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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을미의병으로 시작된 의병들의 투쟁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당한 1907년의 정미의병을 거쳐,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을 끝으로 한반도 내에서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특히, 남한대토벌작전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일본 측의 기록에 따르면 ‘의병 17,779명 전사, 일본군 136명 전사’라는 통계로 의병의 역사가 종언을 고합니다.

 

남한토벌작전.PNG

남한대토벌작전.

일본제국이 1909년 9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2달에 걸쳐서 당시 대한제국 내에서

일본에 저항하던 호남 지방 의병들을

뿌리뽑기 위해 실시한 군사 작전.

여기서 '남한'은 대한제국의 남부,

구체적으로 전라남도를 가리킨다.

 

의병들1111.PNG

1909년 겨울 광주감옥(혹은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촬영한 의병들 

출처-<국사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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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명의 의병장이 체포돼 처형됐고,

21명의 의병장이 자결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은 의병의 근거지를 없애겠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의병이 지역주민과의 연계를 통해 생존한다는 것을 알고 해당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죠. 의병은 부모님과 아내, 자녀들이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고 스스로 해산하거나 귀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의병의 역사는 막을 내립니다.

 

다 틀렸다고 생각한 순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만주와 간도 일대에서 ‘새로운 대한’, ‘새로운 의병’을 만듭니다. 그중 한 명이 안동유림의 백하 김대락(金大洛, 1845~1914)입니다. 

 

압록강 너머 간도로 넘어간 그는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쓰며 차곡차곡 자신의 일기에 그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일명 『백하일기(白下日記)』입니다. 백하일기에는 간도로 넘어간 독립군과 그 가족이 겪었던 고난, 조국을 향한 애국심, 열정과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 등 다양한 인간의 군상이 담겨있습니다. 

 

이번 시리즈에선 김대락의 일기를 통해, 고향을 떠나 간도의 불모지에 정착한 독립군들이 모든 것이 불투명했던 하루 속에서도 새로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그 험난한 나날을 돌아보려 합니다.

 

 

식민지가 된 조국을 되찾기 위해 떠날 결심하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 안동의 양반층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합니다. 그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굳어진 ‘의병’의 아이덴티티를 수백 년간 고스란히 이어온 ‘찐 양반’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결혼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지역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오피니언 리더이기도 했죠. 오래전부터 안동이나 예천 등의 지역은 중앙 관리가 좀처럼 힘쓰기 어렵다고 소문난, 낮은 수준의 ‘지방자치제’가 실현되던 공간이었습니다.

 

비슷한 문화적 맥락 위에서 성장하여 복잡한 혈연으로 얽힌 안동 사람들. 이들은 의병의 주역이었고, 훗날 독립군의 주역이 됩니다. 김구나 이동녕, 이회영 같은 유명한 독립운동가들도 안동 유림과 친족 관계, 사제 관계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의 거대한 역사적 맥락이 한국 독립에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죠.

 

김대락은 그러한 맥락을 온몸으로 받으며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의 집은 부유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이 깃발을 들었을 때 큰 군자금을 제공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승이 의병을 키워내던 사람이고, 외숙이 의병장이며, 매부가 의병장이었거든요. 그가 보고 들고 자라난 세계는 ‘의병의 세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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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임하면 천전리의 ‘내앞마을’의 독립운동가 가계도

출처-<주간조선>

 

그랬던 의병의 세계가 1909년 대토벌작전으로 완전히 무너집니다. 이어 1910년, ‘지키려 했던’ 나라 대한제국 또한 식민지로 변하죠. 안동은 그야말로 절망했습니다. 적잖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비분강개와 좌절로 가득한 분위기가 경북의 모든 마을에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그때, 희망을 잃지 않고 플랜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민회(新民會)입니다. 국권이 침탈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신민회는 간도에 집단으로 이주하여 독립군 기지를 만들 계획을 착착 진행해 나갔습니다. 특히, 김대락과 가까웠던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은 간도 예비답사를 다녀온 신민회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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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주요 인사들.

신민회는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이며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해산되었다.

내로라하는 한국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참여했던 단체라 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원으로 있었다.

