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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1. 조화 과잉 사회의 역설

 

 

 

지난 편에서 과거 일본 문화·예술이 전성기를 맞이했던 80년대부터 버블이 꺼진 90년대, 한국과 역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2000년대까지 시간순으로 일본 사회 변천사를 알아봤다. 또한 국제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일본인 (출신) 예술인들과 과학자가 일본 사회에 대해 내는 비판 메시지를 통해 ‘일본의 변혁을 막고 있는 사회적 특징’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알아보았다.

 

이번 편에선 일본의 문화·예술 산업이 쇠퇴(혹은 정체)하게 된 정치, 사회적 이유를 짚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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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IME>

 

 

일본 문화·예술 쇠퇴한 '정치적' 이유

 

1. 일본 사회의 우경화 

 

뜬금없이 우경화 현상이 문화 예술 분야에 무슨 영향을 끼쳤는가 하며 의아해할 수도 있다. 

 

일본의 우경화 현상의 기조는 지나친 자국 우선주의를 중시하며, 기존의 역사를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국가주의 역사교육을 강조하는 역사 수정주의자 등에 의해 시간이 갈수록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다. 이런 목소리는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며, 이는 곧 여론이 되어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들의 특징은 과거의 일본을 찬양하고 현재의 일본 역시 최고라는 맹목적 국가관에 집착한다. 또한 일본 사회나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억압하려 한다. 21세기 들어 고이즈미 정권기부터 본격적으로 총리대신의 야스쿠니 참배가 시작된 것도 이런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발호하는 시점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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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에 참배하러 온

시 수상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렇게 우익 세력들이 발호하고 사회가 우향우로 점차 기울여져 가게 되면, 건전한 사회비판과 문제 제기를 하며 창작 활동을 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문화 예술 분야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한 예를 들어보자. ‘신문기자’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며칠 전 사망한 아베의 수상 재임 시절 사학비리 스캔들을 파헤치는 내용인데, 배우들을 캐스팅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어, 결국 한국 배우(심은경)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할 수밖에 없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일본 사회에 드리워진 예술에 대한 음습한 단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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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문기자'

 

 

2. 문화 콘텐츠 사업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과 대응

 

21세기 초 한일 정상은 김대중 대통령(1998년 2월 25일-2003년 2월 24일)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2001년 4월 26일-2006년 9월 26일)이었다. 이 두 정상이 문화 예술 산업에 어떤 마인드를 갖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쳤는가를 살펴보면 한일 간 차이가 일목요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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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김대중 대통령(우)과 고이즈미 수상(좌)

출처-<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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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옛집에서 춤을 추는 고이즈미.

부시와 부시의 딸들이 바라보고 있다.

 

2006년 미일 정상회담 후, 고이즈미 수상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옛집 ‘그레이스 랜드’를 방문하여 신이 난 듯 기타를 들고 ‘러브 미 텐더’를 부르며 파안대소했다. 평소 그는 일본의 락밴드 X-JAPAN의 광팬이며, 오페라와 영화 감상이 취미라고 알려져 있을 만큼 문화 예술을 즐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음악을 비롯한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해 특별한 정책을 주도하거나 실행했다는 일화는 들려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예술을 즐기고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 콘텐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관심으로 적극적인 문화 산업 육성 정책을 실현하여 작금의 한류 열풍 토대를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그전까지 수입・유통이 금지되어 있던 일본 문화 개방은, 당시 많은 반대 여론을 돌파하면서까지 실행한 결단력이 오늘날 일본에 한류붐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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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방송이나 미디어에서는 한국 영화가 국제영화제 등에서 수상하고,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 관심을 받고, BTS가 빌보드차트 1위를 하고, BLACKPINK의 유튜브 동영상 재생수가 10억 회를 넘어가는 등, 한류 붐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배경에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 가능하다는 말을 한다. 

