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본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한가지 짚어야 할 점이 있다. 지난 편에서 이번 판결은 ‘낙태를 대법원에서 금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주 의회, 정부에서 알아서 결정하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아래와 같은 의문을 품는 분들이 있다.

 

“헌법에 낙태의 권리를 문구로써 못 박아놓은 것도 아니고, 연방 대법원에서 낙태를 금지한 것도 아니다. 국민이 뽑은 대표자들에게 낙태에 대한 입법을 맡기겠다고 한 거라면, 이번 판결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이지?” 

 

미국은 주별, 지역별 상황이 다른 부분이 많아 연방정부나 헌법의 지나친 개입이 적합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면, 어떤 경우는 나라 전체에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가지는 게 나은 경우도 있다. 낙태 문제에 대해 약 60% 이상의 미국인들은 후자의 경우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방대법원 앞 시위.PNG

낙태권 관련 이번 연방 대법원 판결에 항의하는 시위대 

출처-<Reuters>

 

각 주에 자율로 맡겨두면, 낙태 이슈가 (일시적일 수도 있는) 정치적인 방향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우리가 정치인에게 표를 주고, 지금 이쪽, 4년 뒤 저쪽, 그렇게 흘러가는데, 선거의 결과가 꼭 정의롭고 사회가 발전하는 방향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안은 그러한 점을 뛰어넘는 가이드라인 설정이 필요하다. 미연방 헌법에 담긴 가치가 그런 것에 해당한다.

 

흑인이나 여성의 참정권이 한 예다. 주마다 자체적으로 입법해서 얻게 된 권리가 아니다. 일부 주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있었을 텐데, 헌법적으로 결정되었다. 이 사안에 대해 주별로 목소리가 달랐음에도, 헌법으로 미국 전체에 이 가치를 강제했다고 해 민주주의 기본원리에 위배된 잘못된 결정이라고 할 순 없다.

 

이번 결정을 비판하는 다수의 미국인들은 ‘최소한 부분적이라도 인정받는 낙태의 권리’란 주별로 혹은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 있는 게 아닌,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봉인에서 풀려난 각 주의 낙태법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하 ‘Roe 판례’ 혹은 ‘Roe 판결’로 간단히 칭하겠다) 이후, 많은 주에서 낙태 금지법을 적극적으로 뜯어고치진 않았다. 미국 최고의 사법기관인 연방대법원에서 여성의 낙태권을 부분적으로 승인해주었기 때문에, 주별로 낙태를 금지하는 법은 자연히 사문화되어 집행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주별 낙태 금지법은 형식적으로는 계속 존속해왔다. 

 

이 법들이 이번 대법원 판결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지난 6월 24일을 더 이상 합법적으로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사진1.PNG

현재 주별 낙태 시기별 허용 현황.

지도에는 주별로 낙태에 대해

‘전면 금지, 6주 이내, 15주 이내, 20주 이내, 24주 이내, 제한 없음’에

따라 다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출처 링크> 

 

2022년 7월 현재, 주별 낙태 합법 여부를 알려주는 위 지도를 보면, 7개 주(AL, AR, MO, MS, OK, SD, TX)에서는 완전 금지다. 3개 주(IN, SC, TN)에서는 임신 6주 이상 금지다. 사실 임신 6주는 많은 산모들이 전혀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짧은 기간이라 완전 금지와 사실상 차이가 없다. 이 외에 많은 보수 성향의 주들은 낙태 금지 법안을 새로이 정비해서 내놓으려고 벼르고 있다. 완전 금지나 그에 버금가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다른 주로 가서 낙태하는 건 쉽지 않다

 

낙태 시술을 받고자 하는 개인에게, 그리고 주변의 가족들에게, 이번 사태는 단순한 이념이나 토론의 문제가 아니다. 살고 있는 곳에서 낙태가 불법이라면 낙태를 하기 위해 근처의 다른 주로 가야만 한다. 

 

예를 들어, 텍사스 주민이라면 뉴멕시코로, 인디애나 주민이라면 뉴저지로 갈 테고. 비행기로 간다 하면 덴버(콜로라도)나 뉴왁(뉴저지)으로 갈 수도 있겠다. 허나, 이런 건 시간적, 금전적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개인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렇지 않은 절대 다수의 미국인들은 이렇게 할 수 없다. 

