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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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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학과 지성사>

 

 

참혹한 분단과 전쟁을 피해 떠난 최후의 광장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그 바다를 ‘타고르’ 호는 미끄러지듯이 항해하고 있었다. 타고르 호의 행선지는 인도였다. 그 배의 갑판 위에서 한국인 승객 ‘이명준’은 미스트 위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큰 새 한 마리와 작은 새 한 마리가 선회하며 타고르 호와 함께 항해하고 있었다. 이명준이 하늘을 볼 때마다 언제나 그 새들이 있었다. 이명준의 항해는 그 새들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었다.

 

‘각시들아,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아. 내 딸아.’ 명준은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하늘의 각시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곧 함박웃음으로 바뀌었다. 큰 새는 명준에게 마지막 광장이 되어준 ‘은혜’였고, 작은 새는 끝내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엄마 뱃속에서 엄마와 함께 죽은 그의 고운 딸이었다.

 

명준은 그 웃음 끝에 크레파스보다 진한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바다, 고운 각시들이 늘 하늘에서 바라보아줄 그 바다가 바로 명준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마지막 광장이었다. 영원한 안식의 광장이었다. 그렇게 명준은 30년 정도의 짧은 인생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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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잔인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전쟁은 ‘종교전쟁’과 ‘내전’이다. 배신감과 분노는 그 대상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격렬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공식 명칭인 ‘한국전쟁’은 내전이었고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전쟁이었기에 아직도 누군가의 경험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전쟁이다. 그래서 더욱 참혹한 전쟁이다.

 

한국군 사망 13만 8천여명을 포함하여, 총 60만명 가량이 직접피해를 입었고, UN군 역시 사망자 5만 8천여명을 포함하여 50만명이 넘는 병사들이 피해자가 되었다. 북한군은 사망, 부상, 실종 등 80만 명이 전쟁의 피해를 입었으며, 후에 참전한 중공군 역시 사망과 부상 등으로 100만여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기간 중 미군이 사용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을 사용했다. 이것이 한민족의 내전, 이 작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더구나 군인들보다 민간인 피해가 더 컸던 끔찍한 전쟁이었다. 400만 명 가량의 이재민과 30만 명이 넘는 미망인, 그리고 10만 명 이상의 전쟁 고아들을 만들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은 1000만 명이 넘어 간다. 결론적으로 외국인 피해자들을 제외하고도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인 3000만 명 중 1800만 명이 피해를 입었던 끔찍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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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협상과 함께 전쟁포로의 석방이 진행되었다. 당시 남한은 10만여 명의 인민군 포로를 수용하고 있었다. 이 10만여 명의 포로 중 88명이 북한도 남한도 아닌 제3국을 선택했다. 그러나 중립국이었던 스위스, 스웨덴 같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미국 등, 그 어떤 나라도 이들의 수용을 거부했다. 한국전쟁에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UN의 결의에 따라 오직 의료활동만 수행했던 인도가 이 88명의 포로들을 모두 떠맡았을 뿐이었다. 

 

타고르 호는 그 한국인 76명이 포함된 88명의 병사들을 태우고 인도로 향하던 배였다.

 

남한 사회가 밀어낸 명준, 북한으로 가다

 

지금 철학과 3학년 이명준이 겪고 있는 일은 ‘아닌 밤중의 홍두깨’ 정도의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명준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일제강점기 독립군들이 고문받던 S서 사찰계 취조실에서 두들겨 맞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는 코에서 흐르는 끈적끈적한 피를 막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짚고 웅크려 있었다. 명준은 한 마리의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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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 전성 시대라면서 일제 때 특고 형사 시절에 좌익을 다루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인나라우. 너 따위 빨갱이 새끼 한 마리쯤 귀신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 있어. 너 어디 맛 좀 보라우.”

 

모든 인과관계가 파악되는 순간이었다. 인과의 첫 번째 고리는 일본 순사보다 더 잔인하게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특고 형사’ 경력이, 해방된 조국에서 처벌의 대상이 아닌 자랑스러운 경력이라는 현실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불안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민족반역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신의 권력 유지에 협조하는 대가로 ‘반공’이라는 면죄부를 선물한 것이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의 지위와 재산을 유지하는 것에서 나아가 오히려 더 큰 권력과 이익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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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가 반공투사로 탈바꿈한 대표적 사례 ‘노덕술’

그는 후에 부산 제2육군 범죄수사단장, 서울 15육군범죄수사대 대장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지만, 남로당 계열이었던 명준의 아버지, 이형도는 월북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서 ‘민족주의민족통일전선’의 책임자가 되어 그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남한에 방송된 것이었다.