 

이는 마치 문화 예술 분야에 권력이 개입하여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는데, 현재 일본도 국가기관인 문화청에서 국가보조금으로 문화 예술 콘텐츠 사업을 지원하고 있는 점에서 한국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중요한 건, ‘지원하되 간섭 하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제대로 지켜짐으로 인해, 국가의 지원이 얼마나 문화콘텐츠산업 육성에 실질적 공헌을 하고 있는지일 것이다. 

 

지난 편(링크)에서 전술했듯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이 2018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도 일본 정부와 국내 팬들로부터 축하와 격려보다는 질타와 비난을 받게 되는 이런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들이 진정으로 문화콘텐츠를 육성하고 국제 경쟁력을 키우려 고심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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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영화 ‘브로커’의 감독을 맡은

고레에다 감독(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은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브로커’팀의 모습이다.   

 

이런 현상도 따지고 보면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즉 국가나 권력 그리고 일본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부류의 영화는 인정할 수 없다는 비뚤어진 국가주의의 단면인 것이다. 

 

2022년 6월 20일의 아사히신문 보도(링크)에 의하면, 재무성 자문기관 ‘재정제도 등 심의회’는 분과회에서 적자폭이 확대되고 있는 관민펀드인 쿨재팬 기구(해외수요개척지원기구, Cool Japan Fund Inc.)에 대해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통폐합도 시야에 넣고 검토한다고 한다. 

 

이 쿨재팬이라는 기구는 2013년 아베 정권 때, 일본의 애니메이션, 일본음식 등 일본 독자적인 상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사업을 지원할 목적으로 정부와 민간기업의 출자로 설립된 기구이다. 

 

정부의 출자액은 2022년 3월 말 시점으로 1,066억엔이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조원이 넘는 금액이다. 2020년부터 코로나19로 인한 투자처 기업의 판매 부진 등으로 2020년 누적 적자가 231억엔에 달하였고, 이에 대한 개선책을 꾀하였으나 2021년에는 309억 엔으로 적자폭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분과회에서는 포스트 코로나 이후의 경제회복과 함께 쿨재팬 기구의 수익이 개선되리라는 전망을 제시했으나, 위원회에서는 ‘펀드 청산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런 의견이 나왔다는 것은 지원이 목적이라기보다 사실상 투자가 본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투자가 본 목적인만큼 간섭이 없기란 쉽지 않다.

 

일본에는 쿨재팬 기구뿐 아니라 관민이 합동으로 설립한 펀드나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업 등이 많이 눈에 띈다. 비뚤어진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점으로 볼 때, 과연 정부는 출자만 하고 간섭은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일본에서는 “돈도 내지만, 구치 겐세이(간섭, 참견)도 함께 한다”는 말이 상식적으로 통용되는만큼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또한 이런 정부 출자 사업에는 기존의 업계 위계에 따른 기득권 세력의 독점 현상도 빈번하다. 정부와 시행 업자 사이에 끼어들어 중계역할을 하며 소득을 챙기는 일명 ‘중간 단체(일본어로는 ‘나카누키’라고 함)’가 불로소득에 가까운 이익을 취한다. 이런 구조가 용인되고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배경에는 뒤에서 살펴보는 자민당 일당 지배체제의 장기화에 따른 기득권의 구조적 공고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상세하게 다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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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어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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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 촬영 모습

 

예술은 아티스트와 제작자 등 제작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인내하며 창조해낸 결과물이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에 대한 평가는 소비자의 몫이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과 퀄리티에 대한 평가가 아닌, 외부적인 정치적 요소를 개입하여 평가하고 비난하는 행위는 아티스트와 제작자가 문화 예술 콘텐츠를 제작함에 있어 외부 정치 요소를 고려하도록 유도한다. 문화 예술의 발전은 커녕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이다. 

 

3. 소극적 글로벌화 & 뒤처진 디지털화 

 

21세기 일본은 글로벌화에 소극적이었고, 디지털화 등 정보통신화 사회의 변화와 적응에 뒤처져왔다. 일본 사회는 헤이세이의 장기불황기에 빠지면서 기업들은 해외시장을 노리고 과감한 투자와 진출을 하기보다는 매력적인 국내시장에 눈을 돌리게 된다. 