 

“낙태가 금지되면, 낙태 가능한 다른 주로 가서 시술받으면 되는 거 아냐?”

 

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란 거다. 때문에 절대 다수의 미국인들에게 이번 판결은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절반이 넘는 미국인들이 실직 시 3개월 정도의 생활비를 충당할 가처분 저축이 없다.

 

세대별 3개월치 생활비를 저축한 사람들 비율.PNG

출처 링크

  

낙태 금지주에 사는 주민이 낙태 가능주로 이동, 낙태 시술을 받는데 필요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인구는 절반에 훨씬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성의 경우, 소득 수준, 저축 수준은 더 낮다. 기본적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형편이나 입장이 아닌데, 사회로부터 낳으라고 압력을 받는 건 재정이나 건강 문제 이외에도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다.

 

미국의 대기업들은 이렇게 사회에서 큰 이슈가 나올 때마다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경우가 많다. 진작부터(Roe 판례가 조만간 뒤집혀 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왔을 때부터) 많은 회사들은 이에 우려의 목소리를 확실히 내어 왔다. 

 

결국 6월 24일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이들은 낙태를 원하는 직원들에게 사원 복지의 일환으로 낙태를 위한 이동 교통비 지급이나 건강보험 확대, 휴가 확대 등 혜택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낙태 지원회사.PNG

제목: 이 회사들은 낙태 여행 경비를 지불하고 있다.

출처-<CBS NEWS> 링크

 

위 기사의 내용에 알 수 있듯, 아마존, 스타벅스, 타겟, CNN, Ikea,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프락더 앤 갬블 등, 우리 귀에도 익숙한 회사들이 많고, 확대되는 추세이다. 

 

이들 기업이 선하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된다 판단했기에 이런 제스쳐를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난 50년간 미국 국민들은 낙태 선택권을 지지했고, 꽤 소중히 여겼다. 기업들의 움직임은 그에 대한 방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판결로 휘청대는 대세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이들 회사의 직원들은 안정된 직장에 미국 평균 소득 수준을 상회하는 경제력을 지녔다. 저소득층 및 소외된 계층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에게 이런 복지는 먼 나라 이야기다.

 

 

낙태 반대 운동의 역사  

 

1. 기독교계의 낙태 반대 운동

 

도덕적인 또는 종교적인 이유로 낙태에 반대하는 정서는 인류 역사상 언제나 있어왔으나, 조직적인 낙태 반대 운동은 1973년 Roe 판결 이후, 기독교 진영(카톨릭 포함)과 공화당 진영에서 주도하며 본격화되었다.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개신교 진영에서는 70년대 말까지도 낙태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Roe 판결 직후에는 이를 환영하는 교계의 지도자들도 있었다(후에 입장이 바뀌긴 하지만 남침례교단 의장을 지냈던 크리스웰 목사 같은 경우도 Roe 판결 지지 의견을 냈다). 

 

크리스웰 목사.PNG

월리 아모스 크리스웰 목사 (1909-2002)

1969-1970년 남침례교단 의장을 지냈다.

 

남침례교단 소식지인 <Baptist Press>는 Roe 판결이 ‘종교의 자유와 인간의 평등과 정의를 함께 진전시켰다’고 평가했다. 당시만 해도 낙태의 전면 금지가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기독교계에서도 공감했던 분위기다. 특히 예외적 상황(강간, 근친상간, 기형아, 산모건강위협)의 낙태 필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했다.

 

그러나 70년대를 지나면서, 미국의 남침례교단, 복음주의 세력은 급격히 우경화되며, 공화당 정치 세력과 콜라보를 이루게 된다. 동시에 당시로서는 ‘트렌디’한 방법으로 (대형 교회들의 부상, TV, 라디오를 통한 선교, 전국 규모의 이벤트 개최 등) 보수의 메시지를 사회에 전파한다(참고: 남침례교단은 소위 복음주의자(evangelicals)로 불리며 미국 전체 개신교계의 얼굴마담 격을 하는 교파이다. 한국식으로 보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예장) 정도로 보면 된다).

