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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개를 먼저 하겠다. 전공은 정치학이며, 대학에서는 정치와 행정 분야의 과목을 주로 강의한다. 최근에는 한일의 정치·행정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비교 연구하고 있다. 

 

소개를 먼저 한 이유는 이 글의 테마인 ‘일본 문화’는 나의 전공분야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일본에서 30여 년 생활하면서 느끼고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그 위에 얄팍한 지식을 덧씌워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미리 고백하기 위함이다. 

 


 

한류의 열풍으로 도쿄의 신오쿠보는 한국거리로 둔갑한지 오래되었으며, 핫플레이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본의 슈퍼나 편의점, 음식점, 패스트푸드점 어느 곳에서든지 손쉽게 김치를 비롯한 한국 요리, 한국 상품을 접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김치 냄새, 마늘 냄새난다고 하는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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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신오쿠보 거리

 

내가 일본에 첫발을 디딘 30여년 전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한국의 경제력과 민주화가 과거에 비해 현격하게 진전되고, 한류로 대표되는 K-POP, K-DRAMA, K-MOVIE, K-FASHION, K-FOOD 등의 문화 예술 분야의 공헌이 매우 크다.

 

반면, 일본은 과거 20세기 한 때 아시아를 석권하고 서구 유럽 국가에도 아시아 하면 일본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국제적 위상을 뽐냈지만, 현재 과거의 영화는 꼬리를 감췄다. 아래로 깔보던 한국을 의식하고 노골적으로 견제해야만 하는 입장에 몰리게 되었으며, 문화 예술 등에서는 한국의 뒤꽁무니만을 바라봐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사실에 주목하며, 이번 글에서는 일본 사회의 변천 등을 중심으로 예술・문화 산업 쇠퇴(정체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지만) 원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문화 예술에 전문성을 바탕으로 분석하는 글이 아니다. 일본에서 생활인으로 30여 년을 살며 느끼고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 분석글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이해와 판단이 개입되어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80년대 어수선한 한국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일본 문화 

 

내가 20대 청춘을 보낸 1980년대를 회상해본다. 당시 한국은 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대대적인 인프라 정비 등 건설 붐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반면 정치, 사회적으로는 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하여,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에 저항하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투쟁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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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이후, 장기간 이어진 군부독재 종식과 대통령 직선제 등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재야, 시민사회에 대해, 신군부 정권은 강압적으로 이를 제지하고 통제했다. 이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시내 곳곳에서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경찰과의 투석전으로 부서진 보도블록이 난무했다.  

 

그런 숨막히고 가슴 답답한 시절, 20대 청춘이었던 나에게 한줄기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 일본 문화였다. 일명 ‘망가’로 불리는 일본 만화를 비롯한 비디오, 음악 테이프, 잡지 등을 통해서 선진국인 일본의 문화를 간접체험하면서 심리적 오아시스를 찾았다. 하지만 이런 일본 문화도 자유롭게 접할 수도 없었다. 

 

일본 문화는 퇴폐적 왜색문화를 조장한다는 낙인이 찍혀 전면 수입・유통이 금지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탐구심과 넘쳐나는 충동적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던 치기 어린 청춘은 금지된 즐거움과 쾌락을 찾아 청계천과 을지로 주변을 배회하며 이를 즐겼다. 영화 ‘친구’를 보면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보따리 장사를 하며 일본에서 가져온 19금 비디오테이프를 학생들끼리 몰래 보며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그 시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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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장면 

 

당시 일본은 엄청난 경제력과 위상을 자랑하며 세계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다. 에즈라 보겔(Ezra F. Vogel) 하버드대학 교수의  『Japan as Number One』(1979)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세계는 일본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책은 일본의 성공 스토리를 떠받드는 책으로 일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일본의 기세는 드높았다. 머지않아 미국도 추월하여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닌가 하고 회자될 정도였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아시아의 4룡(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이라는 말에 고무되어 오로지 성장에만 주력하던 시절이었고, 그 정점에는 일본이라는 롤모델이 존재했다. 일본은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음악,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드라마, 잡지 등 문화 콘텐츠 분야에서도 아시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도 이런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구나 수입・유통 금지라는 족쇄가 채워진 터라,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런 일본 문화를 흡수하며 탐닉했다.

 

일본어를 몰라도 길거리 리어카에서 판매하던 일본 엔카와 제이팝 테이프 몇 개 정도는 소장했다. 엑스재팬, 쇼넨타이, 히카루겐지, 핑크레이디, 미소라히바리, 테레사 텐 등의 음악을 주로 접했다. 노래 가사의 의미는 제대로 모르지만 긴기라기니, 코이비토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가와노나가레니 미오마카세 등을 읊조리며 따라불렀다. 