 

1억 2천만이 넘는 일본 내수 시장은 기업에게 매력적이다. 굳이 투자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해외 진출을 하지 않아도 내수를 일정 정도 점유하게 되면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하다. 

 

과거 지구촌을 구석구석 누비며 정력적인 영업을 하던 일본 기업 샐러리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해외보다는 국내 시장 점유에 힘을 기울이는 양상을 띠면서 국내 업종끼리 경쟁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품질, 고가격으로 대표되는 각종 고퀄리티 상품이 양산되지만, 결국 일본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갈라파고스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화 예술 분야 역시 이런 추이에 영향을 받았다. 해외 시장 공략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국내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 개발에 기울였다. 헤이세이 불경기 들어 어린 소녀들을 중심으로 한 아이돌 그룹이 대거 등장하면서 국내 아이돌 산업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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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최고 인기 걸그룹 중 하나인

‘노기자카46 (乃木坂46)’

 

이런 아이돌 그룹의 특징은 가창력과 댄스 등 퍼포먼스 능력보다는 비주얼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가와이(귀엽다. 예쁘다)’함을 우선적으로 내세우며, 부족한 부분은 아이돌과 팬이 함께 키워간다는 컨셉이다. 이렇게 국내용으로 기획되고 꾸며진 아이돌 그룹은 여타 한국 아이돌 그룹처럼 해외 시장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받지 못한다. 애초부터 국내용으로 디자인되고 개발된 컨셉이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만 머물다 끝난다. 많은 일본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글로벌화를 외치지만 정작 글로벌화의 추세는 외면하는 형국이라 하겠다. 

 

또한 일본 사회가 디지털화 흐름에 뒤처지면서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각종 홍보와 마케팅 전략 등에서도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SNS 활용에도 소극적이다. 

 

 

일본 문화·예술 쇠퇴한 '사회적' 이유

 

1. 각계각층 기득권의 견고함

 

자민당 일당우위 지배체제가 전후 60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현상에서 보듯이 일본 사회는 특유의 각계각층 기득권이 견고하다. 이는 연예 엔터테인먼트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쟈니즈라는 거대 연예 프로덕션이 있다. 남자 가수 부문에서 압도적인 위상을 갖고 있는 연예 프로덕션이다. 일본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남자 그룹 또는 싱어는 거의 쟈니스 사무소 소속 연예인이다. 

 

과거 아이돌 스타로는 곤도 마사히코, 히카루 겐지, 시부가키타이, 쇼넨타이 등, 최근 아이돌로는 해산 전의 스마프(SMAP)를 비롯하여, 아라시, 칸자니, 도키오, 헤이세이점프, 킨키키즈, 캇툰, 브이식스 등의 쟁쟁한 남자 가수들이 쟈니즈 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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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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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프(SMAP)

 

이런 쟈니즈 사무소가 2019년 7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주의’를 받게 된다. 원래 스마프(SMAP)의 멤버였던 3명의 지상파 TV 출연에 대해 압력을 행사한 혐의라고 한다. 

 

대략적인 개요는 이렇다. 일본의 인기 절정 남성 그룹 스마프는 독립을 둘러싸고 쟈니즈 경영진과 불협화음이 발생하였고, 결국 해산하게 되었다. 그룹은 해산했지만, 멤버들은 각자 연예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는데, 쟈니즈 소속사가 전 스마프 멤버들이 출연하는 TV 프로에는 쟈니즈 소속 아이돌을 출연시키지 않는다는 식으로 압력을 행사하며 이들의 활동을 방해했다고 한다.

 

이처럼 특정 프로덕션이 연예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거의 독점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며 제국을 구축해왔다. 제국이라 할 정도로 몇몇 소속사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기 때문에, 연예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력 있는 프로덕션 소속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후 사생활은 물론 연예 활동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사무소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건 일본 연예계의 불문율이다. 

