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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일까

 

나는 ‘원죄’를 믿는다. 여기서 원죄란, 모든 인간이 가진 자기중심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감각의 범위는 육체로 제한된다. 본능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행동한다. 타인의 고통이나 불행에 공감하는 것도 물론 인간의 능력이나,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대상과 범위는 제한적이다. 인간의 관심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우선순위는 다음과 같다: 자신 -> 가족 -> 친한 친구 / 동료 -> 사회 -> 국가. 지구 반대편에서 죽어가는 타인의 고통보다는, 내 손가락 혹은 자식 손가락에 생긴 작은 상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각자가 속한 ‘틀’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개똥철학을 늘어놓게 된 데는 계기가 있다.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은 궁금한 게 있으면 항상 필진을 조지는데 경제 담당은 나다. 경제 문제에 관해 대화할 때가 많다. 헌데 최근 몇 년간 그와의 대화 기록을 읽다가 알게 된 점은, 내 정치적 신념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상충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1) 주식투자자로서 나는 독과점 사업자들에 주로 투자해왔다. 독과점 시장은 경쟁이 적다. 경쟁이 적은 시장일수록, 사업자들은 대체 불가능하며, 안정적으로 이익을 벌어들인다.

 

이 기업들을 가장 열심히 조졌던 것이 문재인 정권이다. 신용카드회사와 VAN 사들이 벌어들이던 결제 수수료를 없애려고 정부와 서울시가 내놓은 ‘제로페이’ 사업이 대표적이다. 사업의 성과와는 무관하게, 정부가 독과점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수수료를 낮추려 한 선례를 남겼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독립성을 가지고, 가장 열일을 했던 것도 문재인 정권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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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주간경향>

 

2) 최근 기재부는 신(新) 외환법을 제정한다고 밝혔다. 과거 자본거래 시 사전 신고 의무화를 폐지하고, 미신고를 원칙으로 하되 신고 대상을 열거하는 식으로 바뀐다고 한다.

 

이 법안이 시행되면 나는 엄청난 혜택을 받게 된다. 현재 나는 한국에 있는 돈을 1년에 만 불 이상 송금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내 명의로 된 한국 계좌에 있는 돈인데도 그렇다. 만 달러가 넘어가는 모든 해외 송금에 대해서는 증빙서류가 필요하다. 자금의 출처, 인출의 목적 등을 증빙해야 하는데, 이게 꽤 까다롭다. 그래서 한국에 갈 때마다, 은행에 직접 방문하는 게 필수코스가 되어버렸다.

 

신외환법이 제정될 경우, 돈을 쉽게 넣고 뺄 수 있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편해지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내가 편해지는 것과 별개로 인출을 어렵게 만든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한 번 외환위기를 겪었던 나라이다. 게다가, 해외로 인출된 자금을 상속이나 증여한다고 했을 때, 과연 과세가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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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기획재정부>

 

3) 옆집이 최근 190만 불에 팔렸다. 내 집을 115만 불에 구입했던 게 불과 2년 전이다. 2년 새 집값이 60퍼센트 이상 오른 셈이다. 지난 2년 동안 미국 부동산시장은 기록적인 상승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6,000조에 달하는 부(Equity)가 만들어졌다. 주택담보대출도 2~3%대에 머물렀으니, 주택구입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기였다.

 

부동산 문제에서 어려운 점은, 주택 보유 유무에 따라서 입장이 완전히 갈린다는 점이다. 주택보유자들이 막대한 차익을 남기는 동안, 주택 미보유자들은 지옥을 맛보고 있다. 집값 상승은 월세 부담 및 거주 비용 상승으로 이어진다. 올라버린 집값과 금리 탓에, 내 집 마련은 미국에서도 별 따기처럼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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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김태형·노수민 / 한겨레신문>

 

일반적인 자산에 대한 수요는 가격이 오르면 줄어든다. 하지만 부동산에서는, 고점에서 주택을 구입하는 ‘패닉바잉’이 유독 잦다. 주택은 생활에 필수적인 ‘의식주’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압도적으로 큰 비용이 소모된다. 가격이 아무리 오르더라도, 집을 꼭 구해야만 하는 실수요자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집값이 앞으로 더 오를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엄청난 공포가 된다. 그래서, 부동산 가격이 고점일 때 무리를 해서 주택을 구입하는 안타까운 케이스가 많다. 이러한 신규 구매자의 유입은, 회광반조(回光返照)처럼 가격상승 끝물에 주택가격을 더욱 상승시키는 원인이 된다.

