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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침실에 침입한 영국 시민

 

1982년, 마이클 파간(Michael Fagan)이라는 영국 시민이 버킹엄궁에 들어가 엘리자베스 2세의 침실에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마가렛 대처가 수상이던 시절로, 영국의 일반 대중들을 복지혜택에만 기대어 살아가는(일명 ‘영국병’) 사람들로 둔갑시켜 무자비한 민영화를 추진하던 시기다. 이 시기 많은 영국민들이 고통 속에 빠졌다. (관련 기사 링크)

 

마이클 파간은 이러한 대처의 정책에 이를 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직접 여왕을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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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파간(좌)과 엘리자베스 2세(우)

 

하지만 평범한 영국 시민이었던 그가 여왕을 직접 대면한다는 건, 당시만 하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지금이라고 쉽다는 건 아니다). 방법을 고민하던 그는 그냥 찾아갔다.

 

막가파로 찾아간 버킹엄 궁전. 군기가 바짝 든 근위병 교대식이 유명한만큼 경비가 삼엄할 것 같았으나 마이클은 그냥 담장을 훌쩍 넘어 쉽게 들어갔다. 그렇게 몰래 들어갔던 버킹엄궁은 구멍투성이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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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킹엄궁전 근위병 교대식

 

첫 번째 방문(?) 때는 포도주 한 병을 갖고 도망쳐 나왔고, 한 번 갔으니 두 번은 못 가겠는가 싶어 마이클은 다시 버킹엄 궁을 찾아갔다. 이번엔 여왕의 침소에 들어갔다 . 당시 경찰과 언론은 그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웠지만, 정신병자가 침입했던 것으로 해야 궁 침입이 납득될 수 있어 그런 것이지 실은 환자는 아니었다는 후일담도 있다.

 

여하튼 간에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한 노동자가, 답답한 나머지 여왕을 찾아갔고, (그것도 두 번씩) 결국 독대를 해 대처 수상 욕을 엄청나게 했다는 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영국인들이 여왕을 존경하는 이유 

 

여왕이라고 정치적인 입장이 왜 없었겠는가? 대처가 수상이 되었을 땐, 최초의 여성 리더였고 여왕도 같은 여성이니 공감대가 있을 거 같아 매우 달가워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여성과 달리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자신의 확고한 신념 아래 정치를 해 나갔던 대처와 여왕이 잘 맞을 리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치는 걸 여왕도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얼마나 다급했으면 궁 안으로 찾아오기까지 했을까. 

 

“저 사람(대처)만 아니면 내가 이런 봉변을 안 당할 수 있었을 텐데”

 

라며 왜 원망을 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많은 이들이 현재 영국 여왕은 상징적 존재일 뿐 실질적 권한은 크게 없다고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여왕은 상당한 실질적 권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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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여전히 영국의 여왕은 (꼭 여왕이 아니더라도 국왕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수상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법률에 대한 실효적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다. 

 

거의 모든 경우 여왕은 하원과 상원에서 통과된 법률안에 대해 형식적 재가만 한다고 알고 있지만, 여왕이 재가하지 않으면 의회는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지만,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도 재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법안을 무기한 연기해 실효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 

 

하원에서 통과된 법이나 상원에서 통과가 안 된 법은 다시 하원으로 돌아가 통과되면, 상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여왕의 재가만을 받아 공식적인 법이 될 수도 있다. 

 

영국에서 왕이 공식적으로 법안 승인을 거부한 경우는 1707년이 마지막이지만, 10여 년 전 총리실 문서가 기밀해제 되면서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현대에 와서도 왕실이 법안을 거부한 경우가 있었다고 밝혀졌다.  

 

이 외에도 별의별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법적으로 보장된 수많은 권한을 쥐고 있다. 때문에 여왕이 권한을 행사한다해도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법이 그러한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거의 하지 않았다. 엄청나게 절제했다. 그것도 무려 70년 동안. 군림은 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은 실제로 (거의) 지켰던 것이다. 여왕은 자신의 위치와 권한 등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전통을 지키기 위한 자리로서 자신을 국한시키며 권한을 절제하고 살아왔다. 때문에 영국의 국민들은 여전히 여왕을 사랑하고 왕실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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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같은 공화정(Republican)을 배경으로 한 국가에서 자란 이들에게 인간은 모두가 평등한데 뭔 여왕? 이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의회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영국에서 아직까지 왕이 어쩌고 저쩌고하는 것은 모순이요, 어불성설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재 영국의 왕실 체제에는 여전히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수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 뒤집어지지 않고 서서히 바뀌어 가는 모습을 통해 사회의 변혁을 이루고자 했던 이들의 피와 땀이 섞여 있는 것이다. 신, 구의 조화가 긴 시간을 통해 서서히 이루어져 가는 모습도 함께 담겨있다. 

