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근육병아리는
요리에 관한 어떤 정식 교육도 받은 적 없으며,
오직 유튜브와 만화책으로만 수련 중인 야매 수산인으로
기사에 담긴 그 어떤 레시피도 성공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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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갑오징어 군단을 영입하던 그 순간부터 말이다.
그거슨 바로, 반건조.
흠집 난 오징어를 그대로 배 한켠에 툭툭 던져놨다가 허기질 때 질겅질겅 씹으며 그물을 끌어올리는, 진정한 마도로스들의 간식. 바다 사나이의 기상이 깃든 그것을 도심 한복판에서 구현해 볼 생각이었다.
이 연재를 지켜봐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이런 쓸데없는 짓에는 아주 치밀한 인간이다. 노량진에 가기 전부터,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여기에 살이 잔뜩 오른 갑오징어 포를 차곡차곡 쑤셔 넣고,
충정로 딴지 사옥 발코니
저쯤에다가 매달아 서대문구의 길고양이들과 행인들의 관심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요량이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상콤한 도시풍으로 꾸덕꾸덕 마른 오징어. 바다 사나이의 낭만이 깃든 그것을, 바쁘다 바뻐 현대사회의 중심 충정로 딴지 사옥 마당에서 숯 피워 구워 먹는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노량진 지하에서 오징어 배를 가를 때부터 상상만 해도 가슴이 막 벅차올랐다.
하지만 늘 그렇듯,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호츠크해 기단과 북태평양 기단의 때 이른 박치기로,
나의 원대한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버린다.
그르타. 대자연은 언제나 짱짱맨이다.
농부가 밭을 탓하지 않듯, 어부가 바다를 원망하지 않듯. 근육병아리가 장마전선과 맞짱 뜰 수는 없는 일.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슬프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다음을 기약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또 다른 헛짓거리를 찾아보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순리임을, 건조대를 접으며 배운다.
언젠간 쓸 일이 있겠지..
우천 시 파전
1952년 개봉한 뮤지컬 영화 <SINGIN IN THE RAIN>의 감독이자 주연 진 켈리에게 한 기자가 묻는다.
"비 오는 날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은 무엇인가?"
미 8군 위문공연 차 한국에 체류한 경험이 있던 켈리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는다.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지."
아시아 음식이라곤 스시와 만두밖에 몰랐던 미국인들에게 이 인터뷰에서 등장한 '코리안 핏자'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브로드웨이 일대에 최초로 한식당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뉴욕의 힙한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앞다퉈 젓가락질을 배우기 시작한다(뻥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비 오는 날 전을 부쳐먹었을까. 숙종 때 펴낸 중국어 교육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 '빙져'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餠(밀가루떡)' 의 중국 발음이다.
정확한 원전이 없는 오래된 음식이 다 그렇듯, 빈대떡도 유래에 관한 여러썰이 존재한다. 영조가 배곯는 사람들에게 나눠준 구휼 음식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떡'이라고 해서 빈자떡이라 불렀다는 말도 있고, 덕수궁 뒤쪽에서 부침개를 많이 팔았는데 그 인근에 빈대가 많아 '빈대골'이라 부른 데서 왔다는 썰도 있다. 심지어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에서 백성들이 파를 뽑아다가 투척해 쳐들어오는 왜구들이 맵싹한 파향기에 기겁을 한데서 동래파전이 유래되었다는 신박한 주장도 있다.
뭐 아무튼. 이토록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비가 오면 집에가서 전 부쳐먹는 게 우리의 오래된 국룰이었다는 것.
달궈진 기름에 반죽이 익는 소리는 빗소리와 매우 흡사하다. 그냥 느낌적인 느낌으로 비슷한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두 소리는 진폭과 주파수가 거의 비슷한데, 이 청각에 의한 연상작용이 비 오는 날 부침개를 땡기게 한다. 왜 치킨 광고도 잘 보면 모델이 치킨을 뜯을 때 바사삭 소리를 강조해서 만들지 않는가. 그만큼 우린 예민한 존재들이다.
비가 내려 습도가 높아지면 공기 중에 떠다니는 기름 냄새 분자는 콧속으로 더욱 맹렬하게 들러붙는다. 청각과 후각의 원투펀치로 막 정신을 못 차리게 되는 것이다.
비 오는 날 전을 부쳐먹는 건 순전히 기분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밝은 햇빛을 쐬면 우리 몸에선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이 분비된다. 뇌에서 행복감을 담당하는 녀석이다. 비가 오면 기분이 꾸리꾸리하고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게 이 녀석이 부족해서다. 습도가 높아지고 불쾌지수가 올라가 혈당이 떨어지면 우리 몸은 탄수화물을 찾게 되어있다.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하는 아미노산이 잔뜩 들어간 달걀과 밀가루에 고기와 해물을 잔뜩 얹어 기름에 지져먹는 부침개를 도저히 안 먹고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미노산계의 구마적, 갑오징어로 파전을 구워본다면 그것은 파전이 아니라 행복감이 대마초 수준으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해피케잌이 된다는 과학적(?) 결론에 따라 부침개 쪽으로 플랜 B를 짜보기로 했다.
그냥 갖다 붙인 소리다.
편집회의 중에
"장마로 어차피 다 망한 거 같고 비도 오는데 남은 거로 파전이나 구워 먹을까요?"
던진 말이, 회사 전체에 삽시간에 번져
"그래서 파전 언제 먹을 건데?"
"왜 나 재택근무 때만 맛있는 거 먹어?"
라는 류의 사내 메신저가 17개 쌓이는 데까지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뿐이다.
갑오징어는 워낙 벌크업이 잘 된 킹오징어이므로, 팬 위에서 익히려면 파가 남아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일단 함 데쳐보자.