 

일본 예능사업소 업계버닝 프로덕션이라는 소속사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본 예능사업소 업계에는 ‘일본음악사업협회’라는 거대한 단체가 있는데, 이 단체를 쥐락펴락하며 버닝 프로덕션은 예능계 최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코미디 계통에서는 요시모토 흥업이 압도적인 위치로 군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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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출신으로 현재까지도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고 히로미’도 버닝 프로덕션 소속이다.

초창기에는 쟈니스 소속이었으나

70년대 말 버닝으로 소속사를 옮겼다.

이 외에도 우치다 유키, 이나모리 이즈미, 미우라 쇼헤이,

WaT, 이누카이 아츠히로 등이 버닝 프로덕션 소속이다.

 

공고한 기득권이 군림하는 이런 구도 속에서는 새로운 트랜드에 대한 시도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절차탁마하는 과정이 어려워진다. 새로운 신규 참여자가 이런 대열에 합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존의 짜여진 틀과 범주 속에서 활약하며, 인기를 구가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쟁이 없는 영역에서 새로운 창조나 발전을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본 시장에 진출한 한국의 종합콘텐츠 프로덕션 CJ-ENM이 최근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향후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2. 조화와 동조를 강요하는 사회적 아비투스

 

이전 편에서 전술했듯, 일본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조화와 동조’ 과잉이라는 사회적 아비투스는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 첨언하자면, 일본 사회에서 ‘질서’와 ‘조화’를 강요한다는 건, 무조건 맞는 말은 아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질서나 조화라는 개념은 수치화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나 또한 30년 넘는 시간을 일본에서 생활하며 뼈저리게 느끼는 바 중 하나가 ‘조화’와 ‘동조’라는 아비투스가 강하게 작용하는 점이다. 무언가 의견이 있어도 조직의 논리와 반대되거나 어긋나는 주장이면, 이를 마음대로 개진하고 주창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강하다. 이런 사회적 아비투스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조화’라는 도그마이며 이를 위해 결국은 ‘동조’를 강요받게 되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경험하게 된다. 

 

창의성과 사회 비판 의식을 가져야 하는 문화 예술 분야는 다른 분야보다 이런 사회적 아비투스에서 자유로워야 할 분야인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발전이 힘들 수밖에 없다. 앞에서 예로 든 거대 독점 프로덕션이나 관민 합동펀드에서 신규 투자보다는 내수 시장의 확보와 유지에 초점을 맞추면, (아무리 특출난 인재라도) 그 누가 반대되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 

 

반대되는 주장 혹은 다양한 주장이 없다 보니 과거와 같은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거나 자유롭게 문화 예술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는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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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풍문에 의하면, 드라마나 영화 등의 제작비용과 환경 등도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 과거 일본의 국운이 상승할 때는 이런 문화 콘텐츠 분야도 더불어 ‘상승 효과’를 보았지만, 일본의 국운이 정체하면서 동시에 문화 콘텐츠 분야도 주춤하고 있다. 

 

3. 일본인과 일본 사회의 오만과 편견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과거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했던 시절이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90년대를 기점으로 일본은 정체를 거듭하고 있으며, 그 사이 한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뒤쫓으며 성장과 발전을 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서는 아직도 1979년 에즈라 보겔의 책 제목이었던 ‘재팬 에즈 넘버원(Japan as Number One)’이라는 주술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들과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흔히 목도된다. 

 

가령 작년 한국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며 대성공을 이루자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 것을 모방 또는 표절한 드라마라는 비난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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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WIKITREE> 링크

 

비난의 진위여부는 제쳐두고, (상식적 표절의 기준을 넘지 않는 선에서) 일본의 어떤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등과 비슷한 착상이나 구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징어 게임에서 일본의 어떤 놀이와 비슷한 놀이가 나왔다고 해도, 그게 작품성을 비하하고 표절이라고 폄훼할 수 있는 것인가. 