 

별 거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매우 대단한 일일 수 있는 게, 지구상 어떤 나라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전쟁이나 천지개벽, 사회변혁 운동 같은 게 일어나면, 전통이라는 것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려 역사의 뒷편에 나 앉아버리기 쉽기 때문에 이를 공유, 공존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에 있는 수 백 년된 건축물 사이로 보이는 현대식 음식점과 카페, 쇼핑몰의 조화가 이런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플래티넘 주빌리’를 기념하는 영국인들

 

영국에선, 오랜 기간 결혼생활을 이어간 부부에게 특별한 명칭을 부여하며 축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칠순이나 팔순과 같은 개념. 특히 긴 세월을 함께한 부부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가령 50주년 결혼 기념을 Golden Anniversary, 60주년을 Diamond Anniversary, 그리고 70주년을 플래티넘 기념일(Platinum Anniversary)이라고 부른다. ‘주빌리(Jubilee)’는 특별한 기념을 할 때 붙여지는 말이다. 하여 여왕의 재위 70주년을 기념하는 것을 일컬어 ‘플래티넘 주빌리(Platinum Jubilee)’라 부르고, 그 기간(지난 6월 2일-6월 5일) 동안 진행된 행사를 ‘플래티넘 주빌리’ 행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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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즉위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1926년에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는 현재 96세로, 24세인 1952년 2월 6일에 여왕으로 즉위했다. 대관식은 1953년 6월 2일. 아버지인 조지 6세가 급사에 이르자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70년 동안 왕위를 지켰다.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의 총리는 윈스턴 처칠이었고, 이후 14명의 총리가 그녀를 거쳐 갔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역사. 영국의 찬란했던 영광을 함께 했지만, 온갖 종류의 비밀과 추악함도 모두 담아내고 있는 1인이다. 

 

동시에 가장 많은 세금을 국가에 헌납한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첫 여성 왕족이며 당시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 유일한 군주로서 추앙받고 있다. 실제로 플레티넘 주빌리 행사에 모인 군중들을 보면, 아직도 건실한 영국 왕실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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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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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he Independent>

 

플래티넘 주빌리 행사 기간 열린 행사들.

 

“역사상 2번째로 오랜 기간 즉위한 여왕의 시대에 살고 있는 기분이 묘하네요.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있는 내가 자랑스럽고요.”

 

플래티넘 주빌리를 기념하는 영국인의 인터뷰다. 인터뷰에서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진 않겠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지금이 어떻게 기록될지 예측해보고, 그곳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스토리텔링의 나라 영국민들답게 왕실의 존재를 썩어져 가는 구습으로만 여기진 않고 있다. 

 

영국 내에서도 왕실의 존재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여왕 이후 왕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3주 전 진행됐던 플래티넘 주빌리 행사를 즐기던 대다수 영국민의 당장의 생각은 위 인터뷰 내용과 같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 나오는 이슈들도 쫓아가기 버거운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영국 여왕 70주년이 뭔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특파원 보고’를 드린다. 훗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사건을 직접 목도했으니 이를 기사로 남기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70주년이라 긍정적으로 묘사를 했지만, 개인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찬성하지도 않을뿐더러 여왕을 좋아하거나 존경하진 않는다)

 

 

여왕과 반대로 야유받는 총리, 보리스 존슨

 

“또라이 불변의 법칙”

 

어느 조직이든 이상한 사람들이 한 명씩 꼭 있다는 뜻에서 유래된 이 말은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수없이 고개를 끄떡이게 하는 명언이다. 이런 또라이들은 우리 일상 주변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런 또라이가 국가의 수장이 된다면, 국가의 존폐 위기까지는 아닐지언정 엄한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게 되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이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고 선출직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 우리나라에도 대표적 인물이 있듯, 영국엔 보리스 존슨 총리가 있다. 

 

존슨은 코로나 락다운 기간 동안 사람들을 집 밖에 나오지 못하고 하고 자기는 동료들과 여러 번 술파티를 벌였다. 이른바 ‘파티게이트’이다. 핵심 주동자는 단연 총리 보리스 존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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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민들의 분노가 치달으며 이 사건은 지난해부터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의회에서 큰 이슈로 다뤄줬다. 급기야 경찰조사까지 진행됐고, 그에 대한 벌금형이 각 관련자들에게 내려진 상황이다. 존슨이 이 명단에 포함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프라이버시라나 뭐라나). 해당 조사를 담당한 런던경시청은 벌금형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알렸다. 

