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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조선의 역사는 우리에겐 암울한 사건들로 가득 찬 시기였습니다. 이 시대를 경험한 우리는 이후, 무력했던 식민지화를 반성하고, 그것을 극복하려 적극 투쟁했던 독립운동사에 많은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격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의병입니다. 이들은 개화에 반대하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고 부르짖었으며, 소위 ‘봉건적’이라 부르는 시대정신을 갖고 총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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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들 중 다수는 지주였으며, 시대를 거스르는 존재였죠. 어떤 이들은 유림(儒林)의 의병투쟁이 조선의 독립에 전혀 도움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낡아 빠진 이상이 만들어낸 ‘해프닝’ 정도로 그 가치를 절하합니다. 

 

그러한 평가가 적합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종언을 고하는 시대를 짊어진 자들이 쥐어짠 마지막 행동이 개화기의 의병투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업(業)인 글쓰기로 모든 것을 기록했죠. 요즘에서야 이들의 기록을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이들 중 을미의병(1895-1896)들이 남겼던 글로 혼란했던 그 시대를 바라보는 기사입니다.

 


 

을미사변으로 촉발되고 단발령이 기폭제가 되어 터진 을미의병엔 의외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담한 이들도 꽤 있었습니다(지난 기사 ‘의병을 적극 지지한 직업군은?’ 링크). 하지만 대부분 의병들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의(義)의 깃발이 내건 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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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옥호루)

명성황후 시해된 을미사변이 벌어진 장소

출처-<제천시 홈페이지-의병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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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내 건청궁 위치.

출처-<아주경제>

 

이중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이 이끄는 호좌의진은 강원, 충북, 경북 지역 의병의 구심점이 되어 4,000명의 병력을 갖춘 군세로 성장하며, 제천을 중심으로 충주, 단양, 원주, 영월, 안동, 문경 등지에서 활동합니다. 원주성을 점령하고,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잡은 후 처형하는 등 속속들이 전과를 올리죠. 그리고 을미의병 시기 최대의 전과라 평가받는 충주성 전투가 벌어집니다.

 

 

죽기를 각오한 의병, 충주성을 향하다

 

당시 충주는 서울 군사 400명, 일본군 수백 명, 지방 군사 400여 명이 지키고 있던, 당시로선 상당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일본군은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전보선을 깔았는데, 충주를 중앙 거점으로 삼았죠. 충주에 발령한 지방관은 일본군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해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따라서 충주성 점령은 의병에게 전략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충주위치.PNG

 

1896년 2월 15일 -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얼음을 타고 충주부를 쳐서 이기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군의 기세가 매우 성하더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퍽 많았다. 의병의 깃발이 남쪽으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강제로 삭발당한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는 행렬이 길을 메웠다. 성에 당도하니 왜장(倭將) 2명이 포를 쏘고, 지키는 군사는 또한 많았으나, 스스로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 도망하여 흩어졌으며, 우리 군사들은 둘러싸고 공격하였다. 

 

(왜적과 한편인) 관찰사 김규식은 충주 외곽에 주둔한 왜적에게 도와주기를 청하였는데, 여주 의병장 심상희가 그때 이천·여주의 왜적을 치니, 가흥의 왜적이 가서 구원하느라 충주로 오지 못했다. 또한 관찰사 김규식이 징발한 포수들은 모두가 억지로 징발되어 온 터라 의병을 칠 생각이 없었다. 대군이 성을 공격하며 총소리가 요란하여 충주에 진동하였다. 

 

결국 관찰사 김규식을 잡아들였는데, 이튿날 지휘부의 명령으로 목을 베어 3일간 머리를 매달게 했다. 그의 강제 삭발한 해독은 어찌 한 개의 머리로 보상할 것이랴.

 

충주성 함락은 의외로 손쉽게 이뤄졌습니다. 김홍집 내각도 제천 쪽 의병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방어에 신경 쓴 상태였는데,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성을 내줬습니다. 동시에 충주의 곡식 창고를 확보하면서 보급의 급한 불을 끌 수 있었죠. 단발령을 철저히 시행했던 충청도관찰사의 김규식을 잡아 효수하는 쾌거는 전국의 관리를 떨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일본군은 전열을 정비해 다음 날부터 반격을 시작합니다. 특히 충주 서쪽의 최대 곡식 창고 가흥창의 일본군, 그리고 충주 남부 전보선의 요지인 수안보의 일본군이 포위 전선을 좁혀왔죠. 충주를 뺏기면, 일본군 입장에선 내륙 전선 전체의 보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는 터라, 각지의 수비대를 끌어모아 대응했습니다. 특히 3월 2일에는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집니다.

