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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는 MMORPG 장르의 끝판왕이다. <어벤져스>나 <그라비티>같은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껴지는 압도적인 스케일이 있다. MMORPG 게임 유저들에게, 와우는 헐리우드 영화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거대한 대륙의 느낌을 그대로 게임으로 옮겨 놨을 뿐만 아니라, 그 안의 세계를 매우 디테일하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와우 이후, 그것을 뛰어넘는 그래픽과 세계관을 갖춘 3세대 MMORPG 게임들(검은사막, 아키에이지, 그리고 로스트아크등)이 많이 개발되었지만, 아직까지 와우를 처음 플레이할 때 이상의 충격과 감동을 느껴본 적이 없다. 와우가 완벽한 게임이어서가 아니다. 와우는 기존 게임들로부터 두 발짝 이상 앞서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의나라>나 <거상>이 최고인 줄 알고 있던 나에게, 와우는 MMORPG에 대한 상식을 모조리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혁신이었다. 마치, 아이폰이 모바일 시장을 뒤집어 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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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는 만랩부터

 

와우의 혁신은 외형적인 그래픽에 국한되지 않는다. 와우는 MMORPG 게임의 문법에도 지대한 영향을 남긴 게임이다. 기존 MMORPG 게임의 주된 플레이 방식은, 지속적으로 강한 몬스터를 잡아 더 많은 경험치와 돈을 버는 것이었다. 양적인 성장(경험치의 습득)이 우선되면, 자연스럽게 효율성을 추구하게 된다. 여기서 효율성이라 함은, 내가 쉽고 빠르게 잡을 수 있는 몬스터 중 경험치를 가장 많이 주는 놈(혹은 돈을 많이 주는 놈)을 존나 많이 잡는 것이다. 까다로운 컨트롤을 요구하는 몬스터는 인기가 없다. 한두 마리는 잡을 수 있어도, 오래 잡다 보면 금방 피로해지니까.

 

PC방에서 밤새 리니지나 디아블로를 돌리던 훼인들은 떠올려보자. 대부분의 사냥이 오른손 딸깍딸깍으로 끝난다. 이게 엄청 허술해 보여도, 실은 극한의 효율을 추구한 세팅이다. '의료기기'라 불리는 매크로마우스(장시간 사냥 시 손목 피로도를 줄여주기 때문)를 사용하기도 하고, 동전을 꼽아 특정 스킬을 반복 시전한다. 고인물들의 왼손엔 담배가 들려있거나, 반대쪽 모니터로 드라마를 보는 게 국룰이었다. 이 모습은 게임을 하는 거라기보단, 지루한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다. 솔플 위주의 단순 반복 노가다가 무한히 반복되던 것이 기존 MMORPG였다.

 

그런데 와우는 만렙(경험치를 통한 성장이 완료되어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 상태)이 매우 낮게 설정되어 있었다. 각 잡고 게임하면, 사흘이면 만렙을 찍을 수 있었다. 반복 노가다를 할 건덕지가 별로 없는 셈이었다. 게다가, 퀘스트를 통해 지급하는 경험치가 매우 높았다. 혼자 필드몹을 닥사(닥치고 사냥)하는 것보다, 파티 맺고 퀘스트를 미는 것의 효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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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에는 만렙부터 시작이라는 말이 있다. 캐릭터가(일주일이면 달성할 수 있는) 만렙을 달고 나서부터,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던전, 공격대 레이드를 통해, 다른 유저와 함께 엄청 쎈몹을 함께 잡는 PvE(Player VS environment. 플레이어가 컴퓨터에 움직이는 몬스터 혹은 던전, 함정, 기후 등과 대적하는 행동)를 하거나, 투기장, 필드, 전쟁터 같은 곳에서 상대 진영 캐릭터를 제압하는 PvP(Player VS Player,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다른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캐릭터와 대적하는 행동) 콘텐츠를 즐길 수 있었다.

