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아베 사망 전, 무색무취였던 참의원 선거

 

사진1.jpg

출처-<연합뉴스>

 

지난 6월 22일, 제26회 참의원 선거 시작을 알리는 공시가 이루어지고 본격적인 참의원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전에 없는 이상기온으로 일본 열도는 후끈 달아올랐지만, 정작 뜨겁게 달구어져야 할 선거는 바람도 열기도 없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뜨거운 뙤약볕에 서서 무심하게 지나치는 행인들에게 읍소하 듯 비지땀을 흘리며 선거 운동을 하는 후보자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선거 분위기는 냉랭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일본 정치에는 이렇다 할 정쟁거리가 없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할만한 정쟁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기시다 총리(이하 호칭 생략)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한 측면이 있다. 취임 일 년이 아직 안 된 기시다는 특별히 눈에 띄게 잘하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잘못하고 있는 것도 없는 것 같은, 말하자면 특징도 없고 문제도 없어 보이는 무색무취한 형태로 정국을 운영했다. 

 

그런 가운데 기시다는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스페인에서 개최되는 G7 정상회담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국내를 떠났다. 국내에서 선거 기간 중 수상이 장기간 외유를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아베 정권기 장기간 외무대신을 역임(2012년 12월-2017년 8월)한 기시다로서는 ‘외교의 기시다’라는 가시적 성과를 선거와 본인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기시다 쥐세븐.PNG

G7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암튼 집권 여당 자민당의 총재이면서 내각총리대신인 기시다가 선거 기간 중 외유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번 참의원 선거는 무쟁점과 무관심 속에 치러질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자민당의 승리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무풍 선거의 전형적인 분위기였다. 

 

 

이번 참의원 선거의 의미

 

일본의 국회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원에 해당하는 중의원과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으로 이뤄진다.  

 

중의원(衆議院)은 대중(大衆)의 의견을 논의(論議)하는 의미이며, 참의원(参議院)은 국가의 정치적 사안에 참가하여 다시 한번 검토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참의원 설치 당시의 취지로는 그렇다. 

 

참의원은 전(쟁)전의 귀족원이 전후 점령기의 개혁을 통하여 거듭난 기관이다. 원래 전전의 귀족원을 폐지하여 일원제로 하는 것이 점령군의 계획이었는데, 양원제로 가고자 하는 당시 일본 정부가 하원인 중의원에서 통과된 사안에 대해 참의원에서 다시 한번 검토・숙의하여 정권을 견제하겠다며 점령군을 설득하여, 귀족원을 참의원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중의원의 피선거권이 만 25세 이상인 것에 비해, 참의원은 사회 경험이 있는 대표가 바람직하다는 취지로 피선거권이 만 30세 이상으로 규정되었다. 

 

전전 일본 귀족원 회의 모습을 그린 그림.jpg

전전 귀족원의 회의 모습을 그린 그림

 

참의원 본회의.jpg

참의원 본회의 모습

 

또한 중의원이 수상에 의한 국회해산권의 적용을 받는 반면, 참의원은 해산이 없다. 이는 중의원의 해산 총선거로 인한 국회 공백 상태를 예방하기 위한 조처로 마련된 제도이다. 

 

참의원 : 6년 임기, 3년마다 정원의 절반 선출.

중의원 : 4년 임기, 수상의 국회해산권으로 인해 임기를 다 채운 적 거의 없음. 

 

(참고로 참의원 선거는 일반적으로 중의원 선거보다 투표율이나 선거 열기가 낮다. 복잡한 선거제도도 한몫하지만, 참의원의 대표성이 중의원에 비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참의원 선거는 정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124석과 결원으로 생긴 1석을 더한 125석을 새로 선출하는 선거였으며, 작년 중의원 선거에서 의석수는 줄었지만 절대 안정다수를 확보하여 실질적인 승리를 이끈 기시다의 ‘중간평가’ 성격을 띠는 선거였다. 또한 기시다의 장기집권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선거였다. 이번 참의원 선거만 잘 치르게 되면, 기시다로서는 향후 3년간 선거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장기집권 기틀을 다지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만큼 기시다에겐 중요한 선거였다.

 

물론 2024년 9월의 자민당 총재 선거가 있으며, 중의원이 언제 어느 때 해산총선거를 실시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현직 수상의 절대 권한 행사의 하나이므로 기시다의 의지와 관계없이 선거가 치러질 수는 없다.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승리가 점쳐진 이유 

 

선거 전, 자민당 승리가 조용히 점쳐지고 있었다. 전술한 대로 이번 참의원 선거에 특별하게 여야가 대립할 수 있는 정쟁거리가 없었고, 기시다 정권의 지지율이 예상보다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매달 실시되는 NHK의 여론조사를 보면 기시다의 총리 취임 당시 49%의 지지율로 시작하였고, 그 후 50%대에서 소폭 변동은 있으나 꾸준히 50%대 지지율을 확보해왔다. 또한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도 20%대에서 소폭 변동이 있을 뿐이었다. 