 

경찰서를 나온 명준은 땅을 보며 걸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개미 한 마리를 발로 비볐다.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빨갱이...... 이 단어는 법률의 바깥에 있었다. 빨갱이로 지명받는 순간 사람이 개미가 되는 사회였다.

 

나의 방에는 명준 혼자만 있다. 나는 광장이 아니다. 그건 방이었다. 수인의 독방처럼, 복수가 들어가지 못하는 단 한 사람을 위한 방.

 

돌아가신 어머니와 월북한 아버지, 홀로 남은 명준은 자기만의 ‘밀실’로 잠수했다. 명준은 간절히 원했다. 밝은 햇빛이 비치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건강한 삶의 활력이 넘치는 광장을 간절히 원했다. 명준은 밀실을 벗어나 광장으로 나가고 싶었다.

 

윤애 날 믿어줘. 알몸으로 날 믿어줘.

 

‘부르주아’의 딸, 윤애를 사랑했다. 사랑이 명준을 광장으로 나가게 해 줄 것 같았다. 그러나 남한의 광장은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여있는 더럽고 추악한 광장이었다. 서양의 자본주의가 상수도와 하수도를 갖추고 있을 때, 남한은 바늘 끝만 한 양심으로 탐욕을 조절하는 최소한의 교활한 윤리조차 없는 자본주의였다. 하수도만 있는 광장이었고, 햇빛이라고는 한 줌도 들지 않는 밤의 광장이었다. 그리고 그 지저분한 광장의 두목들은 민족반역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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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아시아경제>

 

더구나 명준에게는 ‘빨갱이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광장은 고사하고 밀실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윤애와의 사랑은 그 어떤 구원도 될 수 없었다. 명준은 인천으로 갔다. 그리고 북한으로 밀항하는 배를 탔다. 그것은 명준의 선택이 아니었다. 남한 사회가 그를 밀어낸 것이었다.

 

가랑비는 짙은 안개 같다. 안개 속에서, 이따금, 짧은 뱃고동이 울려온다. 안개 속에 윤애의 흰 가슴이 있다. 그가 만지게 맡겨주던 촉촉이 땀 밴 가슴이, 가랑비를 맞으며 둥둥 떠 있다.

 

주인이 명준에게 한 귀엣말은 이런 것이었다.

 

“이북 가는 배 말씀입죠.”

 

이북으로 다니는 밀수선을 터주던 선술집 주인은 명준에게 수태고지 천사였고, 이북은 그에게 난데없이 비추는 한 줄기 빛이었다.

 

 

가면밖에 없는 북한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명준은 호랑이 굴로 스스로 들어온 자신을 저주했다. 그곳에는 명준이 상상했던 희망찬 코뮤니즘 공화국의 인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준이 상상했던 바스티유를 부수던 날의 열정과 희망의 프랑스 인민 대신 목사가 읽는 성경책을 따라 읽듯이 오직 당의 방침과 지시를 주문처럼 따르고 외우는 맥 빠진 얼굴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신명은 없었고 신명이 난 것처럼 흉내만 낼 뿐이었다. 혁명은 없었고 혁명의 흉내만 있었다. 명준이 참석한 그 어떤 모임에서도 인민의 열정과 의지에 대한 희망이 아닌, 판에 박은 듯한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피 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북녘의 아버지 덕에 신문기자가 되어 만주의 조선인 ‘꼴호즈(집단농장)’를 취재하고 돌아온 명준은 절망과 분노를 통제할 수 없었다. 꼴호즈의 인민들이 견장을 땐 일본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표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편집장과 간부들 앞에서 치욕적인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편집장에게 위대한 사회주의 인민들은 모든 인민들이 입고 먹어도 남을 영웅적인 생산의 향상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입을 옷이 없어서 일제가 남긴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명준의 보도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명준은 여전히 개인주의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반동적인 자본주의 생활 감정에 빠져 있는 개조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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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동 놈의 생퀴! 