스테레오 타입의 파전에서는 쪽파를 나란히 늘어놓아 재료를 올리지만, 오늘은 특별하게 실파를 캐스팅했다.
실파로 만든 파전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실파를 잘라서 구우면 응집력이 좋아져 좀 더 바삭바삭한 식감을 연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실파는 쪽파보다 부드럽기 때문에 흡사 부추전을 먹는 것 같은 경쾌함과 파의 알싸한 향기를 동시에 도모할 수 있다.
사실 충정로 인근 마트에 실파밖에 안 팔았다.
아무래도 쪽파가 맛있지..
한 김 식힌 킹오징어는 먹기 좋게 잘게 썰어놓고,
반죽 생성에 들어가 보자.
제조사인 제일제당 박사님들이 의도한 반죽의 점도가 분명 있었겠지만,
나는 오늘 몇 인분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부침개 부치는데 계량기씩이나 갖다 놓고 하기 좀 그르코,
되직하면 물을 더 넣으면 되고 묽으면 가루를 더 넣어 반죽을 늘리면 되니, 괜히 근심걱정 하지 않기로 했다.
몇 번의 회식 추진으로 깨달은 바가 있는데, 양이 좀 많은 것 같아도 해놓으면 어쨌든 누군가는 다 먹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단체 급식의 힘.
선수 입장.
세로토닌의 하이브 달걀.
헤엄치는 아미노산 킹오징어.
기름속으로 투하.
지글지글지글지글
창밖을 때리는 장맛비와 맞춰지는 전굽는 소리의 주파수와 진폭이, 반건조 갑오징어 프로젝트 실패로 침울해져있는 마음속을 후벼 파 들어온다.
갑오징어 파전 버전 1 완성.
파전 굽는 냄새가 이미 아래층까지 내려갔을 것이므로 지체 없이 차기 버전에 돌입하는데,
모객이 예상보다 한 템포 빨랐다.
손님은 기름냄새를 기다려 주지 않지.
웨이팅 속출.
마켓팀의 발 빠른 콜키지.
경상도의 쌀과 전라도의 물로 빚은, 동서화합의 화개장터 간지 봉하쌀 막걸리. 딴지마켓 단독 입점.
구우경 한번~ 와보쎄요~ 제가 썼답니다.
마켓 팀장님, 제가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4징어
그날 밤.
스물여덟 마리 중에 마지막 네 마리가 기어이 우리집까지 왔다.
이쯤 되니 이제 슬슬 정도 들고, 두족류 최초로 서울 사대문안에 당당하게 내걸려 출세할 뻔했지만 천재지변으로 결국 우리 집 도마 위에 축 늘어져 있는 신세를 보니 뭔가 좀 안됐고 마음이 그르타. 이 오징어의 일생도 참 우여곡절이 많다.
며칠을 함께했던 오징어 군단의 넋을 기리는 마음으로, 녀석들과 경건하게 진한 혼술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당장에 초장에 푹 찍어다가 소주를 돌려까고 싶지만,
그러면 기사 각이 안 나오니까..
팔도의 스피릿, 마법의 소스를 돌려까고.
쉐킷 쉐세세세 쉐킷.
크어어어어으으으
굳이 말려먹을 필요가 있나.. 싶어지는 맛.
지글지글지글지글
공복에 독주를 마시니 뭔가 배가 고파져서,
탄수화물 등판.
다시 한번 빗소리에 주파수를 맞추고,
멋진 녀석들 투입.
어찌 합니까아
어뜨케에 할까요오(알딸딸)
어치한다. 치해.
리빙 포인트 : 숙취엔 미나리가 좋다.
먹으면서 술이 깨는 정반합의 안주.
위스키와 미나리의 대결.
과연 승자는?
위스키 압승(딸꾹).
바삭바삭바삭바삭
3차 가야지 3차.
주의 - 숙련된 조교 외 음주 칼질 금지.
타릇타릇
소스완성.
피날레를 장식할 때가 왔다.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는데, 킹오징어를 튀기면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무자비한 시도.
야 이거 설거지 어떡하지 조땠네 싶은 마음에 잠깐 술이 깰 뻔했지만.
다행히 흥이 깨지기 전에 완성.
집에서 기름을 끓이는 무모한 짓을 했지만,
그래도 이 녀석들을 최고의 예우로 보내준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너희들은 비록 손질할 때는 정말 토쏠렸지만,
멋진 놈들이었어. 가을에 다시 보자. 다음엔 꼭 말려줄게.
해장
다음 날 아침.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튀기다만 몸통 반쪽 하나가 냉장고에서 발굴.
누군가 락엔락에 곱게 패킹해놨는데.. 누구라고 해봤자 1인 가구에서 용의자는 나뿐이므로, 누가 한 건지 계속 추궁할수록 마음 한구석만 쓸쓸해질 뿐이니, 술에 취한 나는 제법 깔끔한 편인가 보다 하고 대충 넘어가 보도록 하자.
오짬 상위호환 도전.
전날에 술을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섞어 마셨더니, 아침부터 정수리에 전봇대가 박혀있는 거 같다.
오징어 짬뽕에 갑오징어를 넣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졸라 맛있지.
사실 집에 신라면 있었는데, 괜히 기사에 뭐라도 한 줄 더 쓰려고 숙취에 쩔은 몸을 이끌고 굳이 밖에 나가 사 옴.
편집장님 제가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한단 말입니다.
다음 주 [근육병아리의 방구석 오마카세]는 근육병아리의 여름휴가로 잠시 쉬어갑니다.
푹 쉬고 돌아와 또 새로운 헛짓거리로 찾아뵙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 여러분들께 언제나 압도적 감사를 드리며, <갑 중 갑오징어>편, 여기서 이만 뿅!
-갑 중 갑오징어 편 끄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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