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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조선의 역사는 우리에겐 암울한 사건들로 가득 찬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 성격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습니다. 의병입니다. 이들은 개화에 반대하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고 부르짖었으며, 소위 ‘봉건적’이라 부르는 시대정신을 갖고 총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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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들 중 다수는 지주였으며, 시대를 거스르는 존재였죠. 어떤 이들은 유림(儒林)의 의병투쟁이 조선의 독립에 전혀 도움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낡아 빠진 이상이 만들어낸 ‘해프닝’ 정도로 그 가치를 절하합니다. 

 

그러한 평가가 적합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종언을 고하는 시대를 짊어진 자들이 쥐어짠 마지막 행동이 개화기의 의병투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업(業)인 글쓰기로 모든 것을 기록했죠. 요즘에서야 이들의 기록을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이들 중 을미의병(1895-1896)들이 남겼던 글로 혼란했던 그 시대를 바라보는 기사입니다.

 

 


 

을미사변으로 촉발되고 단발령이 기폭제가 되어 터진 을미의병엔 의외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담한 이들도 꽤 있었습니다(지난 기사 ‘의병을 적극 지지한 직업군은?’ 링크). 하지만 대부분 의병들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의(義)의 깃발이 내건 이들이었죠.

 

약 1여 년 전의 동학농민운동 때와 달리 을미의병은 무참히 당하진 않았습니다. 군사적 요충지인 충주성을 함락했고, 이후 반격하러 온 진압군(정부군 2개 대대, 일본군 3개 중대로 구성)에도 쉽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교환비는 엄청나게 차이 났고, 피해는 누적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보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의병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충주 명문가(자산가) 대부분이 관망하는 자세만 취할 뿐 의병을 지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보급품을 마련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죠. 이때부터 의병들은 후퇴, 진압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일방적이고도 잔혹한 보복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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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한 마을(1907)

 

 

3명의 의병장, 3가지 선택

 

뜨겁게 불타올랐던 을미의병은 이렇게 산화했습니다. 대세가 기울었다는 건 의병단 모두가 알았죠. 이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호좌의진의 의병장 안승우의 선택은 죽음이었습니다.

 

1896년 5월 26일 -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거센 바람과 궂은 비가 심했다. 적은 우리의 화승총이 비를 만나면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을 알고, 제천성을 향해 총공격했다. 마침 탄환을 보급하다가, 누군가 “탄환 상자를 가져와라!”라고 소리쳤는데, 적이 이 소리를 듣고 탄환이 떨어진 것을 알아 서문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적들이 밀밭 고랑과 논두렁 사이에 엎드려서 총격을 가하니, 탄환이 비처럼 쏟아졌다.

 

비바람이 심해 조총에 전혀 화약을 넣을 수 없었고, 심지에도 불이 붙지 않았다. 장수와 군사들은 제각기 흩어지는데, 안승우 장군은 정색하면서 말하기를,

 

“이 땅이 내가 죽을 곳이다!”

 

라고 소리쳤다. 결국 오른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넘어지는데, 깃발은 결코 손에서 놓지 않고 다가오는 적들을 꾸짖었다. 적들에게 끌려간 이후에도,

 

“네놈들에게도 조선 사람의 심장이 있다면 생각해 보라. 개화한 이래로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국모가 시해당했고, 임금이 머리를 깎았으며, 모든 성인의 제도와 중화의 명맥은 하루아침에 멸망됐다. 네놈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도리어 왜놈들의 앞잡이가 되어, 충의지사들을 죽인단 말인가! 나는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라고 꾸짖으니, 적들이 노하여 구타하였다. 구타를 당하면서도 장군은 끝끝내 부르짖었고, 결국 몽둥이로 살해되었다. 향년 32세였다. 

 

이 소식을 전하여 듣는 사람 중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치 삼국지 혹은 임진왜란 시기의 기록처럼, 안승우는 고전적으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호좌의진에서 가장 강직하고 결단력 있었으며, 여러 전과를 쌓은 장수 중 하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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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에 위치한 의병장 안승우의 묘

출처-<doopedia>

 

안동의진의 2대 의병장 김도화는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의 선택은 ‘의병 자진해산’이었습니다.

 

1896년 7월 2일(음력) - 『일록(日錄)』

 

마을 사람이 향회에서 들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대장 김도화가 관찰사 등에게 의병 해산을 신고한 후, 무사히 돌아와 쉬었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직접 펼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의(義)라는 글자는 이제 끝장이었다. 너무나 통탄스러웠다. 향회에서는 의병을 해산하는 공문을 돌렸고, 서울 군사를 전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안동부의 탈환과 포기, 재탈환을 반복하던 안동의진은 호좌의진과 함께 공동작전을 벌였지만, 무참히 패배합니다. 이후 태백산 등지로 숨어 있다가, 고종의 의병해산을 종용하는 글이 내려오자 자진해산을 신고하죠. 