대체로 평안도(서북 지방)의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출처-<EBS>

 

이 밖에도 여러 조직이 신의주와 간도 일대에 기초 조직을 만들어 놓습니다. 김대략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이주를 결심합니다. 그의 결정에 함께한 가족 50여 명 중에는 만삭의 임산부가 둘이나 있었습니다만, 김대락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며 이런 글을 남깁니다.

 

8대 선조들의 무덤과 사당은 동생과 조카에게 부탁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집은 헌신처럼 버렸으며,

동네의 온갖 논밭과 선대로부터 받은 유산은 급하게 팔아,

90이 넘으신 숙부님과 하나 남은 동생과 살아서 사별(死別)하게 되었으니…….

 

『분통가(憤痛歌)』

 

 

식민지 조국을 뒤로하며 압록강을 건넌 독립군의 각오

 

서울역에서 열차를 타고 신의주까지 도착한 김대락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시죠.

 

1911년 1월 8일 - 『백하일기(白下日記)』

 

신의주의 숙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다른 식구들은 조금 떨어진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조금 뒤 아들의 소식이 들어왔는데, 아들 일행은 어제 압록강을 건넜으며, 압록강에는 검문이 없어 안전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모든 식구를 불러 모아, 점심을 먹고 압록강으로 향했다. 먼저 손자사위 등을 보낸 후, 우리 식솔들을 차례대로 줄 세워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걸음걸음마다 만감이 교차했다. 강을 조심스레 반쯤 건너니, 건너편에서 얼음 수레를 타고 아들이 마중 나왔다. 마치 10년 만에 보는 듯 반가웠다.

 

이때 김대락의 나이는 66세, 예전에는 노인으로 인정받았던 나이죠. 그래서 그가 범인(凡人)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죠. 

 

그는 8대를 대대로 이어오며 학문과 재산을 쌓아온 가문의 장손입니다. 그가 살던 집의 사랑채에서 무수히 많은 역사가 쌓였으며, 안채에서는 무수히 많은 생명이 탄생했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은 신분도, 권력도, 사상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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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 김대락 생가 

출처-블로그<쉽게 말하기>

 

실제로 신민회는 청나라 정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조선인의 집단 이주 조건으로 ‘청나라 국적’으로의 전환과 ‘변발’을 내걸었습니다. 단발령 때문에 을미의병이 일어났었는데, 하물며 변발이라뇨.

 

얼어붙은 압록강을 한 걸음 한 걸음 건너는 노구의 머릿속에는 그 모든 것들이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돌아가신 선조들이 나의 결정을 어떻게 여기실까, 훗날 나의 후손들은 나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미답의 영역 안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압록강을 넘어, 1차 집결지인 회인현 항도촌으로 향합니다. 울퉁불퉁한 겨울 얼음길을 달리는 마차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마차 안에선 머리와 머리가 계속해서 부딪칩니다. 만삭의 임산부인 김대락의 손녀와 손녀 며느리는 걷기도 하고, 힘들면 다시 마차를 타면서 고통을 인내했죠. 그렇게 일주일간을 달려 간신히 도착한 항도촌의 모습은, 예(禮)가 사라진 광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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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을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검문하고 있다.

출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1911년 1월 16일 - 『백하일기(白下日記)』

 

항도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매우 추웠다. 다른 가문의 사람들은 방 하나에 모든 식구가 모여서 함께 밤을 지내니, 너무 비좁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조선 사람이라면 모두 함께 힘을 합치는 것이다. 성씨가 다르다면, 남녀의 구별 없이 한방에서 지내며, 위급할 때엔 서로 도와주는 정의가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평생 유학자로 살아온 이는 조선 땅을 떠나자마자 ‘컬쳐 쇼크’를 겪습니다. 그는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된 수백 년 된 집에서 자라나,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조선 땅을 떠나자마자, 성씨만 같지 않다면 모두가 한방에서 자고, 또는 성씨가 같더라도 사정이 안 좋다면 모두 한방에서 자는 ‘대충격’을 겪죠.

 

이미 각오한 일이었을까요? 그는 그 광경을 ‘위급할 때 서로 도와주는 아름다운 풍경’이라며 호평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청나라 사람들이 ‘패관소설’만 읽는 모습을 보며, ‘예(禮)가 사라졌다’며 통탄하고, 새로운 대한에서 예의 복원을 갈망하기도 하죠. 즉, 그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 갈 수밖에 없음을 인지했으나, 여전히 그의 내면에는 기존의 세계가 굳건히 자리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용기가 새삼 대단하죠.