 

7, 80년대를 거치면서, 낙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남침례교단에서는 앞서 열거한 몇 가지 예외적 상황에서, 산모 건강 위협의 경우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90년대를 거치면서, 남침례교단에서는 낙태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오고 있다. 

 

연례 모임.jpg

미국 남침례교 연례 모임

출처-<ALBERT MOHLER>

 

기독교계에서는 낙태 문제의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은 금욕 및 혼인 외 성관계 금지라고 보고 이를 사회적 캠페인으로 주장해왔는데, 이는 당연히 모두의 비웃음을 샀다. 캠페인을 하려면, 차라리 피임 권장이나 10대를 위한 피임 도구 사용법에 대한 교육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원치 않는 임신을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을 터인데, 교계에서는 절대 그런 입장을 보이지 않는다.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한국이나 미국이나 많은 경우, 기독교계를 보면 참 답이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70년대 기독교 세력의 우경화가 심화되면서 낙태 반대 운동은 점차 과격성을 보이게 되었다. 상대측을 “아기 살인자”로 부르고, 그런 악마적인 집단을 심판해야 한다며 직접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합리화했다.

 

사진 그림.PNG

관련 기사 링크

 

National Abortion Federation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77년부터 2020년까지 24년 동안 살인 11건, 살인 미수 26건, 낙태 클리닉에 대한 폭발 44건, 방화 194건, 방화 미수 104건 등이 집계되었고, 살해 위협, 폭탄 위협, 폭행, 스토킹, 시설 훼손 등은 수백 건에 달한다. 기독교계에서는 폭력적인 캠페인과의 연관성을 부인하지만, 이런 테러들이 기독교계로부터 영향을 받아왔던 건 부정할 수 없다.

 

2. 제도적 장치를 이용한 낙태 반대 운동

 

기독교계나 사회 캠페인의 일환으로 낙태 반대를 주창하는 세력과는 별도로, 지난 50년 동안 법과 행정적 절차로 낙태 금지를 밀어붙이는 시도도 꾸준히 있어왔다. Roe 판례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은 통하지 않았지만(앞서 얘기한 대로, 1973년 당시 Roe 판결은 수정 헌법을 근거로, 정부는 국민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다는 판결이었기 때문), ‘태아는 생명’이란 부분을 부각시킨 캠페인이 차츰 많은 미국인들의 정서에 자리를 잡아 나간다. 몇몇 보수적인 주와 시, 카운티 등 지방 자치 단체에서는 살인, 상해 등을 다루는 형법이나 아동 복지법 등으로 낙태를 어느 정도 부분적 금지 혹은 저지할 수 있었다. 

 

낙태 시술을 하는 의료인이나 시설을 대상으로 압박을 하기도 했다. 합법이라는 틀 속에서 벌어졌던 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법률 기술자들의 놀음이다. 또한 일부 공화당 장악 주에서는, 낙태 시술의 부작용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며, 낙태는 여성의 건강 및 권익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불필요한 절차라는 논리로, 시술 전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죄책감, 불임, 유방암 위험 상승 등 낙태의 위험성에 대해서 반드시 주지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했다.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의학적, 사회적 위험성은 쏙 빼놓고 낙태의 부작용에 대해서만 주지하도록 하는 건 국민에게 지극히 편파적인 정보만 제공하도록 하는 우매한 공권력의 남용이라 본다. 

 

동시에 이들 주에서는 낙태 시술을 받기 어렵도록 하는 잡다한 절차나 규정이 많다. TRAP (Targeted Regulations of Abortion Providers)이라고 불리는 이런 법 규정들은 2021년 기준 23개 주에 있었다(출처 링크).

 

Roe 판례가 비록 공식적으로 낙태에 대한 선택권을 헌법적으로 인정해주기는 했지만, 낙태 반대 측에서는 ‘생명 존엄성’을 내세우며, 사회적 캠페인과 제도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이용해 낙태 반대 운동을 해왔다. Roe 판례를 뒤집기 위한 물밑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었다는 것이다. 

 

 

보수 세력에 장악된 대법원

 

1. 대법관 임명을 둘러싼 공화당의 억지

 

이번 2022년 판결의 1등 공신은 단연 대법원이다. 현재 대법관 구성은 지난 75년 동안 최고로 보수화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npr.PNG

제목: 대법원은 지난 75년 동안 가장 보수적이다.

