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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새 정부의 출범

 

지난 6월 30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는 필리핀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필리핀 국립박물관 앞에 마련된 취임식장에는 외국의 축하 사절단과 수만 명의 시민이 모여 앞으로 6년간 필리핀을 이끌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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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VNA>

 

지난 16대 두테르테 대통령의 경우에는 대통령궁(Malacanang Palace)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필리핀 대통령의 취임식 장소는 각자의 선호에 따라 선택된다. 새 대통령 마르코스 주니어의 취임식과 리셉션이 거행된 필리핀 국립박물관 건물은 1918년 최초로 건립되어, 필리핀 의회 및 행정부 청사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필리핀 근대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이번 취임식에서 주목받은 고위급 외국 축하 사절로는 중국의 왕치산 국가부주석과 미국의 더그 엠호프 미국 부통령의 남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축하 사절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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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취임식에서 외국 사절단.

권성동 원내대표의 모습도 보인다.

출처-<VNA>

 

봉봉 마르코스 혹은 BBM으로 불리는 마르코스 대통령은 선거 캠페인 내내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한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의 정치적 경력과 능력보다는 부친이 남긴 독재정권의 역사가 주로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이념과 정당보다는 인물과 가문이 정치를 주도하는 필리핀 정치 현실 속에서 아버지 마르코스의 업적과 과실은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향후 6년간 필리핀을 이끌어갈 지도자는 무덤에 있는 독재자 마르코스가 아니라, 살아 있는 그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이다. 

 

 

마르코스 주니어의 일생

 

마르코스 주니어는 독재자 마르코스와 사치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멜다 여사 슬하의 3남매 중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로 1957년에 태어났다. 그는 8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 대통령궁에 들어갔으며, 27세가 되던 1986년 가족과 함께 쫓기듯 대통령궁을 나와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렇게 떠난 대통령궁을 올해 93세인 노모 이멜다 마르코스와 함께 36년 만에 다시 입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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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회색 바지의 남성이 마르코스 주니어,

그 옆의 파란 원피스에 선글라스를 쓴 여성이 이멜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언론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을 방문한 후 우주 과학자가 되는 꿈을 가졌다고 했다. 청소년기에는 록스타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고 말했다. 청년기 그의 모습은 1986년 시민봉기로 궁지에 몰린 아버지 마르코스의 곁을 지키던 장발 머리에 전투복 차림의 젊은이로 사진 속에 남아 있다. 당시 정권에 반기를 든 일부 군부 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주저하던 아버지 마르코스에게 결단을 촉구했던 청년 마르코스 주니어의 모습도 필리핀 역사의 일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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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퇴임 전 마르코스의 마지막 연설.

오른쪽 국방색 전투복 차림의 장발 청년이 마르코스 주니어

 

그는 자신이 정치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군인의 길을 갔을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하지만 1991년 망명지인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의 가문인 마르코스는 여전히 정치의 중심에 있었고, 이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했다. 

 

마르코스 주니어가 처음 정계 입문을 한 건 아버지가 대통령일 당시다. 그가 23세 때인 1980년에 고향인 북부 일로코스주의 부주지사로 정계에 입문했고, 3년 후에는 주지사가 되었다. 그 3년 후엔 아버지 마르코스와 함께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5년 만인 1991년 망명지에서 돌아온 그는 1992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 후 하원의원 6년, 주지사 6년, 그리고 상원의원 12년 등 줄곧 필리핀 정치의 현장을 누볐다. 그는 선거에 패배한 두 번의 경험이 있는데, 1994년 상원의원 선거와 2016년 부통령 선거였다. 

 

2016년 부통령 선거에서 약 26만여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그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법적 다툼을 벌였지만,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6년 전 부통령 선거에서 그에게 패배를 안겨준 바로 그 사람이 이번 대선에서 대결한 부통령 레니 로브레도(Leni Robrdo)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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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로브레도(Leni Robrdo)

 

(레니 로브레도는 두테르테 행정부의 부통령이었지만, 두테르테와는 정치결이 다르다. 필리핀의 대선은 정부통령 후보를 미국식 러닝메이트가 아닌,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 선출하는 방식이어서 정치적 입장이 상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마르코스 주니어에게 밀려 낙마했다)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

 

지난 5월 9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마르코스 주니어는 유효 투표수의 58.77%를 득표하여 2위를 차지한 로브레도 후보의 27.94%보다 두 배가 넘는 득표율 차이로 승리했다. 