 

(현재의 통념과는 다르게, 성씨가 같은 남녀가 한방에서 지내는 걸 가장 마지막 순위로 두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이유는, 조선 시대엔 가정 내에의 위계가 무너지는 걸 최악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건 공동체 단위로 넘어가니까 괜찮지만, 가족 내에서 위계 없이 사는 건 야만적인 거라고 생각했죠. 이러한 시대적 절대 가치를 포기하면서까지 조국을 되찾기 위한 용기와 각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쉽지 않은 여정

 

용기도 대단했지만, 그가 조선 땅을 떠날 수 있었던 것에는 ‘운’도 작용했습니다. 신민회의 집단 이주 계획과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을 알게 된 총독부는 이른바 ‘105인 사건’ 등으로 한반도 내의 신민회를 와해시킵니다. 그가 신의주를 향하는 열차에 올라탈 때도 이미 검문이 진행되고 있었죠. 105인 사건으로 구속된 이들만 해도 600여 명이며, 이중 구속이 풀려난 사람들도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김대락 가족의 이주는 그 자체로 천운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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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인 사건.

1911년 1월 1일부터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가

서북 지방의 신민회, 기독교, 부호, 지식층 등의

항일세력에게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 모의 누명을 씌우고

대거 체포하여 한국의 민족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이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보(三源堡)’로의 이주는 좀처럼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신민회의 이주 계획은 모두 삼원보를 향해 있었는데, 이곳을 제일 처음 답사한 인물은 1895년 백범 김구였습니다. 

 

삼원보는 현청 소재지가 아니라 청나라의 행정력이 닿지 않고, 현지의 인구도 적으며, 몇십 리 이어진 광활한 평야가 있어 농사짓기 적합한 데다가,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와 은신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었죠. 

 

김구의 이러한 식견은 그의 스승 고능선에게 보고되었고, 고능선은 의병을 이끌고 요동으로 넘어간 유인석에게 이를 전달합니다. 유인석은 청나라의 강요로 의병을 해산했지만, 삼원보 인근에서 의병 부활 계획을 꿈꿨죠. (관련 기사 ‘일기로 보는 의병 전쟁사 3(完): 의병을 폭도로 본 엘리트 조선인의 시선’ 링크)

 

유인석은 실패했지만, 그 계획은 신민회에 의해 실행됐습니다. 신민회의 계획에 따라 김대락 가문을 비롯한 여러 가문도 각기 삼원보를 향하죠. 이윽고 적잖은 조선인들이 항도촌에 모여들자, 최종 정착지의 땅과 집을 사기 위한 선발대가 추위에 떠는 조선인들의 희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삼원보로 떠납니다.

 

1911년 2월 22일 - 『백하일기(白下日記)』

 

삼원보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돌아와,

 

“삼원보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삼원보에서 40리쯤 떨어진 곳에 도착했는데, 청나라 군인들이 ‘그곳의 우물에 누군가 독을 타서 오염됐다’라며 진입을 금지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더 들어보니, 그곳에는 예전에 ‘일본인들이 몇몇 조선인들을 꼬드겨 우물에 독을 탔다’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은 우물을 잠그고 아예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이다. 눈 내린 진창길을 8일 동안이나 다녀온 자들의 노고가 모두 허사가 되어버렸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삼원보.jpg

삼원보(三源浦)는 일제 강점기에

서간도에 세워진 독립운동 기지다.

현재의 중국 퉁화 시 류화 현에 있는

삼원포 조선족 진(三源浦朝鲜族镇)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와 같은 도시 전설은 동경 대지진 때 처음 유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간도 또는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과 중국 사람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자주 써먹던 마타도어였죠.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원보 현지의 사람들도 외부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했고, 조선인들이 집과 땅을 사는 건 불가능했죠. 이주 계획은 그렇게 넉 달이나 지체됐고, 그동안 조선인 일행은 중국인 집주인의 눈칫밥과 독촉을 받으며 지내야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갖은 고생을 견딘 김대락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새로운 임시 정착지를 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숨 좀 돌리겠다고 생각하며, 기다리던 새집으로 향한 그는, 새집 앞에 어두커니 선 채로 멘탈이 탈탈 탈곡됩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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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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