출처-<npr> 링크

 

2016년 2월, 보수 성향 대법관 안토닌 스캘리아(Antonin Scalia)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의 사망 직전, 보수 대 진보 성향 대법관은 5 대 4였고, 미국의 대법관은 공석이 생기면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통해 임명된다. 

 

안토닌 스캘리아.jpg

안토닌 스캘리아

출처-<TIME>

 

당시 대통령은 오바마(민주당)였기에 진보 쪽에서는 대법관 구성을 진보 우위로 가져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상원의 다수는 공화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상원 공화당 대표였던 미치 머카널(Mitch McConnell)은 

 

“금년(2016년)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므로 지금 새로운 대법관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 내년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공석을 유지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The Independent.PNG

미치 머카널

출처-<The Independent>

 

어떠한 법적 근거나 선례도 없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다음 대통령이 대법원 임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민주적 절차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말은, 오바마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대법관 지명권은 무시하겠다는 얘기이고, 다음 대통령에게 지명권을 넘겨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대통령 임기는 당시 11개월이나 남았고, 대선까지도 9개월가량 남아서, 시간적으로 충분했지만, 

 

“급하게 서두르면 안 된다. 국민의 뜻을 거스를 수 있다.”

 

는 억지를 반복했다. 오바마는 진보 성향 중에서도 나름 중도파로 알려져 있는 메릭 갈랜드(Merric Garland)를 지명하며 상원을 설득해 보았으나, 공화당 상원 의원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상원 인준을 위한 표결은 물론, 모든 예비 절차(예를 들어 후보자 면담 절차)를 거부했다. 

 

이때만 해도 트럼프가 뻘짓을 계속하던 때였고, 차기 대권은 힐러리로 넘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대부분이었기에 오바마와 민주당에서는 더 이상 상원의 공화당 의원들과 티격태격하지 않았다. 

 

바마와 갈랜드.jpg

오바마(좌)와 메릭 갈랜드(우)

출처-<Reuters>

 

트럼프와 닐 고서치 사진사진.jpg

닐 고서치(좌)와 트럼프(우)

출처-<CNN>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2016년 11월 대선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7년 트럼프 취임 후, 바로 보수 강경파 닐 고서치(Neil Gorsuch)가 지명되고 인준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2018년 여름, 중도 보수 성향 앤토니 케네디(Anthony Kennedy) 대법관이 은퇴하며 공석이 생겼다. 트럼프는 자신의 임기 중 두 번째로 대법관을 지명하고 인준받는다. 브렛 캐버너(Brett Kavanaugh)를 대법관에 임명했다. 2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이 같은 성향으로 교체된 것이기에, ‘보수 5, 진보 4’의 구도는 유지된 상태였다.

 

앤토니 케네디 브렛 캐버너.jpg

앤토니 케네디(좌)와 브렛 캐버너(우)

출처-<AP>

 

2. 대법관 구성의 밸런스가 깨진 시점

 

대법원의 보수화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건, 2020년으로 그다음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였다. 대표적인 리버럴 성향의 대법관으로 진보계의 거두 판사라고 평가되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대법관이 9월 19일 사망한 것이다. 

 

1933년생이었던 그녀는 이미 상당한 고령이었고, 건강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버티며 트럼프 집권 동안 생을 유지하려 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긴즈버그 WAMU.jpg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출처-<WAMU>

 

“트럼프가 내 자리에 보수 꼭두각시를 앉혀 놓는 꼴은 용납할 수 없다. 난 트럼프 임기 중에는 절대 안 죽는다.”

 

라고 강한 결의를 보이며 대법관 업무를 보던 인물이었는데, 인명은 재천이라 본인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었나 보다. 그녀가 사망한 날은 대선까지 고작 45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  

 

이때 상원 공화당 대표 미치 머카널은 4년 전과 다른 논리를 펼친다.