 

단발령.PNG

1895년 11월 15일 내려진 "단발령' 공문(좌)

단발령이 내려지자 상투를 자르는 모습(우)

 

 

충주성을 빼앗긴 왜군의 반격

 

1896년 2월 29일 ~ 3월 2일 -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적들이 충주 남부에서 진격해오니, 군세를 성안으로 물려 농성하기 시작했다. 적들은 산에 올라 포를 쐈고, 우레가 공중을 가르는 듯하였고, 떨어진 포탄은 민가를 마구 부쉈다. 서양 대포는 아주 멀리까지 닿으면서도 재빨리 쏠 수 있으니, 조총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틀 동안 치열한 교전을 치르니 적들이 일시 후퇴했다가, 3월 2일에 다시 진격해왔다. 밤낮으로 포격전이 벌어졌다. 포탄이 공중을 누비는데, 성안에는 멀쩡한 집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추운 겨울바람이 세차 깃대가 부러지고, 활줄마저 끊어버렸다. 포탄이 부엌 벽을 부숴 밥 짓는 여인이 놀라 거꾸러지고, 성벽 위에는 피 흘린 시체가 쌓여 있어 병사들에 대한 보급도 쉽지 않았다. 적들은 28차례나 걸쳐 성벽에 사다리를 대고 진입을 시도했으나, 우리 군사들이 올라오는 족족 모두 사살했다. 그러나 밤낮으로 고전하여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정부군 2개 대대, 일본군 3개 중대로 구성된 진압군은 의외로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때 의병군은 개틀링 기관총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동학농민운동 때와는 달랐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우금치 전투1.gif

동학농민운동 우금치 전투2.gif

SBS드라마<녹두꽃>에서 묘사된

동학농민운동 당시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우금티 전투 모습.

 

당시 의병들이 구사하던 전략은 조총의 사거리 안까지 진입한 후, 한 점에 집중타격하는 대규모 화망 구성 전략이었습니다. 반면 공성전 이전까지의 진압군은 원거리 저격 및 포병 활용 전략이었습니다. 실제로 교전 기록을 보면, 일단 근접에 성공하면 대체로 의병들이 괜찮은 전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대비를 단단히 한 일본군과 교전하면 그 사거리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겨워했죠. 게다가 충주성 전투는 산 위에서 쏟아지는 일본군의 포격과 저격을 견뎌내면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의병이 노획한 암스트롱 야포 2문을 포함한 도합 60여 문의 화포, 그리고 1,000정의 전장식 라이플이 쏟아붓는 화망은 일본군에게도 부담이었을 겁니다. 20여 일간 충주성은 떨어지지 않았고, 의병은 매우 잘 싸웠습니다. 다만 의병 전쟁이 늘 그랬듯, 교환비는 항상 절망적이었습니다.

 

1896년 3월 4일 – 일본군 후비보병 제10연대 제1대대, 충주지방 전투 상황을 일본 공사에게 보고함

 

2일 오후 다나카 대위의 보고에 따르면, 적은 충주성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지점에 진을 치고 수비하고 있었음. 오후 1시에 전투를 개시하여 이들을 격파하였음. 적의 사망자는 6명. 부상자는 불명이며, 구식대포 2문을 노획하였음. 우리 병사 사상자는 없음. 또한 사카이 소위는 가흥으로 행군 중 충주 남단에서 적과 충돌, 이들을 격퇴하고 계속해서 충주를 공격함. 적과 약 400미터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3시간 동안 포격전을 벌였으나, 적이 농성하며 사수하였기에 일단 철수하였음. 적의 사상자는 불명이며 아군 1명 경상.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의병은 계속해서 충주성을 방어했지만, 핵심 목표라 할 수 있는 일본군에게 타격은 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지속적인 소규모 전투 및 포격전으로 큰 피해를 내고 있었죠. 이러한 소규모 전투에서 의병 부대 내 핵심 인물이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1896년 2월 11일 -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중군장 이춘영(李春永)이 수안보의 적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별동대를 운영하면서 왜군의 병참기지인 수안보로 진출하였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던 중, 이춘영은 손수 육혈포(리볼버)를 쏴 봤는데, 리볼버의 탄환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주변 사람에게 총을 주며

 

“이게 왜 안 되는지 살펴봐 달라.”

 

라면서 은폐해 있던 나무 밖으로 나간 순간, ‘팽’하며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에 얼굴을 맞았다. 그가 죽자 사기가 떨어진 별동대는 철수하였고, 길가의 사람들은

 

“이분이 우리의 머리털을 보전하게 하려다 결국 자기 목숨을 바쳤다.”

 

라며 통곡했다.

 

리볼버 권총.jpg

리볼버 권총

출처-<위키백과>

 

이춘영 묘.PNG

경기도 양평군에 위치한 의병장 이춘영의 묘. 

출처-<doopedia>

 

의병이 일본군 또는 관군과 그나마 유리하게 싸울 방법은 성벽이나 진지를 통한 화망 형성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군은 전보를 통해 빠른 정보 교환이 가능했고, 세밀한 근대식 지도를 만들면서 지리 파악에 신경 썼죠. 산지에서 일어나는 소규모 전투 등에서도 피해를 입은 건 오히려 의병이었습니다. 