 

좁밥 기득권자가 내린 답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기득권자가 되어버렸다. 보수정권이 집권해서 규제를 풀어주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것의 덕을 보게 되었다. 내가 이익을 얻고 편리해지는 것에는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독과점 기업들의 이익이 늘어나는 것은, 누군가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외자금 반출이 쉬워지는 것은 국민들 대다수와는 무관하다(1만 불 이상의 자금을 송금해야 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학자금 등의 용도가 명확한 자금은 지금도 송금하는 게 어렵지 않다). 외환보유고 감소나 상속세 회피 등의 비용을 떠안게 될 수도 있는 문제다. 주택 미보유자들은 부동산 가격이 오를수록 큰 부담을 안는다.

 

이러한 사회적 비용에 비해, 내가 얻는 이익이나 편리함은 사실 하찮은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좁밥이기 때문이다. 규제 완화로 큰돈을 버는 건 나 같은 개인 투자자가 아니라, 기업의 오너들이다. 해외자금 반출이 쉬워졌을 때 정말 이익을 보는 건, 자식에게 물려줄 돈이 많은 자산가들일 것이다.

 

집값이 올라서 기분이 좋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집(더 좋은 집)의 값은 더 올랐을 것이다. 부동산가격으로 정말 큰 이익을 보는 건, 개발업자들과 다주택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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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의 좁밥 아닌 분들.

좁밥들은 도피시킬 자산이 없다

출처-<경향신문>

 

예를 들어, 어떤 정책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1,000만 원이라고 해보자. 나 같은 좁밥이 1,000만 원에 이득을 본다면, 진짜 기득권은 몇천억을 해 먹을 수도 있다. 이 정책을 시행했을 때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든다면 당연히 반대해야 맞다. 그러나, 이 정책이 시행되지 않음으로써 절약되는 사회적 비용 (몇천억)으로 내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반대로, 이 정책의 시행 결과 얻어지는 이익은 온전히 내 것이다. 비록 수천억 중에 천만 원일 뿐이지만, 어쨌든 내 주머니에 들어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인 마이 포켓.’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는 천만 원은 현실이지만,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을 때) 사회적으로 절약되는 수천억은 추상적인 돈이다. 개인의 가시(可視)적인 이해관계가 사회적 비용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부정부패와 각종 비리가 발생한다.

 

이 문제에 대해 얄팍한 답을 내렸다. 나의 양심과 정치 성향에 가격을 매긴 것이다. 예를 들어 양심의 값이 백억이라고 해보자. 이는 내가 백억 이상 직접적인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닌 한 경제적 이해 때문에 정치적 성향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잘한 문제들이라면 내 인생을 좀 더 힘들게 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정책을 지지할 것이다. 솔직히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해도, 살만하니까. 양심을 지킬 수 있으니까.

 

첨언.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계산대로 경제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종합지수나 부동산 가격이 높았던 것은, 공교롭게도 노무현·문재인 정권이었을 때다. 자산 가격은 미래 경제 성장률과 전망 등을 기반으로 매겨진다. 정권의 정책 성향과 무관하게 국정 운영을 잘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자산 가격은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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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스 여러분 덕에,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딴지 연재물을 확장하여, 이때다 싶어 열쒸미 공부, 정리하여 낸 책입니다. 아마, 현직 회계사 중, 저만큼 회계공부를 싫어했던 회계사는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저만큼도 공부를 안 했다면 못 붙으셨을 테니까요). 회계 공부를 싫어했던 제가 스스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계실 독자분들 상정해 쓴 책이다 보니 재밌습니다(아마도...). 그동안 회계 공부가 하기 싫었다거나, 회계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분들(사실상 전원)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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