 

여대생은 일본 패션잡지 논노를 끼고 다니면 뭔가 트랜드에서 앞서가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었고, 세계적 대히트 상품이었던 소니의 워크맨을 갖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나는 소니보다는 값이 저렴한 아이와의 제품을 줄창 끼고 다니며 일본어와 일본 노래를 듣고는 했다. 그 시절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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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JAPAN (엑스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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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지금의 50, 60대 세대에겐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젊은 시절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만큼 일본은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아시아 국가에서 지존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일본은, 나 같은 젊은이에게 과거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라는 역사를 공유한 극복과 경계의 대상인 동시에 경제와 문화 등에서 한국을 앞서가는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율배반적인 이상한 나라였다. 

 

 

90년대 일본에 살면서 느낀 문화 충격과 위용

 

나는 1990년 4월부터 일본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유복한 집안의 유학생이 아니었기에 뭐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지만, 그 덕분에 10여 년간에 걸친 유학생 시절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일본의 서민 문화와 하층 문화를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 내가 느낀 일본은 소문대로 선진국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80년대를 휩쓸었던 버블 광풍이 꺼지며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이긴 했지만, 아직 잘나가던 시절의 여흥이 깨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도쿄의 롯본기, 긴자, 아카사카, 신주쿠를 중심으로 한 홍등가는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의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흥청망청하는 분위기와 열기도 남아 있었다. 

 

음악을 비롯한 망가, 애니메이션, 드라마, 게임, 출판 등 문화 콘텐츠 산업도 여전히 번창하고 있었다. 연일 TV에서는 당시를 풍미하던 고무로 데츠야라는 다재다능한 음악 프로듀서의 지원하에 제이팝 여신으로 등극하는 아무로 나미에 열풍을 전달하기 바빴으며, 이는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아무로 신드롬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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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로 나미에

 

애니메이션 분야도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변되는 지브리 스튜디오 제작의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드래곤볼, 에반게리온, 도라에몽 등 수많은 애니메이션이 주말과 평일의 황금 시간대에 방영되고, 이에 수반한 많은 캐릭터 산업도 전성기를 맞았다. 닌텐도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대표되는 게임 엔터테인먼트 분야도 활황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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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TV에선 심야시간이 되면 이국땅에서 독수공방하며 궁상을 떨어야 했던 외로운 유학생의 심경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19금의 심야방송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낮시간에는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 음악 등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예술, 오락의 문화 콘텐츠가 다양해 정신적으로 매우 풍요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시 일본어 공부를 위해 일본의 J-POP도 몇 곡 정도는 외워서 부를 정도로 열심히 따라부르며 심취했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당시 일본 TV에서 한국 아티스트는 조용필과 계은숙, 김연자 정도가 일본에서 활약하는 한국 아티스트로 가끔 소개되는 정도였다.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이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 흑백 TV 앞에서 동네 꼬마들과 함께 모여 즐겨보았던 ‘마징가 제트’ ‘소년 아톰’ ‘알프스 소녀 하이디’ ‘은하철도 999’ ‘플란더스의 개’ ‘엄마 찾아 3만리’ 등 무수히 많은 애니매이션이 거의 전부 일본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다. 

 

내가 무지했던 탓이었겠지만, 이런 애니매이션을 일본 친구들이 전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여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며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들이 일본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한국 작품이라고 착각하고 지냈던 나의 무지를 실감했다. 동시에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한국 방송에 대한 분노와 상실감을 크게 느꼈었다.

 

아무튼 1990년대는 일본의 버블이 꺼지고 불황기에 들어서는 과정이기는 했지만, 그전 80년대의 영화도 아직 공존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20세기가 종말을 고하는 것과 함께 일본의 국제적 위상도, 문화 예술 분야도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며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다. 

 

 

21세기, 역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한국과 일본

 

그렇게 80년대엔 고공행진하고, 90년대엔 주춤하기 시작한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은 파란만장한 흥망성쇠를 체험한 20세기를 뒤로 하고, 밀레니엄 21세기를 맞았다.