 

명준의 리얼리즘은 사실을 사실대로 옮기는 것이었고, 편집장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인민의 적개심과 근로의 의욕을 양양시키고 고무시키는 방향으로 사실을 취사선택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명준의 사실보도는 소부르주아적인 인텔리 근성일 뿐이었다. 명준은 살기 위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남녘에 있을 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가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은 아무데도 없었어요. 아니, 있긴 해도 그건 너무나 더럽고 처참한 광장이었습니다.”

 

명준은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랍니까? 제가 남조선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

 

“그리고 북조선의 공산당원들은, 치사하고 비굴하고 게으른 개들입니다. 양들과 개들을 데리고 위대한 김일성 동무는 인민공화국의 수상이라? 하하하......”

 

명준은 부친 앞에서 목을 젖히며 웃었다. 아버지의 대답을 기대했으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준의 웃음은 울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방바닥에 엎드려 소리를 죽여 울었다. 아버지가 미웠다. 자신의 이런 말에 변명도 꾸중도 설득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날 밤 아버지는 잠든 채하고 있던 명준의 방에 몰래 들어와 그의 어깨 언저리 이불 깃을 꼭꼭 여며 주었을 뿐이었다.

   

 

명준이 찾은 마지막 광장

 

실제 노동자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명준은 야외극장 짓는 일에 의용 봉사원으로 자원했다. 신문사를 빠져나왔다. 이른 봄, 명준은 지붕 한 모서리를 쌓아 올리는 발판 위에 있었다. 활짝 갠 하늘을 보았다. 햇빛이 가득했다. 명준이 북녘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평양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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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후반 평양 모습

 

그 봄에 취한 명준은 발을 헛디디면서 아래로 떨어졌고, 명준의 허벅지 뼈에는 금이 갔다. 명준은 일제의 적산 가옥을 개조한 좋은 시설의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은혜’를 만났다.

 

병원에 입원한 근로 영웅들을 위해 위문단이 찾아왔다. 명준이 입원한 병실 문이 열리고 다섯 명의 젊은 여성들이 들어 왔을 때, 명준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한 명이 윤애가 아닌가 했기 때문이었다. 남녘에 두고 온 윤애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는 윤애에 대한 명준의 그리움이 만들어 낸 착각이었다. 그녀는 평양의 국립극장 소속 발레리나, ‘은혜’였다. 그리고 명준의 새로운 사랑이었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명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명준은 만년필을 손에 낀 채, 두 팔을 벌려 둥근 원을 만들었다. 공간이 생겼다. 그 동그란 공간은 작았다. 누군가가 들어 온다면 단 한 사람이었다. 그 공간을 채운 것은 은혜의 몸이었고, 은혜의 살이었다. 명준이 찾아 헤매던 진리는 의외로 작은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두 팔이 만든 공간,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 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 했다.

 

 

한국 전쟁과 함께 파괴된 마지막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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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을 짓누르는 어두운 밤에 비가 내렸다. 명준은 참호 속에 쭈그리고 앉아 이 어두움 속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고 명준은 인민군 장교로 이 전쟁에 참전했다.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은혜 역시 간호부로 전쟁에 징발되었다.

 

참호 속에서 철 늦은 비에 덜덜 떨면서도 어둠 속을 노려보는 명준의 눈빛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는 은혜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삶에 패배한 명준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몸짓이었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전세는 나날이 북쪽에 불리해지고 있었다. 은혜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하루에 서너시간의 잠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은혜와 명준은 그 시간을 잘게 쪼개어 서로를 만났다. 참호 속 명준이 웅크린 동굴이 비참한 사랑의 장소가 되었다. 은혜의 손에는 늘 가위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항상 약품 냄새가 났다. 군의관과 간호부의 가림마저 사치였다. 매일매일 병사들이 죽어야 했고, 다리를 잘라야 했고, 고통 속에서 죽여달라고 외쳐야 했다. 

 

“죽기 전에 부지런히 만나요. 네?”

 

총공세를 위해 공산군은 모든 화기를 한곳에 집결시켰다. 항공기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어 하늘은 유엔군의 독무대였다. 까맣게 하늘을 덮고 나타난 유엔 공군의 폭격기들은 한곳에 모인 공산군의 화기와 병력이 고마울 뿐이었다. 이날 낙동강에는 물 대신 피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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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부지런히 만나자고 한 은혜는 그 다짐을 지킬 수 없었다. 이날의 폭격으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은혜는 전사했다. 명준의 마지막 광장은 그렇게 파괴되었다. 