 

이때, 김도화의 나이는 71세였습니다. 자신은 지금 죽어도 되지만,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자신을 따라나선 젊은이들의 앞날을 열어주기로 했죠. 사람들은 “의(義)가 끝났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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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학교 후문 근처 원룸단지에 위치한

의병장 김도화의 묘

출처-다음 블로그<장안봉(微山)>

 

그런데 죽지도, 해산하지도 못하는 의병장이 있었습니다. 유인석입니다. 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결코 부러져서도, 굽혀서도 아니 될 몸이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요동 이주였습니다.

 

1896년 7월 16일(음력) - 『의암유선생서행대략(毅庵柳先生西行大略)』

 

추격대 3백여 명이 우리 군사를 습격한다는 첩보를 얻었다. 유인석 장군은 즉시 명령하여 군사를 매복시켰다. 이곳은 지리가 생소한 데다가, 밤중에 안개가 가득해 습격을 당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적들은 산 위를 먼저 점령하고 우리를 습격하려던 참인데, 우리 군사들이 대오를 지어 산을 오르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하며 공중에 헛총을 연달아 쏘았다. 강을 등진 우리 군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철포와 짧은 무기를 가지고 시체를 뛰어넘어 공격했다. 결국 적들은 패하여 달아났으나, 적들의 손해는 일부에 불과하고, 우리 군사는 과반이 다쳤다.

 

유인석은 일본의 감시가 닿지 않고, 청나라의 원조를 기대할 수 있는 요동으로의 이주를 결정합니다. 이윽고 추격대와 소규모 교전을 치르며 강원도에서 평안도 안변, 초산에 닿죠. 초산에서 추격대와 마지막 전투를 치룬 이후, 그는 마지막까지 남은 의병 일부와 압록강을 건넙니다. 그러나 의병단은 청나라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고, 기대했던 원조도 받지 못했죠.

 

최악의 상황이 되었으나, 유인석의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남은 생애를 가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성리학을 가르치면서 중화의 맥을 잇자고 부르짖었고, 의병의 부활을 위해 헌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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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유인석 (1842-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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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시에 위치한 의병장 유인석의 묘

출처-<문화재청>

 

을미의병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많은 자가 죽었고, 많은 고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세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죠. 특히 전기의병장들(을미의병)이 부르짖은 위정척사의 깃발은 을미의병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2년간이나 처참한 투쟁을 이어갔던 후기의병(정미의병)도 대세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군대 해산을 기점으로 촉발된 후기의병은 5만의 의병 전사자와 수백 명의 일본군 전사자를 남기고 철저히 진압되었죠.

 

 

의병을 바라보는 ‘엘리트 조선인’의 시선

 

수백 년 전만 해도 의병은 ‘영웅’이었습니다. 사대부들은 가산을 털어 의병을 꾸렸고, 나라는 그 대가로 지방에서 사대부가 누리는 특권을 인정해줬죠. 조선 후기의 왕권이 ‘떡락’한 것을 두고 혹자는 ‘왕조가 의병에 빚을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의병 행위가 큰 명예와 영광을 주는 ‘의로운 일’이라는 인식은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을미의병을 기점으로 의병을 ‘폭도’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등장합니다.

 

1896년 1월 26일 - 『한성신문(漢城新聞)』

 

각지의 폭민(暴民)이 봉기하는 일은 단발령 때문이니, 비록 실제로는 지방의 흉도, 야심가, 불평가가 평범한 백성을 ㅁㅁ하였을지언정, 단발령이 구실이다.

 

1896년 4월 30일 - 『독립신문』

 

안동관찰사 나남규가 군부에 보고하기를, ‘진짜’ 의병은 대군주 폐하의 칙교를 보고 자신 해산하였지만, ‘거짓’ 의병은 지금 많이 모여 행패가 무수한데, 괴수 서상열이 폭도를 모집한 것이 삼천여 명이다.

 

당시 조선의 엘리트들,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유학하다 온 엘리트들의 시선에서 의병은 ‘폭도’였고, 의병대장은 ‘괴수’였습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폭도의 만행’과 ‘정부군의 진압’을 주로 보도했죠. 1907년 후기의병(정미의병)이 벌어질 때도 이를 호의적으로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 정도였습니다.

 

 

왜 엘리트 조선인은 의병을 폭도로 봤나 

 

엘리트들은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교’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조선 정부 자체의 개혁 혹은 조선 내부에서의 혁명은 불가능하거나 무익한 일이라고 여겼죠. 

 

그래서 의병들이 일본을 공격하는 것은 오히려 조선 조정이 일본에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외부대신 이완용이 일본 공사에게 보낸 문서에서 이러한 시선은 농후합니다.

 

1896년 3월 26일 -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3권

 

대조선 외부대신 이완용의 답장.

 

우리나라 각 지방의 도적떼가 백성을 해치며 제멋대로 흉악하고 포악한 짓을 했습니다. 귀 나라 사람들이 살해된 것 또한 무려 18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를 알고 나니 통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조사하였더니 이들은 ‘고집스럽게’ 불법을 저지르며 줄곧 교화되진 않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현재 병사를 파견하여 빨리 소탕하고 달래기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은 귀 공사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번 귀 나라 사람들이 입은 피해는 모두 해당 비적무리가 저지른 소요로 말미암았습니다. 

