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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침 댓바람에 걸려 오는 전화가 반가운 소식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분이 싸했다. 

 

큰누나였다.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가 기력이 없고 혈중산소포화도도 많이 떨어졌으니 아무래도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얘기였다. 지난주 문안에도 아버지가 좀 다운된 느낌이라 걱정하던 차였다. 그래도 그때는 간식도 좀 드시고 이야기도 나눴던 터였건만. 가슴이 철렁했다.

 

"얼른 내려갈게."

 

이것저것 여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옷을 챙겨입고 가방을 쌌다. 

 

다만 장마철임에도 옷은 좀 갖춰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옷차림이 첫인상을 좌우하니, 은행이나 병원, 관공서 같은 곳에 갈 땐 가급적 신경 써서 입으라고 이르고는 하셨다. 아버지는 아무리 가까운 집 앞이라도 언제나 겉옷까지 챙겨 입고 나가셨다. 

 

혹시 몰라 노트북 어댑터, 갈음옷, 며칠 치 천식약도 챙겼다. 채비를 마치고도 어쩐 일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은 급한데, 자꾸만 물을 마시고 약장을 뒤지고 가방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머뭇거렸다. 이상하게 무엇이 두려운지도 모르고 두려웠다.

 

잔뜩 찌푸린 장마철 하늘은 우산으로 쿡 찌르면 금방이라도 뚝뚝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이런저런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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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든든했던 사람

 

초등학생 시절 자전거를 타고 윗동네 놀이터에 놀러 가곤 했다. 친구네 집 바로 앞에 그 놀이터가 있었고, 우리 동네와는 달리 넓은 모래밭이 있어 땅을 파고 놀기 좋았다.

 

어느 날, 그 놀이터에 갔다가 처음 보는 형들에게 한쪽 구석에서 둘러싸여 있는 친구를 발견했다. 그 친구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것을 보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 형들이 나를 보고는, 이리 와보라 손짓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졸아붙어 있었다. 그 형들이 다가와 내 자전거를 좀 타보자고 했다. 자전거를 뺏어가려는 심산이었다. 

 

안된다고 버텼다. 그러자 무리 중 한 명이 내 앞에 섰다. 두 발로 앞바퀴를 고정하고는 두 손으로는 내 자전거 핸들을 있는 힘껏 잡아, 비틀었다. 자전거 핸들은 힘없이 돌아갔다. 그 형은 빙글빙글 웃었다. 사이좋게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던 바퀴와 핸들이 비틀려 버렸다. 울컥 짜증이 올라오며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아이, 씨바!"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뭐라고? 이 쪼꼬만 XX가!"

 

그 형이 내 멱살을 잡으려고 핸들을 놓았다.

 

'엄마야~!'

 

앞뒤 보지 않고 자전거 페달을 굴렀다. 살길은 도망치는 수뿐이었다. 형들도 전속력으로 쫓아왔다(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 어린 것이 어떻게 핸들이 있는 대로 비뚤어진 자전거를 타고 침착하게 내리막길을 전력 질주해서 내려올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견하다). 손만 뻗으면 잡힐 듯했다.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며 쫓아오는 그들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절망의 순간, 저 멀리 우리 집 앞에 러닝셔츠 바람으로 세차하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부지~!'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자전거를 팽개치고 아버지 뒤에 숨었다.

 

"니들 뭐야, 이 자슥들!"

 

핸들이 비뚤어진 자전거와 내 뒤를 쫓던 형들을 보고 사태를 파악한 아버지는, 걸레를 든 채 악을 썼다. 그 형들은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꽁지를 뺐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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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늘 집에 없던 사람

 

군인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늘 집에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내가 태어나던 날에도 아버지는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있었다고 했다. 군복을 벗고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나 지방에서 근무하셨다. 그러다 보니 나에겐 유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잠시 귀국했던 적이 있다. 아버지가 집에 오셨는데 그가 사다 준 미니카를 손에 쥐고도,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뛸 듯이 기뻐하며 아버지를 반가워해야 좋아하실 것 같은데, 아버지가 영 낯설고 서먹하고 어려웠던 터라 연기도 어려웠다. 아버지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던 날, 공항에 갔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머니를 보고 깨달았다. 엄마에게 나와 누나들 말고도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에게도 아버지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대전이나 울산 같은 지방 지사에 파견되는 일이 잦았던 탓에 아버지는 여전히 대부분 시간에 집을 비웠다. 아버지가 서울 본사로 발령이 나서 퇴근을 집으로 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으로 기억한다.

 

나와 아주 비슷하면서도 또 많이 다른 사람, 아버지와 함께한 본격적인 기억은 그 이후부터다.

 

3. 싸움

 

중학생 때 같은 반 친구와 싸웠던 적이 있다. 주먹질이 오갔다. 태권도 3단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던 친구와 그의 잘난 체를 아니꼬워했던 나 사이에 쌓여오던 감정이 폭발한 날이었다.

