의 조선은 삭제된, 혹은 삭제되어야 하는 역사로 인식되었습니다. 19세기 조선 민중이 살아내야만 했던 험난한 삶, 그 아픔이 가져다주는 교훈은 19세기 조선사를 어둠과 흑막의 시대로 못 박았죠. 물론 그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 중 하나입니다. 

 

이 시대를 경험한 우리는 이후, 무력했던 식민지화를 반성하고, 그것을 극복하려 적극 투쟁햇던 독립운동사에 대해 많은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격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의병입니다. 이들은 개화에 반대하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고 부르짖었으며, 소위 ‘봉건적’이라 부르는 시대정신을 갖고 총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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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들 중 다수는 지주였으며, 시대를 거스르는 존재였죠. 어떤 이들은 유림(儒林)의 의병투쟁이 조선의 독립에 전혀 도움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낡아 빠진 이상이 만들어낸 ‘해프닝’ 정도로 그 가치를 절하합니다. 

 

그러한 평가가 적합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종언을 고하는 시대를 짊어진 자들이 쥐어짠 마지막 행동이 개화기의 의병투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업(業)인 글쓰기로 모든 것을 기록했죠. 요즘에서야 이들의 기록을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이들 중 을미의병(1895-1896)들이 남겼던 글로 혼란했던 그 시대를 바라보는 기사입니다.

 

 

역사의 변곡점, 을미사변 : 을미의병의 시작 

 

1895년 10월 8일 - 『매천야록(梅泉野錄)』

 

20일, 일본 공사 미우라가 대궐을 침범하여 왕후 민 씨가 시해되고,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대대장 홍계훈이 적에게 저항하다가 사망하였다. 

 

이때 민후는 벽에 걸려 있는 옷 뒤로 숨어 있었으나 그들은 민후의 머리를 잡아 끌어내었다. 민후는 연달아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일병들은 민후를 칼로 내리쳐 그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운 후 그 타다 남은 유해 몇 조각을 주워 땅에 불을 지르고 매장하였다. 민후는 20년 동안 정치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하여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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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1895년 10월 8일 - 『윤치호일기』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왕후가 맞이한 그 비참한 운명에 충격을 받아 심신이 몹시 탈진했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왕후의 집권이 좋은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녀의 음모와 사악한 총신들을 포기하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조처할 수 없다면 그녀를 폐위해야 한다고 주장할 터이다. 그러나 일본인 암살자가 그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행위는 결코 용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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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좌, 1856-1910)과 윤치호(우, 1865-1945).

황현은 1910년 한일병탄을 통탄하여 음독자살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다.

윤치호는 독립신문 창립 멤버이자 계몽 운동가로

활동했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한다.  

 

유림이었던 매천 황현과 개화파였던 윤치호가 모두 민비에 대해선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민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떻든, 을미사변은 역사의 변곡점이었습니다. 직후에 벌어진 을미의병도, 백범 김구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도 모두 이 사건으로부터 촉발되었죠. 

 

물론 잘 아시다시피, 을미의병의 기폭제가 되었던 건 단발령입니다. 단발령이 집행되자,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생겨납니다. 강제로 머리를 깎는 것은 이들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자, 평생 유학의 가르침을 받들어온 신념에 대한 굴욕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을미사변은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발생한 불행하고 통곡할만한 일’이었다면, 단발령은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대역무도한 짓’이었죠. 왜였을까요?

 

지방의 유림은 대략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민비의 죽음은 민비 자신이 깊게 정치에 관여하여 화를 불렀고, 대원군과 개화파 등의 잘못된 외교 정치, 특히 일본에 의지하는 외교로 인해 발생한 일이라고 정리했죠. 반면, 단발령은 조금 달랐습니다. 

 

단발령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나라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의(義)로서 목숨을 던지며 조선을 지탱해 온 사림(士林)에 대한 배반 행위라고 받아들였죠. 다시 말해, 자신들이 쌓아온 역사가 무너지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가장 공고한 지역 사대부 문화를 일궈 온 충청과 영남의 유림은 즉시 칼을 들었고, 관군 및 일본군과 국지적인 전투를 치르며 하나로 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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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역사채널e>

 

 

자기 이익을 위해 의병에 힘 보탠 이들도 있었다

 

1896년 2월 초8일(음력) - 『일록(日錄)』

 

제천지역 의병 150명과 본진 의병 250명, 봉화의병 60명, 순흥의병 40명, 예안의병 50명이 서로 약속하여 예천에 모이기로 하였다. 어제 행군이 이어졌는데 본진은 권재호가 이끌면서 보부상과 의병이 뒤를 따랐다. 서상렬, 홍선상 등이 이끄는 그 모습의 기세가 장대하고 대오가 일정했다. 영주와 풍기의병도 약속한 시간에 맞춰 모두 도착했다. (일본 편에 섰다고 인정되는) 영덕수령 정재관 부자는 (안동) 예안의병 포대장에서 살해당했다. 용궁, 군위, 비안 각 읍은 총 3천 냥의 군자금을 배당받았고, 모두 정한 숫자대로 바치겠다는 확인서를 올렸다.

 

역사상의 모든 민병대가 그렇듯, 의병도 항상 숭고한 가치로만 모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부상은 물밀듯 들어오는 외국 상인을 경계하여 의병에 투신했죠. 그런데 의병의 주요 전투력이었던 포수들은 왜 의병에 참여했을까요? 이들은 매우 높은 페이를 받았습니다.