 

무릇 드라마나 영화 같은 작품에 100% 오리지널 창조 작품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그 어떤 수작이라도 이전의 수많은 다양한 작품이 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그를 모티브로 하여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일본에서는 이런 점을 무시하고 오로지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 일본이 전후 부흥하면서 서양 제품을 마구 카피하고 모방하면서 하나하나 개선하고 발전시켜나갔던 시절은 까맣게 잊고 있다. 속된 말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경우다. 

 

이처럼 일본 사회는 아직도 자신들은 과거 잘나가던 선진국 시절의 모범국이며, 최근 세계적으로 활약하며 각광을 받고 있는 한류의 문화 콘텐츠는 일본 문화의 아류이니 표절이니 하면서 애써 폄하하려는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런 ‘오만’이 일본 문화 콘텐츠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자신들의 문화 콘텐츠가 한류에 밀리고 있다면,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점이 부족했는가를 가령 한류의 성공을 보면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자세’와 ‘의지’가 필요할 터인데, 알량한 자존심이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듯하다. 전형적인 ‘오만’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면서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근대국가로 거듭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원천에는 바깥 세계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큰 동인이 되었다. 섬나라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해외의 뛰어난 문물을 가감 없이 받아들여 자기들 것으로 변형, 조화시켜가면서 국가의 틀을 만들고, 산업을 일으키고 문화를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에는 바깥 세계의 뛰어난 문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허함’이 있었으며, 바깥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이런 외국 문물의 수용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토대로 일본 사회의 근면성과 성실성이 조화를 이루며 부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의 일본은 90년대 이후 30년째 장기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아시아 최고 선진국이자 세계 제2위 경제 대국이었던 과거의 영화에만 취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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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일본 도쿄의 거리

 

지금 일본에 필요한 것은 ‘메이지 유신’ 때와 같이 사회 경제적 혼란과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자각’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국의 앞선 부분을 겸허히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일본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글을 마치며, 노파심에 읽어주신 독자들께 첨언한다. 일본의 국위와 문화 콘텐츠가 과거에 비해 그 위력을 잃고 있지만, 과거 잘나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와 유형무형의 자산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느 때 다시 과거와 같은 일본 열풍을 불러일으키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만큼 개인의 능력이나 유무형의 자산 규모 등으로 볼 때, 하루아침에 쉽게 무너지고 마는 이름뿐인 선진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류가 세계적으로 각광 받고는 있지만, 이런 열풍 또한 영원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문화 콘텐츠 분야가 국운 상승과 함께 ‘동반 상승’하는 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때, 현재의 한류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선 꾸준히 경제성장과 국위를 유지해야 한다. 지금 잘 나간다고 방심하고 오만해지게 되면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과거 일본이 아시아의 롤모델 역할에 안주하고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한국에 그 자리를 뺏기게 되었듯이, 다른 나라가 지금 한류의 한국을 롤모델로 하고 있다면, 언젠가 그 자리의 주인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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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방탄소년단)

 

최근 한류의 최고 전도사 역할을 해 온 BTS가 활동을 중지한다는 뉴스가 일본에도 보도되었다. 이런 공백을 일본에서는 찬스로 여기고 자신들의 실점을 만회할 절호의 찬스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웃나라끼리 서로 절차탁마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BTS의 활동 정지가 풍문대로 권력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문화 콘텐츠를 발전시켜 나아감에 있어서, 방심은 없어야 하며, 권력은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현재의 일본을 반면교사 삼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학 법학부 교수, 정치학 박사)

 

 

 

 

편집부 주

 

30여 년간 도쿄에 살며 일본 정치를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헌모 교수가

재일한국인의 눈으로 본 생생한 일본정치 현장과

일본 우경화의 현주소를 진단한 책이다.

 

일본 정치가 돌아가는 원리와 어떻게 우경화가

독주할 수 있는지 궁금한 독자는 집어드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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