 

뭉쳐야 조진다

 

여기서 핵심은, 모든 콘텐츠에서 다른 유저와의 “협동” 혹은 “대결”이 강요된다는 점이다. 기존 MMORPG 게임들은 여러 유저가 뛰어놀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제공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유저들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고 어떤 상호작용을 유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PK(Player Killing. 게임상에서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는 것)나 공성전 같은 콘텐츠가 존재하긴 했으나, 그런 건 고인물들을 위한 이벤트였다. 같은 게임을 즐기는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반복 사냥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와우는 달랐다. 와우에선 파티를 짜서 던전을 도는 플레이가 기본이다. 내가 아무리 딜이 쎈 고인물이라도, 힐러나 탱커가 없으면 기본 던전조차 돌지 못한다. 같은 던전을 도는 동안에는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중간중간 깔리는 장판(밟으면 데미지가 들어오는)도 피해줘야 하고, 다른 몹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메즈기도 걸어줘야 하기 때문에 더럽게 바쁘다. 누구 하나라도 실수하면, 파티원 전원이 죽는다. 상위 콘텐츠인 레이드에 가면, 최대 40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의 하나의 던전을 돌게 된다. 그 대신 각각의 몹은 더럽게 쎄고, 지랄맞은 스킬을 쓴다. 처음에는 익숙지가 않아서 죽고, 나중에는 집중력이 떨어져서 죽는 대환장의 파티가 벌어지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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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재밌다. 엄청나게 재밌다. 반복되는 삽질 끝에 딱 한 번, 우주의 기운이 모아져 40인의 합이 정확하게 딱딱딱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이때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나이스 브라보 딸딸이”를 외치게 된다. 내가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얼굴도 모르는 공대원들과 합이 잘 맞았다는 희열이 더해진다. 다른 게임을 하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이렇게 집중해서 여러 명과 협동할 기회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PvP는 또 어떠한가. 필드에서 얼라(상대편진영) 플레이어들이 보이는 족족 싸움을 걸고 꼬장을 피우다 보면 스스로의 인성에 감탄할 때가 많다. 아이언포지(상대편진영 수도)로 몰려가서 얼라 유저들과 수장을 학살하는 것은, 와우에서 처음 느낀 재미였다. 현실에서는 금지된 폭력이나 전쟁범죄가 게임 속에서는 하나의 놀이 문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무튼 주절주절 긴 이야기의 결론은, 와우가 갓겜이었다는 것이다. 와우는 다른 게임에서는 느끼기 힘들었던 재미와 감동을 선사했으며, 이후 MMORPG 게임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와우는 상업적으로도 매우 성공하여, 가장 많은 매출과 이익을 올리는 게임이 되었다. 와우는 지금도 전 세계 MMORPG 게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K - MMORPG의 탄생

 

와우와 MMORPG 게임 장르에 대한 인기도 자체는 다소 떨어진 상태다. 와우의 전투 방식은 재미있지만, 높은 집중도와 긴 플레이 시간을 요구한다. 상위 레이드의 경우 기본 5시간, 길게는 10시간 넘게 플레이해야 한다. 같은 게임 10시간이라도, 와우를 플레이하는 것과 거상을 플레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거상은 나 혼자 하는 게임이다. 거상은 밤에 애들 재워놓고 잠깐씩 돌리는 게 가능하다. 플레이하는 동안에도 라면을 먹거나 드라마를 보며 쉴 수 있다. 반면, 와우는 그럴 수 없다. 다른 사람과 같이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약속한 시간에 스케줄을 비워야 하는 것은 물론, 플레이 타임 내내 빡세게 집중해야 한다. 내 사소한 실수 하나에, 공격대가 전멸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고 해결해야 할 현생퀘(취직, 승진, 결혼, 육아)가 늘어날수록, 온전히 게임에 집중하는데 쓸 수 있는 시간과 관심은 줄어든다. 와우는 정말 재미있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내게서 멀어졌다.

 

MMORPG는 원래 개발 난이도가 높은 장르다. 보드게임이나 퍼즐 게임에선 독창성과 아이디어 승부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MMORPG는 세계관을 가지고 경쟁을 하는 장르이다. 유저들에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모험과 판타지를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려면, 개발사는 퀄리티와 스케일에 목숨 걸어야 한다. 잘 만들려면, 돈이 엄청 깨진다.