 

“대법관 지명은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중요한 대통령의 임무이니, 대선 결과에 상관없이 최대한 빨리 진행해 공석을 채우는 것이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

 

이라며 과거 자신의 발언과 정반대 주장을 한다. 결국, 후임으로 강경 보수 성향의 에이미 배럿(Amy Barrett)이 지명되었고, 10월 26일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인준되었다. 11월 3일 대선까지 일주일밖에 안 남은 시점이었다. 그래서 현재 대법원 구성이 보수 6명 대 진보 3 명이 된 것이다.

 

에이미 배럿.PNG

에이미 배럿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보며, 많은 미국인은 “이게 민주주의냐? 이렇게 구성된 대법원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냐?”며 자괴감에 빠졌다. 

 

(보수, 진보 대법관이 현재 6명, 3명인데, 이번 낙태법 관련 판결은 5 대 4로 Roe 판결이 무효화 되었다. 이유는 보수 대법관 중 한 명인 존 글로버 로버츠 주니어(영어: John Glover Roberts, Jr.)가 Roe 판결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현직 연방 대법원장으로 보수 성향이지만, 2021년 오바마 케어 합헌 판결 등 여러 사회적 이슈에서 진보의 손을 들어준 적이 꽤 있던 인물이다. 그러나 워낙 보수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터라 Roe 판결이 뒤집히고 말았다)  

 

4a89d45f545231440c3eeedceeec7e54.jpg

Roe 판결 무효화에 손을 든 대법관 5명 중

3명의 대법관

닐 고서치(Neil Gorsuch), 브렛 캐버너(Brett Kavanaugh),

에이미 배럿(Amy Barrett)는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들이다.

 

3. 민의가 반영되지 않은 대법관 구성

 

최근 30년 미국 사회 문화의 흐름을 보면 진보가 보수보다 수적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992년부터 2020년까지 32년 동안 8번의 대선이 있었다. 2004년 한 번을 제외하곤, 나머지 7번의 민주당 후보는 공화당 후보에게 총득표수에서 진 적이 없다(미국 대선이 단순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었다면, 이건 진작에 게임 끝이었다는 얘기다). 진보 성향 주들이 평균 소득, 구매력과 문화를 주도하는 측면 모두 보수 성향 주들보다 앞서 있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민주당은 이러한 사회 문화 추세를 바탕으로 공화당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공화당에서 끊임없이 정치 테크닉(이라 쓰고 협잡이라 읽는다)으로 공세를 벌이는 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인구수 변경에 따른 선거구 재조정 같은 걸 통해 전체 인구 중 공화당 지지 인구는 줄어들어도, 공화당 의원 수는 줄지 않는다. 오히려 늘기도 했다. 

 

2016년과 2020년의 대법원 임명 인준 해프닝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연도를 넓혀 보면, 더 분명히 보인다. 

 

1969년부터 2020년까지 52년 동안, 공화당 대통령은 28년 집권, 민주당 대통령은 24년 집권했다. 그 기간 중 대법관 임명은 공화당 대통령의 임기 중 13번 이루어졌지만, 민주당 대통령 임기 중에는 4번밖에 없었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대법원 구성이라 할 만하다(출처 링크).

 

 

낙태 금지로 보수 세력이 얻는 것

 

낙태 금지를 주장하는 집단에서는 이번 판결로 도대체 무슨 이득을 볼까? 

 

아무리 봐도 낙태 금지가 각 개인에 직접적으로 이익일 순 없다. 단지,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추상적인 이념, 양심이나 종교적 신앙 때문에 낙태 금지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CNS.jpg

낙태 반대 시위

출처-<CNS>

 

‘생명의 존엄성’을 위한 가치 추구라는 건 언어도단이라 본다. 낙태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들 절대다수는 개인의 총기 소유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총기 소유 문제에 있어서 생명의 존엄성을 위해 총기 소유 불법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들은 다른 방향의 논리를 편다. 뱃속의 태아만 생명이 존엄하고, 미국에서 총기 사고로 죽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은 그들이 울부짖는 생명의 존엄성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인지 궁금하다(요즘에는 이런 것을 ‘선택적 정의’, ‘선택적 양심’이라 부르는 것 같다).