 

1896년 1월 24일(음력) - 『일록(日錄)』

 

포졸과 화약 심지를 합하여 계산해주는 일로 지휘부가 모두 논의한 지 얼마 안 되어 밖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급히 보내 살펴보니, 이주필이 포병 10여 명을 거느리고 갑자기 마을 안으로 들이닥쳤고, 논의하는 곳까지 이르러 생트집을 잡으면서 험한 말을 했다. 포병에게 인건비를 주는 일은 정말 불합리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자들이 달라는 대로 1명당 60냥씩 두 사람을 사고, 총 2자루는 마을에서 사서 주었다.

 

포병이라 불리는 이들은 산짐승을 잡는 포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갖고 있었는데, 의병단과 일종의 용병 계약을 맺고 활동했죠. 이들에게는 목숨값이었으니 당연히 그 페이는 비쌌습니다. 구식 화승총을 들고 싸웠지만, 의병단이 올린 전과의 상당 부분은 포수들의 활약 덕분이었죠. 의병단으로선 울며 겨자 먹기로 이들과 계약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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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16세기 구식 화승총을 들고 있는 조선의 포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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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단을 적극 지지한 또 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전입니다.

 

1895년 12월 6일(음력) - 『향회시일기(鄕會時日記)』

 

마을 향회에 류 어르신을 비롯한 모두가 모였다. 그 수가 수천여 명이었다. 노인들은 단발령을 거부하는 정도의 소극적 의견을 내었는데, 아전들은

 

“아니, 아무리 창의를 회의하는 자리라지만, 말은 많고 한다는 사람은 왜 이리 없소! 어서 정합시다!”

 

라며 밀어붙였다.

 

각론 끝에, ‘안동창의(安東倡義)’ 네 글자를 쓰고 대장을 뽑기 시작했다. 대장은 60세 정도에 이른 사람으로 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류필영, 김서락이 

 

“참봉 권세연 어르신은 정말 한신(韓信)과도 같습니다.”

 

라며 추천하였는데, 권 어르신도 어른을 모시고 있다며 도로 나가 버려서 그대로 회의가 끝났다.

 

아전, 지역행정의 실무자이자 지하경제의 주도자인 이 자들은 의병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왜일까요? 

 

1894년 갑오개혁의 목표 중 하나는 부정부패의 주범으로 지목된 아전의 완전 배제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직이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지역 유지 세력을 완전히 배척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의병을 지원할만한 동기가 충분했는데, 문제는 서로 책임을 미루느라 의병단 결성이 지지부진했었죠. 아전들은 유학자들을 압박하면서 의병단 결성을 추진했고, 보급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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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을 받는 죄수(19세기말-20세기초).

아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죄수를 둘러싸고 있다.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죽기를 각오한 의병, 충주성을 향하다

 

비록 이렇게 각자의 권력과 이득을 위하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내건 의(義)의 깃발이 순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이 이끄는 호좌의진은 강원, 충북, 경북 지역 의병의 구심점이 되어 4,000명의 병력을 갖춘 군세로 성장하는데요. 그 까닭은 멈칫거렸던 근처 의진에 비해 가장 진지하고, 적극적이었으며, 체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호좌의진 의병장 안승우(安承禹, 1865~1896)의 연설에선 이 의병 부대 내에 흐르던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의병장께서는 새로 합류하는 군사들에 항상 이렇게 외쳤다.

 

“국모의 원수를 갚지 않으면 곧 신하와 백성이 아니며, 개화(改化)의 변을 고치지 않으면 곧 짐승이 되는 것이다. 야만인과 짐승이 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랴. 너희들은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여 원수를 없앨 것을 기약하라.” 

 

이때 의병장의 목소리와 표정이 비장하여 군사들이 모두 감동했었다. 

 

또한 지휘부가 고기 반찬을 먹자, 이렇게 꾸짖었다.

 

“군사가 움직이면 백성들이 피폐해진다. 부디 털끝만큼이라도 과하게 소비하여 백성의 힘을 괴롭혀서는 아니 된다. 하물며 군사들은 소금밥으로도 배부른 적이 없는데, 너희들은 감히 제 몸을 살찌우는 욕심을 부릴 것이냐!”

 

이렇게 말하며 목을 베려다가,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다가 멈췄다.

 

-안공하사실기대략(安公下沙實記大略)

 

(안승우는 아버지 안종응부터 아들 안기영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항의의병에 투신했다. 1962년 안승우 선생이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것을 필두로 부친 안종응과 아들 안기영 모두 1999년에 건국포장에 추서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3대 의병 집안으로 공인받았다)

 

최대 의병 부대로 성장한 호좌의진은 제천을 중심으로 충주, 단양, 원주, 영월, 안동, 문경 등지에서 활동합니다. 원주성을 점령하고,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잡은 후 처형하는 등 속속들이 전과를 올리죠. 그리고 을미의병 시기 최대의 전과라 평가받는 충주성 전투가 벌어집니다.

 

당시 충주는 서울 군사 400명, 일본군 수백 명, 지방 군사 400여 명이 지키고 있던, 당시로선 상당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일본군은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전보선을 깔았는데, 충주를 중앙 거점으로 삼았죠. 충주에 발령한 지방관은 일본군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해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따라서 충주성 점령은 의병에게 전략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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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