 

엉겁결에 휘두른 주먹에 친구가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녀석도 나도 깜짝 놀라 사태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입술이 터져 피가 나는 것을 확인한 친구는 종이 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이네 살리네 고래고래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나도 화를 삭이는 척 제 자리에 서서 노려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친구들이 얼른 말려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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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영화 '울학교 이티'>

 

바람과 달리, 싸움은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오시면서 그 광경을 보시고 나서야 마무리됐다. 결국 우리는 학생과에 계신 담임 선생님에게 끌려갔다. 엎드린 채 빠따를 몇 대씩 맞았다(맞으면서도 저 녀석은 나한테 맞고 선생님에게 또 맞으니 무지 억울하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말 잘 듣고 얌전한 모범생 둘이(진짜다. 믿어주시라) 피투성이로 욕 배틀까지 벌이고 있었으니, 선생님도 무척 놀라신 눈치였다.

 

선생님의 연락을 받은 내 어머니와 친구의 어머니가 학교에 뛰어오셨다. 어머니는 쩔쩔매시며 친구와 친구 어머니에게 사과하셨다. 친구를 병원에 데려가 치료비를 물어주셨다. 덕분에 친구와는 나중에 화해했다(그날로부터 오랫동안 어머니는 내가 혹시 불량청소년이 되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셨다).

 

한참이 지난 후 어머니에게 그날 아버지와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난생처음 학교 학생과에서 호출받고 패닉에 빠진 어머니는 대전에 계시던 아버지에게 전화하셨더랬다. 처음엔 아버지도 깜짝 놀랐다. 언제 그랬냐고, 어디가 얼마나 다쳤냐고, 얌전한 애가 뭣 때문에 싸웠냐고, 지금 애 어느 병원에 있냐고 대답할 틈도 없이 어머니를 다그치셨단다. 그게 얘가 맞은 게 아니라 때렸다고, 그래서 학생과에 잡혀있다고, 보호자는 학교로 오란다는데 당신이 가보겠냐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래…? 그럼 치료비 잘 물어줘야겠네. 얼른 학교 다녀와 봐. 나는 바빠서…' 하고 끊으시더라는 것이었다.

 

주말에 아버지가 올라오시면 크게 혼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일로 아버지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지는 않았다. 주먹 먼저 쓰는 것 아니라고, 화가 나면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낫다고 당부만 하셨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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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숙했던 사람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려본 기억이 없다. 유년 시절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 아버지는 그저 어려운 사람이었고, 살가운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나에게 자주 해주던 이야기가 있었다. 하루에 영어 열 문장씩만 외워보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유창한 영어가 술술 나오게 될 것이라거나, 한발 앞서 생각하고 노력해야만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거나, 의지가 강한 사람이 되어야 뭐든 이룰 수 있다거나 하는 등속의 이야기였다. 자기계발서에서 볼법한 내용들이었다. 막내아들이며 장남인 나는 열심히 힘을 키워 아버지를 이어 엄마와 누나들을 돌보는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당부도 으레 덧붙였다.

 

나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건전하고 큰 꿈을 꾸는, 언제나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어야 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혹은 이성 친구 같은 것들은 사소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라고 여겨 그에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둘은 말 없는 부자 관계가 시나브로 되어갔다. 여기에 대입 실패는 결정타였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컸다. 아버지를 더 어려워했고, 대화는 더 줄어들었으며, 둘 사이는 더 멀어졌다.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니, 아버지도 처음 해보는 아버지 노릇에 단지 미숙했을 뿐이었다.

 

아이를 키워보니 그렇더라. 아이들이 커갈수록 무슨 말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더라. 차라리 어릴 때는 간지럽히며 다짜고짜 장난이라도 치겠지만, 그 과정을 훌쩍 지나 청소년이 되어 만난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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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영화 '걸어도 걸어도'>

 

뒤늦게 육아에 참여한 아버지도 고민했을 터이다. 그가 수없이 반복했던 <세바시> 강연 같은 이야기들도 그 고민으로부터 나름대로 찾아낸 선책(善策)이었으리라.

 

5. 무모했던 사람

 

회사에서 정년 퇴임하고 아버지는 사업을 시작했다. 군인이랑 선생님 돈은 남의 것이라고 했던 말, 진짜였다. 어찌 그리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찾아와 돈을 빌리고 사업 제의를 해댔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아버지는 사람들을 덜컥덜컥 믿고 사업을 벌였다. 온 가족이 아무리 뜯어말려도 소용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시도했던 끊임없는 도전은 고스란히 끊임없는 실패로 이어졌다. 급기야 절대 그럴 일 없을 사람이라며 서주셨던 몇 번의 연대보증에 두 분이 평생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날려버리게 되었다.

 

무모함의 대가는 컸다. 남은 것은 빚과 시름뿐이었다. 가족들이 살 집은커녕, 생계유지를 위해 끌어올 빚도 더는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군인이 사업에 뛰어들어 전 재산을 날린 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우리 집이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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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신의와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거짓말은커녕 허세도 못 부리고, 포커페이스도 못 하는 순진한 사람이다. 사업보다는 조직에서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그런 사람이 사업에 뛰어들었으니, 어쩌면 실패는 예정되었었는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군대와 회사에서 밀려난 아버지가 살고자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그뿐이었다는 것이다.

 

집안의 재기를 도모하기엔 아버지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아들의 나이는 너무 어렸다. 누나들이 돈을 벌어댔지만, 커져 버린 빚은 갚아도 갚아도 늘어만 갔다.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희망만 보이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소연하던 엄마에게 미안했다. 끝없는 빚더미에 절망만 하다 세상을 떠난 엄마가 불쌍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홀로 남은 초라한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뿐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