 

미국에서 오랜 기간 살며, 이들을 관찰한 바로는 한국의 일부 사람들과 비슷한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자기에게 아무 이득이 되는 것도 없고, 오히려 정책의 방향은 자기 이익과는 반대로 가고 있음에도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단순히 빨갱이 쪽으로는 절대 지지해줄 수 없어서, 인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정책을 고려해 보지도 않고 몰표를 보내는 집단 말이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아니, 여느 인간 사회에서나 이런 부류의 인간은 존재하기 마련인 것 같다. 이게 현재 미국의 낙태 반대론자들의 사고 메카니즘에 가장 잘 들어맞는 분석이 아닐까. 

 

낙태 금지가 개인에게 이익이 되진 않으나,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면은 있다. 낙태 반대 흐름으로 인해 거시적인 사회 현상이 형성되고, 그 현상으로 일부 집단, 그중 특히 보수 집단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

 

보수의 기본 속성은, 사회를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데에 있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사회 지도층과 그 지도를 받는 계층. 이러한 여러 계층 간에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상위 계층은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사용해 하위 계층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한다. 

 

열심히 노오력하면 하위에서 상위로 올라설 수 있다고 선전하고 성공 사례를 띄우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범주일 뿐 대규모로 계층 상승이 이루어지는 건, 그들에게 별로 반갑지 않다. 파이가 작아지기 때문이다.

 

펠레.jpg

펠레의 성공 스토리를 다룬 영화.

브라질의 경우도, 수구 세력은

이런 개인의 성공 스토리를 선전하며

성공은 개인의 노력에 달렸다는 가치관을 퍼뜨린다.

 

보수의 낙태 금지에 대한 입장은 이러한 보수의 속성에 기인한다. 개인에게 자유와 선택권을 주고, 공적 절차를 통해 지원을 해 주고, 그들의 삶을 도와주고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게)하게 이끌어주면, 하위 계층이 상위로 올라가는 것이 수월해진다. 다만 그것은 보수가 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사회 질서가 교란된다. 그동안, 메디케이드(주 정부가 주관하는 저소득층 의료 보호 혜택)에 낙태 시술이 포함되는 걸 쌍심지 켜고 반대해 왔던 보수 주들에는 이런 정서가 기저에 깔려 있다.

 

낙태 이슈는 일부 계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치 않는 임신, 출산하면 안 되는 상황,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에 상위 계층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전술했듯,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여력이 되는 한 낙태를 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낙태 반대주의자들은 낙태를 하는 상위 계층을 향해, 조심스레 반대 의견을 낼 수는 있어도, 목소리를 올리지는 못한다. 아무리 생명 존엄성을 언급해도, 

 

“이건 내 인생, 내 사생활이야. 니가 내 인생 살아 주는 것도 아닌데, 신경 좀 끄면 안 되겠니?” 

 

라고 나오면 물러서게 된다. 하지만 하위 계층을 향해서는 비난과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위 계층에 비해 우위에 있고 그들의 사생활에 관여할 자격과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프.PNG

주별 낙태에 관한 여론

출처-<PEW RESEARCH CENTER> 

전체 주에 대한 정보를 보고 싶다면 (링크)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은 몇 개 주를 살펴보면 아칸소(AR), 미시시피(MS), 앨라배마(AL), 웨스트 버지니아(WV), 켄터키(KY), 루이지애나(LA), 테네시(TN) 순이다. 평균 소득이나 GDP 집계 자료에서 하위권을 맴도는 주들이다. 이곳에서 소득 격차가 큰 것은 덤이다. 

 

하위 계층에서 보수 성향이나 낙태 반대론자를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특히 공화당 장악 지역에서 그러하다. 보수 이데올로기 속에서 태어났고 그 안에서 성장과 교육을 받은 그들을 나는 수구 세력에 사육된 희생자라고 본다. 

 

총기는 찬성하지만 낙태는 반대하고, 낙태를 해야한다면 잠시 생계를 접고 빚을 내어 다른 주로 가야한다. 자신의 지지가 결국 현재의 계층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반복되는 쳇바퀴를 굴리는 모습은 어딘가 한국과 닮아 있어 씁쓸하다.  

 

 

<끝>

 

 

 

본 기사에서도 잠깐 나왔던, 뻘짓하던 트럼프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스토리를 면밀히 알고 싶다면 '트럼프 체험기' 시리즈 기사를 추천한다. 

 

 

 

 

소리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