 

사건이 진정되지 않으며 파티게이트 조사를 최초로 담당했단 ‘수 그레이’(Sue Gray)의 조사 결과, 내용이 담긴 리포트가 공개되었다. 재무부 장관 리시 수낙을 비롯하여 존슨도 범칙금 통지를 받았다.

 

이에 총리와 함께 몸담고 있는 보수당은 당내 평의원 모임인 ‘1922 위원회’를 통해 담화를 발표, 결국 총리를 계속 신임할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투표를 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다수당인 보수당이 리더를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은 총리를 교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결과는 신임 211 vs 불신임 148이 나오며 존슨은 향후 최소 1년간은 유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불신임 수가 148명으로 보수당 의원의 41.2%가 된다는 건 향후 리더십을 발휘하는데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지선 때도 노동당에 패했던 것(관련 기사)을 감안하면 이대로 가다가는 다음 총선에서 기대가 어려운 상황이다. 

 

 

영국인이 존슨에게 열받는 핵심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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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 게이트 시위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영국인 친구가 파티게이트의 핵심은 단순히 모여서 술파티를 벌인 것에 끝나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처음 이슈가 됐을 때 부정을 했다는 것. 그러다 증거를 내밀고 확인을 요청하니 그제서야 미안하다 사과를 한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범죄자가 심문을 받을 땐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정치인이자 한 국가의 리더가 이런 식으로 대처를 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영국민들이 더 분노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은 정서 때문이다. 

 

(영국 브리핑 18 내용(링크) 일부,

 

의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정책은 잘못 펼칠 수 있다. 어떻게 모든 위기의 순간을 알맞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기에 누구나 실수도, 잘못된 판단도 할 수 있다. 정책에 실패한 것에 대해선 유럽인들은 생각보다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양심 없는 짓과 그에 대한 뻔뻔한 태도는 용납하지 않는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오히려 그게 무슨 큰 죄가 되느냐는 식의 반문, 혹은 잘못했으나 자리를 내려올 정도는 아니라며 끝까지 이익 혹은 권력을 거머쥐고 싶어 하는 욕망이 보이면, 사실상 아웃이다) 

 

존슨의 추잡한 변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파티게이트로 판이 뒤집힐 위기에 놓이니, 급기야 노동당 당수가 점심 때 피자와 맥주를 곁들어 먹은 것을 트집 삼아 너도 술 마셨으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하느냐는 식의 적반하장식 태도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하나하나 차곡차곡, 선거 패배의 원인을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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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플래티넘 주빌리 행사에서도

국민들의 야유를 받은 존슨.

출처-<한겨레> 링크

 

물론, 국민들은 집에 가둬놓고 술 먹고 놀던 거 틀키니, “미안, 안 그럴게”하며 이게 총리직과 무슨 관계냐 뻔뻔하게 나왔던 그답게 유임이 된 결과에 대해 긍정적이고 확정된 결과가 나왔으니 앞으로 일이나 열심히 하자는 말로 퉁쳤지만, 전술했듯 그의 리더십이 앞으로 정상적으로 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유임 결과 이후, 존슨의 발언을 보면,  

 

"I think it’s an extremely good, positive, conclusive, decisive result which enables us to move on, to unite and to focus on delivery and that is exactly what we are going to do.”

 

(짧게 정리하면, 자신의 유임 결과는 매우 정당하며 영국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결정이었다는 말)  

 

어떻게 보면, 세습된 신분인 여왕은 사랑받고 있고, 선출된 총리는 야유받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국왕이란 존재가 민주주의와 맞는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을 이끌고 있는 존슨 총리만을 보고 있자면, 민주주의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영국뿐 아니라 국가 지도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는 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국가들이 있다. 이들을 보며, 이게 민주주의인가라는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선 국가 운영 능력보다도 다른 것을 더 키워야 하는 것인가 헷갈리기도 한다. 

 

어쨌든 민주주의 체제에서 똘아이가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면, 그만큼 중요한 게 지도자를 견제하는 시스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족한 점도 있지만) 영국의 경찰과 언론은 나름의 역할은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존슨으로 인해 시끄러운 영국이지만, 일견 부러운 생각이 든다.

 

이상, 지금까지 아무도 관심 없을 거 같은 지구 반대편 영국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