 

대일본 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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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1858-1926)

 

일본인을 살해한 폭도를 신속히 수사하여 처벌해달라는 일본 공사의 요청에, 이완용은 이들이 ‘고집스럽게’ 불법을 저지르고 있어 소탕하는 중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만 을미의병 때는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가지 않은 상태여서, 실제로 체포된 의병장들은 고종의 조치로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법권이 넘어간 뒤로 일본에 의한 재판을 받은, 무수히 많은 후기의병장들의 목숨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죠.

 

당시 조선의 엘리트들이 의병을 반대하는 주 논리 중엔 조선 주재 외국 외교관들의 치안을 위협한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영국 공사 등은 당시 조선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자국민의 조선 여행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죠. 외교 노선으로 독립을 추진하려던 고종과 당시 엘리트에겐 큰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종은 의병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내립니다.

 

짐은 덕이 적고 정치에 어두워, 수십 년 동안 매년 변란이 일어나는 등의 변고가 끊이지 않았다. 모두 짐이 한쪽 말만 들어 농간이 생겨난 것이니 첫째도 짐의 과오이며, 둘째도 짐의 과오로다. 지금 충직한 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이 흉한 것들을 제거한다면, 민심이 바르게 될 것이다. 

 

... (중략) ...

 

단발령에 대해서는 어찌 차마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요망한 적도들이 미친 듯이 협박하여 이 지경이 났으니, 결코 짐의 뜻이 아니었다. 전국의 사대부들이 의병을 일으켜 마침내 경군과 서로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이 또한 짐의 뜻이 아니었다.

 

경군이나 의병이나 모두 짐의 자식들이다. 경군은 서울로 올라오고, 지방은 고향으로 돌아가 짐의 근심을 끼치지 말기 바라노라.

 

- 『매천야록(梅泉野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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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852-1919)

 

고종은 ‘이 모든 게 친일내각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의병해산을 종용했습니다. 각국 외교 공사들의 유언무언의 압박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을미의병이 일어나던 때는 곧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주했던 ‘아관파천(1896.02-1897.02)’의 기간입니다. 의병 진압을 위한 정부군 파병과 일본군과의 합동 작전 과정에서 고종은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겠죠. 게다가 본인이 외국 공사관에 피신해 있으니, 그 어느 때보다 외교관계가 중요했을 것입니다.

 

을미의병 기간 민간이 의병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은 까닭은 고종의 ‘해산 조칙’에 있었습니다. ‘왕이 해산하라는데 안 하면 그게 의병이냐?’라는 게 상식이 되어 버렸죠. 의병은 ‘정부 교체’를 최종적인 전략적 목표로 내세웠으므로 일종의 ‘혁명’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의 민심을 얻지 못하는 혁명은 언제나 실패로 귀결되죠. 그래서 엘리트들의 비하나 외국의 압박, 그리고 일본군의 공격보다 의병들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바로 고종의 해산 권유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러니까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고종은 마지막 희망을 의병에 걸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였을까요? 그러나 이때의 일본군 규모는 전기의병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후기의병은 일방적으로 진압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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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 군대 해산 등을

계기로 일어난 후기의병(정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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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군대 해산을 당하며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 되는 대한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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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해산 직후 훈련원 모습.

일본군들이 막사 벽에 기대 비를 파하고 있고,

연병장에는 대한제국군의 군모와 장비가 보인다.

 

조선 민중이 가진 힘을 가장 못 믿었던 것은 일본이나 서양 열강이 아니라, 아무래도 고종을 비롯한 조선 내부의 정치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혹자는 이들을 고루하다고 비웃었고, 무모하다고 비웃었습니다. 앞서 안승우는 조선 사람의 심장을 부르짖었지만, 이미 조선인의 심장은 제각기 다른 색을 띠고 있었죠. 그 모든 시도가 좌절되자, 남은 것은 글쓰기였습니다. 쓰고, 누군가 기억하기를 바랐습니다. 누군가 다시 연구하여 정교하게 편집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지금은 폭도라 불리지만, 언젠가는 자신들의 희생이 주목받는 날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 희미한 흔적을 조금이나마 엮어 보았습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패배할 것이 분명한 전쟁으로 나서는 이의 모습’을 배웠습니다. 한 명의 개인으로서 시대 앞에 무력해질 때,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고루했으나 강직했던, 용맹했으나 동시에 무력했던, 의병들의 일기에서 시대 앞의 개인이 빛나는 모습을 다시금 찾아봅니다.

 

 

 

참고문헌

 

(1)스토리테파마크(http://story.ugyo.net/)

(2)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자료집(https://e-gonghun.mpva.go.kr/)

(3)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4)구완회, 「을미의병기 호좌의진의 충주 지역 활동」, 『역사교육논집』 58, 2016.

(5)심상훈, 「한말 경북지역 의병일기의 사료적 특징과 활용을 통해 본 선비정신」, 『국학연구』 28, 2015.

(6)이동우, 「유인석과 호좌의병의 항일의병전쟁」, 『의암학연구』 14, 2016.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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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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