 

마르코스 주니어의 승리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언급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현직 대통령으로서 임기 말까지 높은 국민적 지지도를 누렸던 두테르테 대통령 가문과의 연합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대통령 후보: 마르코스 주니어, 부통령 후보: 사라 두테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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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유세 현장에서

마르코스 주니어(좌)와 사라 두테르테(우)

 

이번 대선에서 두테르테의 딸 사라 두테르테(Sara Zimmerman Duterte-Carpio)는 마르코스 주니어보다 높은 61.53%의 득표율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난해 대선 후보자 등록 이전에 시행된 여론조사에서 대선 후보 선호도 1위로 나타난 사람은 사라 두테르테였으며, 마르코스 주니어는 3위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많은 논란 끝에 사라 두테르테가 마르코스 주니어의 러닝메이트로서 부통령에 출마할 것을 공식화하자마자 마르코스 주니어의 대통령 선호도가 압도적 1위로 올라섰다. 

 

(사라 두테르테가 대선 후보 선호도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입후보하지 않고, 결국 부통령에 입후보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의 복잡한 상황과 함께 다양한 해석이 있다. 여기서 간략하게만 짚어보면,

 

①아버지 두테르테의 부통령 출마 선언 등으로 인한 영향(후에 사퇴 후, 사라가 부통령 후보 등록)  ②지역 구도상 사라 두테르테의 당선 가능성 여부 ③단임제 대통령으로서는 젊은 나이(1978년생) 등의 해석이 있다)

 

이처럼 마르코스 주니어의 대통령 당선에는 부통령에 당선된 사라 두테르테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부통령에 당선된 사라 두테르테를 일찍이 교육부 장관에 임명했으며, 취임사에서도 “낙후된 필리핀 교육을 사라 두테르테의 리더십 아래 재건할 것으로 확신한다”며 그녀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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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에서 마르코스 주니어와 사라 두테르테가

손을 맞잡고 들고 있다.

출처-<CNN>

 

 

앞으로 필리핀의 행보는?

 

이번 대선의 마르코스-두테르테 연합은 향후 마르코스 정부의 행보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취임사에서 마르코스 주니어는 두테르테 정부의 사업을 계승하여 완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두테르테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과 주요 인프라 건설 계획인 BBB(Build-Build-Build)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인권 유린 협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된 두테르테 대통령의 퇴임 후 조사와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마르코스 주니어는 자신이 당선되면 “ICC 조사단의 필리핀 입국을 오직 관광객 신분으로서만 허가할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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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M(봉봉 마르코스)는

‘다른 방식으로’ 마약과의 전쟁을 계속할 것,

ICC 조사관은 관광객으로서만 허용할 것이라는

내용의 CNN 기사.

출처-<CNN> 링크

 

외교정책에서도 마르코스 대통령은 두테르테 정부의 ‘자주외교’(independent diplomacy)를 계승할 것이라고 밝혔다. 즉,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를 크게 저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친중 정책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방향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기보다는 경제적 필요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마르코스 주니어가 선거 운동 기간에 줄곧 강조했던 것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위축된 필리핀 경제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의 투자 유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며, 그 주요 대상이 중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취임사에서도 마르코스 대통령은 경제 회복을 위해 해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제 막 출범한 마르코스 정부에 대해서는 기대와 염려가 동시에 존재한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도 아버지 마르코스가 집권했던 시기가 필리핀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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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he Manila Times> 

 

물론 야권에서는 이를 독재와 인권 유린의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마르코스 주니어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낸 필리핀 국민은 비록 독재자 마르코스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강한 리더십으로 필리핀이 당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번 대선과 동시에 치러진 총선 결과도 마르코스-두테르테 연합의 확실한 승리였다. 필리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친여권 의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것이다. 강력한 지도력 발휘를 희망하는 필리핀 국민의 기대로 드러난 마르코스의 절대 권력은 한편으로 우려를 낳기도 한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마음만 먹으면 의회를 동원하여 헌법 개정을 포함한 어떠한 정치적 결단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마르코스라는 이름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독재와 부패의 이미지는 필리핀 민주주의의 후퇴와 측근 중심의 부패한 정부 등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낳고 있다. 

 

1986년 민주화 이후 필리핀은 36년 동안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유지해 왔다. 국민혁명(People Power)을 통해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이룩한 민주주의는 이후 국민이 기대했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민주적 리더십에 실망한 필리핀 시민들이 필리핀 역사에서 독재로 상징되는 이름인 마르코스에게 변화를 기대하는 상황이 되었다. 

 

지난 6월 30일, 마르코스 주니어의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된 국립박물관 건물은 1970년대 초 마르코스 정부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던 바로 그 장소이며, 또한 이를 빌미로 1972년 9월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한 장소이기도 하다. 

 

필리핀 역사의 수레바퀴는 민주와 독재라는 반세기의 여정을 돌아 다시 그 자리에 마르코스라는 이름을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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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국립박물관에서 연설하고 있는 마르코스를 향해

독재를 규탄하며 열린 시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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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가

국립박물관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모습

 

김동엽 (부산외대 교수 & 아세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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