 

 

적보다 더 힘들게 했던 건, 보급

 

결국 누적된 피해가 극심해지자, 유인석은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후퇴합니다. 이때 의병이 충주성 안에 남긴 전략자원을 보면, 쌀 100석, 탄환 370상자, 화약 약 100관, 구식 대포 5문, 화승총 300정, 창 700개, 칼 50개, 전사한 자들의 시신 58구였다고 합니다. 의병에게는 장기전을 지속할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적보다 의병을 더 힘들게 했던 건, 보급이었습니다. 

 

유인석 대장에게 매부 나상헌(羅相軒)이 편지를 보냈다. 

 

“의병에 군량이 필요한 것은 저도 통감하나, 이러다간 굶어 죽겠습니다. 이번만큼은 면제하여 주십시오.”

 

유인석 대장은 이렇게 답했다.

 

“비록 군량을 공급하다가 굶어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義)에 죽는 것이다.” 

 

『안공하사실기대략(安公下沙實記大略)』

 

1896년 2월 7일(음력) -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군관 임경준을 보내어 판서(判書) 정해륜의 집에 가서 군수품을 독촉해서 받아들이게 했는데, 그 집에서 경준의 무례함을 호소해 왔다. 그래서 임경준을 베려 했으나, 여러 사람의 탄원과 지휘부의 명령으로 집행하지 않았다.

 

유인석의 격문.jpg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이 각처에 보낸 격문.  

격문의 내용 해석 링크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호좌의진은 처음 발족할 때만 해도 다른 의병에 비해 비교적 넉넉한 군량과 탄약을 확보했습니다. 그 까닭 중 하나는 유인석의 태도였죠. 가까운 이에게도 “군량을 공급하다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로서 죽는 것이다”라는 비타협적 노선을 견지했고, 이 강직함이 의병을 모이게 한 구심점이었습니다.

 

유인석은 충주성을 공략하면, 충주의 명문가들이 호응하여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충주는 한양에서도 이름난 사대부들이 많이 사는 큰 도시였죠.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판서 정해륜의 집에서 군량을 요청했다가, 오히려 면박을 당하는 일도 있었죠. 약간의 호응도 있었지만, 충주의 유지와 명문가들은 의병과 관군의 교전을 관망하며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게다가 고종은 의병해산을 독려했으니, 의병으로서는 명문가들의 참여를 끌어낼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산화된 의병과 왜군의 잔혹한 보복

 

결국 유인석은 후퇴를 결정합니다. 처음엔 제천, 이윽고 단양까지 후퇴하였죠. 계속해서 일본군의 병참기지인 가흥창과 수안보의 공격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병장 김백선이 지원군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극상을 일으켰다가 처형되기도 했죠. 

 

이전에는 김백선의 처형이 계급 갈등으로 묘사되었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기류가 없진 않았겠으나, 김백선이 부하 30명과 함께 하극상을 일으킨 건 유인석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호좌의진은 급격히 무너졌죠.

 

호좌의진의 후퇴를 비롯, 전국에서 벌어진 의병단도 차례차례 진압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잔인한 보복도 끊이지 않았죠.

 

1896년 2월 20일(음력) - 『일록(日錄)』

 

왜군들의 추격이 무서웠다. 19명의 왜군들이 의병들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 갔는데, 의병들은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고 한다. 이윽고 저녁 무렵, 동쪽에서 큰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는데, 안동의 여러 집이 타고 있는 연기였다. 남쪽에서도 불기둥이 치솟았는데, 대구에서 올라온 일본군이 집들을 방화하고 있다고 한다.

 

정미의병.jpg

1907년 영국인 종군기자 프레더릭 매켄지가

양평군 지평 인근에서 촬영한 정미의병.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칠조약 강제 체결, 군대 해산 등을 계기로

1907~1910년 사이 발생한 항일구국적 근대 의병봉기다.

 

유명한 의병 사진을 남겨준 프레더릭 매켄지도 1907년 정미의병 전쟁 때 충주·제천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보복을 보며, 

 

“충주에서 제천까지를 연결하는 간선 도로변의 마을들의 8할이 모두 파괴되었다.”

 

라고 증언합니다. 또한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집을 방문하니, 일본군이 그 집의 어린 딸을 죽인 후, 마을 사람들이 사정하여 집은 태우지 않은 것이라는 얘기를 듣죠. 매켄지가 말한 건 정미의병(1907) 때로 1895-1896년의 을미의병과는 다른 시기지만, 잔혹한 일본군의 보복은 그때나 저때나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을미의병 당시 충북 북부 지역과 경북 지역의 조선인들은 위 일기의 내용처럼 의병에 가담했건 안 했건, 일본군으로부터 이처럼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을미의병은 이렇게 산화했습니다. 대세가 기울었다는 건 의병단 모두가 알았죠. 이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의병장 3명은 서로 각기 다른 선택을 합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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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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