 

버블 경제가 파탄 난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 21세기를 맞은 일본 사회는 기존의 개척보다는 보신으로, 외향적 성향에서 내향적 성향으로, 공격보다는 방어로 자세와 태세를 전환하게 된다. 이런 양태는 사회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지만, 그중에서도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엔고의 혜택을 향락하던 해외관광도 점차 줄어들게 되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향하던 젊은이들의 호기심과 그를 추동하던 서구에 대한 동경심도 주춤하게 된다. 일본인의 해외 유학도 점차 줄어들게 된다. 물론 이는 급격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점진적으로 그런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굳어지게 되어 갔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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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일본

 

과거 아시아 시장에서 일본이 문화 예술 분야를 석권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 문화 콘텐츠의 높은 퀄리티와 다양성 등이 토대가 되었겠지만, 아시아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위상과 국력이 무엇보다 예술과 문화 부흥의 뒷받침이 되었다.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은 유일무이한 선진국이었고, 일본 사회나 그 문화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게 롤모델이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를 선진 문화로 받아들이고 추종하는 건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즉 국가의 경제력과 함께 문화 콘텐츠 산업도 ‘동반 상승’의 효과를 만끽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버블이 붕괴되며 시작된 장기간 경기 침체로, 일본의 기업은 해외 시장보다는 내수 시장에 주력하려는 방향으로 전환했고, 이러한 내수 시장에 주력하려는 흐름은 점차 예술 문화 분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됐다. 이런 흐름은 해외에서의 영향력 감소를 초래하게 됐다. 반면 이런 시기에 중국은 급속도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 진전으로 인한 약동이 서서히 본령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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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IT산업의 발판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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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문화산업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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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문화 지원을 받은 한국 콘텐츠는

한류를 세계적 이슈로 만들며 뻗어갔다.

일본에서 폭발적 한류의 첫 시작은

‘겨울연가’였다(2003년 일본 방영). 

출처-<오마이뉴스>

 

그 후로 일본은 다시 치고 나가며 한국, 중국과 격차를 다시 벌리지 못했다. 즉, 쇠퇴하는 국가의 흐름을 바꿀 개혁이 나오지 못했다. 일본에서 좀처럼 이 흐름을 바꿀 개혁이 나오기 힘들 이유를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변혁을 막는 일본의 사회적 환경

 

흔히 일본 사회는 한 번도 시민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나라라고 얘기된다. 이런 논리에 대해 그럼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학적으로 풀어본다면, 메이지 유신이 당시의 봉건사회를 타파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사회 대변혁인 것은 맞지만, 메이지 유신의 주체는 일반 민중이 아닌  삿쵸(가고시마와 야마구치의 옛지명) 번을 중심으로 한 하급무사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회 변혁이다. 

 

하급무사라고는 하지만 기존의 사농공상으로 체계화된 봉건적 질서위계 속에 위치한 기득권 세력들에 의한 변혁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민중에 의한 시민혁명이라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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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선교사 ‘귀도 베르백’과 메이지 유신 주역들

춝처-<위키피디아>

 

그런 연유로 민중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시키고 체제를 바꾸는 경험이 없었던 바, 이를 학습하지 못한 불행이 작금의 일본 사회의 발전 동력을 제어하고 개혁 의지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변혁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이를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소심함과 그런 기제를 제어하는 눈에 보이지 않은 사회적 압력이 존재한다.  

 

이를 흔히 ‘쿠우키’ 즉 ‘공기’라고 하며, 이는 곧 ‘조화’와 ‘질서’라는 도그마에 흡수되어 사회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회적 아비투스는 무언가 목표가 설정되고 그를 실행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큰 효과를 발휘하며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목표를 상실하고 리더십이 결여되어 사분오열되는 현상에 직면하게 되면 종전의 질서는 무너지고 조화는 무질서와 배제를 낳기도 한다.

 

이 글의 주제인 일본의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변혁을 막으며, 다시 치고 올라갈 수 없게 발목 잡고 있는 ‘쿠우키(공기)’가 있다. 세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1. 일본 사회는 꿈을 이룰 수 없다?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상 수상식에서 한국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감독상, 작품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는 4관왕의 쾌거를 이루면서 한국을 환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일본에서도 한국이 이룬 쾌거에 대해 부러움과 시기심이 엿보이는 방송을 연일 내보냈다. 그런데 나는 이와는 다른 하나의 뉴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때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일본인(과거) 한 사람도 다른 종목의 수상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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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분장사&비쥬얼 아티스트 ‘츠지 카즈히로’

 

일본 출신의 카즈 히로(일본명 츠지 카즈히로) 씨가 2018년에 이어 두 번째로 메이크업/헤어스타일링 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런데 이 카즈 씨가 인터뷰한 내용은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줬다. 

 

기자 : 일본에서의 경험이 아카데미 수상에 영향을 주었는가? 

 

카즈 : 이런 말을 하는 건 죄송하지만, 나는 일본을 떠나 미국인이 되었다. (일본) 문화가 싫어졌고, 일본에서 꿈을 이루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다. 미안합니다. 

 

일본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도미했으며 미국에서 그 꿈을 이루었다는 대답이었다.