 

 

이제 남은 마지막 밧줄

 

포로라는 이름의 죽은 병사들, 그 커다란 관 속에 비옷 두름처럼 무력하게 드러누워 잠드는 광장이 그 관이었다.

 

마지막 광장까지 잃어버린 명준은 관속에 누워 있는 죽은 병사가 되었다. 그 관은 조국의 끝 남해 바다에 떠 있는 섬, 거제도였다. 명준의 관은 수많은 관들 중에서도 가장 깊은 관이었다. 그 속에서 명준은 깰 수 없는 악몽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일하게 은혜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할 때만 눈을 뜨는 살아있는 시체의 나날이었다.

 

명준이 누워있는 그 깊은 관 속으로 뜻밖의 밧줄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 밧줄의 이름은 ‘중립국’이었다. 그 밧줄이 내려온 곳은 판문점이었고 그곳에서 명준은 남과 북의 잔인함을 모두 거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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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동무, 지금 인민공화국에서는, 참전 용사들을 위한 연금 법령을 냈소. 동무는 누구보다도 먼저 일터를 가지게 될 것이며, 인민의 영웅으로 존경받을 것이오.”

 

“중립국”

 

북측 심사관의 고문이 끝나자 남측 심사관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당신은 고등 교육까지 받은 지식인입니다. 조국은 지금 당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버리고 떠나버리렵니까?”

 

“중립국.”

 

“나는 동생처럼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만일 남한에 오는 경우에, 개인적인 조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중립국.”

 

명준은 중립국을 선택한 75명의 한국인들과 함께 인도로 향하는 타고르 호를 타고 한반도를 떠났다. 그러나 인도에 발을 디딘 한국인 중 명준은 없었다.

 

 

광장에서의 연대를 꿈꾸며

 

모든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는 단 하나이다. 그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 자연과학이고 자연과학의 꽃은 수학이다. 그래서 인종과 종교와 지역을 초월하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직 수학이다. 수학만이 단 하나의 진리인 것이다.

 

‘1+1=2’, 이것이 수학이고 이것이 진리인 것이다. 이것을 언어로 바꾸면 ‘1 더하기 1은 2이다.’가 된다. 주어부인 ‘1+1’과 서술부인 ‘2이다’가 동어 반복이 된다. 주어와 서술어가 결국은 같은 말이므로 수학은 틀릴 수가 없다. 완벽한 진리다.

 

그러나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자연과학이 아닌 인문학이다. 그래서 자연 세계는 하나이지만 100명의 사람에게 각기 다른 100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고, 100명의 사람에게 100개의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의 해석에 의한 각자의 세계, 각자의 인생, 이것이 그 사람의 ‘밀실’이다. 자기만의 밀실이 안락한 이유이고, 자기만의 밀실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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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밀실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끈과 끈으로 서로가 이어져 있다. 일종의 그물처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그물의 이름은 사회이고, 보이지 않는 끈의 이름은 관계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형성되는 공간이 바로 광장이다. 광장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유이고, 광장에서 연대가 이루어지는 이유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은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어두운 곳에서는 곰팡이가 자라고 밝은 햇빛 아래에서는 푸른 새싹이 자라듯이, 어두운 곳에서는 음모와 야합이 이루어지고 밝은 곳에서는 공동의 행복이 논의된다. 광장이 밝고 건강해야 하는 이유이다. 밀실의 문을 열고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 밀실의 고립이 아닌 광장의 연대를 선택해야 한다.

 

광장에서 만나 관계를 맺고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연대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기쁨을 함께 즐기고, 누군가의 슬픔에 함께 위로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광장을 어둡게 하려는 것이 있다면 함께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혼자서는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못 한다. 함께 하면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았으나, 모든 것을 이겨낸 미국의 작가이자 교육가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던 ‘헬렌 켈러’의 말이다. 

 

어두운 시대, 힘겨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좋아지리라는 확신도 잘 들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럴 때 모두들 광장에서 만나 소주라도 같이 한잔했으면 한다. 거친 안주에 쓴 소주라도 같이 나누다 보면 힘든 인생이지만 흥이 나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땐 노래도 같이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들썩이며, 발을 구르며 흥겹게. 

 

어쩌다 보니 열세 번째 인생 탐구는 ‘연대의 술자리’를 제안하며 마무리하게 되었다. 힘든 인생, 같이 견디어보자, 함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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