 

MMORPG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엄청난 비용이 든다. 유저들을 계속해서 게임에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핵과금러, 고인물의 엄청난 콘텐츠 소모 속도를 따라잡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형 MMORPG들의 개발 인력은 출시 이후에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이다. 또한 MMORPG 안에는 온갖 악당과 또라이가 가득하다. 핵사용자, 버그 사용자, 매크로 작업장 등을 솎아내고, 일반 유저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려면, 충분한 수의 전담 인력을 배치해야만 한다.

 

이야기를 한번 정리를 해보자.

 

MMORPG는 개발 및 운영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드는 장르이다. 흥행에 실패하면 게임 개발사가 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MMORPG 장르에는 이미 와우라는 끝판왕이 존재한다. 웬만큼 뛰어나지 않고서는, 와우를 플레이하는 유저를 유치하기가 쉽지 않다. 원래도 돈이 많이 들어갔지만, 와우 비슷하게라도 때깔을 뽑으려면 이제는 정말 많은 돈을 들어야 한다. 늘어난 허들과 별개로 MMORPG 장르의 인기도는 점점 떨어지는 상황이다.

 

라떼만해도(89년생), 바람의 나라 같은 MMORPG들은 초중고생들이 즐겨 하는 국민 게임이었다. 그러나, 현재 MMORPG는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이나 하는 폐인 게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게임 플레이 시간이 짧고, 과금 능력이 낮은 학생들은 대부분, LOL, 서든 배그 같은 가벼운 게임을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와우 이후로 전 세계 게임 개발사들은 대형 MMORPG 게임 개발에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이다.

 

그런데도,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대형 MMORPG 개발이 중단된 적이 없다. 와우 이후로도 아이온, 블레이드앤소울, 테라, C9, 아키에이지, 로스트아크 같은 대작 게임들이 계속해서 개발되었다. 우리나라의 게임 개발 환경은 기본적으로 척박하다. 콘솔이나 패키지 게임 (CD로 플레이하거나 스팀에서 돈 주고 사는 게임들)에 매달리는 대형 게임사는 전무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대형 MMORPG 장르가 꾸준히 개발된다는 것은, 우리나라 게임사들이 MMORPG 장르에 사실상 올인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문화 저변은 다른 나라에 비해 결코 넓지 않다. 문화란 기본적으로 풍족함에서 나온다. ‘이거 하다 잘 안돼도, 다른 거 하면 되지’라는 널널함 속에, 독창적인 시도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네임드 예술가들은 대부분 스폰서가 있거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양반이었던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경제개발의 역사가 짧은 편이다. 문화가 성숙되기에는, 직면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예체능 전공자들이 먹고살기에 너무나 척박한 곳이다.

 

그런데 가끔, 특정 분야 혹은 장르에서 월드클래스의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영화업계에는 한국형(총이나 미사일 대신 칼이 등장하는데, 현실적이라 더욱 쫄깃한) 액션 장르가 있고, 음악 업계에는 케이팝 아이돌이 있다. 척박한 현실에서 구성원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다 보면 얻어지는 예술적 성취라는 것이 있다. 풍족함이 아닌 절박함에서 나오는, 극한의 최적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다. 이 비슷한 현상이 MMORPG 업계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이름하여 'K - MMORPG'

 

이 독특한 현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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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추신

 

딴지스 여러분 덕에,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딴지 연재물을 확장하여, 이때다 싶어 열쒸미 공부, 정리하여 낸 책입니다. 아마, 현직 회계사 중, 저만큼 회계공부를 싫어했던 회계사는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저만큼도 공부를 안 했다면 못 붙으셨을 테니까요). 회계 공부를 싫어했던 제가 스스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계실 독자분들 상정해 쓴 책이다 보니 재밌습니다(아마도...). 그동안 회계 공부가 하기 싫었다거나, 회계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분들(사실상 전원)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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