 

2. 영화는 사회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어느 가족’으로 소개된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万引き家族’ 라는 영화를 둘러싼 일본 내의 반응이다. 이 영화는 2018년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일본인 감독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것은 1997년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 이후 21년 만의 쾌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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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출처-<REUTERS>

 

그러나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평소 일본인의 국제적 활약에 대해 누구보다도 재빨리 그 환희에 편승하던 당시 아베 수상은 축전도 축사도 보내지 않는다. 이에 대해 프랑스 신문 피가로지는 “왜 아베 수상은 축하 코멘트를 하지 않는가?”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상자인 고레에다 감독은 “공권력과는 깨끗하게 거리를 두고 싶다”며 홈페이지를 통해 자신의 심중을 밝힌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물론 많은 일본인들 사이에선 고레에다 감독의 수상을 축하하는 목소리와 함께 비판의 목소리도 드높았다. 비판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으면서 정부의 축사를 거절하다니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만비키(절도나 훔치는 행위를 뜻하는 일본어)를 하는 가족을 주인공으로 하다니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어린애들의 먹는 모습이 너무 더럽다”

 

“만비키를 타이틀에 넣다니 용서할 수 없다” 

 

(TMI일 수 있지만, 최근 배우 송강호 씨가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그 영화가 ‘브로커’다. 강동원, 이지은(아이유) 씨가 같이 출연한 영화다. 그리고 그 영화의 감독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다)

 

3. 일본 사회의 ‘공조’ 압력은 견디기 힘들다? 

 

문화·예술 분야는 아니지만, 최근 일본 노벨상 수상을 둘러싼 에피소드다. 20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미국인 마나베 슈쿠로 씨에 얽힌 에피소드다. 마나베 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도쿄대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5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잠시 일본에 귀국하여 과학기술청에서 근무한 적도 있으나 재차 미국으로 갔고 국적도 미국으로 바꿨다. 그런 마나베 씨의 수상 소식에 일본 미디어는 당연히 열광하였고 수상자와 직접 인터뷰를 시도한다. 그런데 일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마나베 씨는 미디어의 기대와는 상반되는 답변을 내놓아 일본 열도를 당황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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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베 슈쿠로

 

‘일본에 대해 메시지’를 부탁받은 마나베 씨의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그건 말이죠. 음...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요. 답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일본 정부 정책에 많은 분야의 전문가 의견이 어떻게 전달되어 정치가에게 도달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치에 대한 어드바이스 시스템이 일본은 너무 복잡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정부는 일본 학술회의에서 하는 조언을 듣고나 있는지 모르겠고요.  

 

…(중략)… 

 

미국에서는 말이죠. 불만을 말하자면 얼마든지 있지만요. 미국의 과학 아카데미에는 일본보다 다양한 의견이 밑에서 학자들로부터 올라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일본보다도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점 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기자회견 자리에서 일본인 기자가 ‘국적을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꾼 이유’를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거 재밌는 질문이네요. 일본에서 사람들은 항상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신경을 씁니다. 매우 조화로운 관계성입니다. 이것이 일본 사람들이 쉽게 사이가 좋아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또한 무언가 질문을 하면 예스나 노로 대답합니다만, 일본인의 ‘예스’라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예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이 무엇보다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던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나는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파악할 정도로 그들을 관찰하지도 않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은 참 멋집니다. 나 같은 과학자가 연구를 하고 싶은 대로 뭐든 할 수가 있어요. 상사가 정말 관대하니까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하게 해줍니다. 컴퓨터 같은 것의 지출도 전부 해줍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연구계획서를 써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조화 속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일본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의 하나입니다” 

 

위의 세 가지 에피소드를 통하여 도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일본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일종의 ‘조화’와 ‘순응’을 요구하는 사회적 아비투스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사회 풍조는 문화 예술 분야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더구나 사회적 비판과 문제 제기를 담아내어 예술로 승화시켜야 하는 문화 예술 분야에 있어서 이런 사회 풍조와 음습한 공기는 예술의 창작성과 도전 의식을 고취시키기보다는 억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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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언스플래시>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학 법학부 교수, 정치학 박사)

 

<계속> 

 

 

※다음 편에선 일본의 문화·예술 산업이 쇠퇴(혹은 정체)하게 된 정치, 사회적 이유를 짚어보겠다.

 

 

 

 

편집부 주

 

30여 년간 도쿄에 살며 일본 정치를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헌모 교수가

재일한국인의 눈으로 본 생생한 일본정치 현장과

일본 우경화의 현주소를 진단한 책이다.

 

일본 정치가 돌아가는 원리와 어떻게 우경화가

독주할 수 있는지 궁금한 독자는 집어드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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