 

만족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정권 발족 후 아직 일 년이 되지 않은 기시다 정권으로서는 결코 나쁜 성적표가 아니다. 향후 정국 운영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5~60%대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다면 무난한 정국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당 지지율도 자민당이 압도적으로 30% 후반대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나머지 정당은 모조리 한 자릿수 지지율에 허덕이고 있었다. 평소 정권과 집권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안정적인데다 특별한 정쟁거리가 없어 관심도 희박해진 상태에서의 선거인만큼 기시다의 자민당 승리가 무난하게 점쳐지고 있었다. 

 

111.jpg

 

 

아베 사망으로 추모 선거가 되다

 

무풍 선거라고 하지만 정치가에게는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한판 승부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이런 말로 정치가와 선거의 관계가 회자된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가는 선거에서 떨어지면 그냥 인간이다.”

(전전과 전후 정치가로 활동한 오노 반보쿠 전 중의원 의장의 말)

 

평범한 ‘인간’이 뭐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불만과 반항심이 생기는 말이긴 하지만, 그만큼 정치가에게 선거는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로 통하는 말이다.

 

하지만 본선거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자민당 소속으로 출마하면 당선될 확률이 높다고는 하나, 그 높은 확률도 우선 자민당에서 공천을 받아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공천은 강한 파벌에 속해 있을수록 유리하다. 

 

정당 중엔 자민당이 제일 막강하지만, 그 안에는 여러 파벌이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와 권력 투쟁이 펼쳐진다. 그래서 자민당의 당내 실세로서 정치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물 정치가의 존재는 수상의 자리와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현재의 자민당이 과거보다는 파벌 영향력이 쇠퇴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파벌을 중심으로 하는 계파정치는 충분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자민당 내에서 최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베 신조 전 총리(이하 호칭 생략)였다. 전전・전후를 통틀어 최장수 총리라는 큰 족적을 남기고 2020년 9월 지병을 이유로 총리직을 사임하고 잠시 정치 일선에서 자취를 감추는 듯하더니, 어느새 슬금슬금 정치 전면에 나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민당 내 키맨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더욱 영향력을 넓혀갔다. 2021년 11월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의 회장으로 취임하며 실질적으로 아베파를 거느리게 된 것이다. 

 

(세이와카이(清和会)라는 아베파는 본래 1955년 자민당 합당 당시 일본민주당을 주축으로 형성된 ‘보수 방류’의 계보를 잇는다. 이는 친미를 기저로 하며 자주헌법 개정을 주장하고, 재군비 강화를 적극적으로 주창하는 매파로 분류되는 파벌이다)

 

그런 아베에게 큰 변고가 생겼다. 당시 아베는 참의원 선거를 맞이하여 연일 각 지역을 돌며 자민당 후보 지원 유세를 돌며 영향력을 더욱 높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거를 이틀 앞둔 7월 8일 오전, 나라현에서 유세 중 괴한이 아베를 향해 총을 쐈다. 아베는 쓰러졌고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으나, 결국 사망했다. 일본 열도는 충격에 빠졌다.

 

출처SBS.jpg

출처-<SBS>

 

총기 사건이 거의 없는 일본에서 전직 총리가 백주대낮에 괴한의 총탄에 맞고 죽은 것도 큰 충격이었지만, 대상이 일본 정계 최대 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베였다는 건 더 큰 충격이었다.

 

아베가 피격당한 직후부터 그의 신변에 대한 속보가 방송에 계속 나왔다. 몇 시간 뒤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아베의 정치가로서 일대기가 소개되는 등 추모 분위기 일색으로 바뀌었다. 이런 방송 보도 형태에 대해선 여러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무풍 선거는 갑자기 ‘추모 선거’ 분위기로 급변하게 된다. 

 

아베 추모.PNG

투표장.PNG

출처-<연합뉴스>

 

이틀 뒤, 예정대로 참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모두 알고 있듯이 자민당은 대승을 거두었고, 아베의 사망도 투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별다른 쟁점이 없는 심심한 선거였음에도 투표율이 3년 전 48%대에 비해 52.05%로 올랐다. 이는 아베의 피격 사건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 선거로 자민당은 의석수가 늘어났고, 연립정권인 공명당과 합치면 과반수를 거뜬히 넘는 의석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아베 신조’라는 정치가

 

1. 수줍음 타는 도련님 같던 정치가

 

일본은 명치시대 1885년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하며 시작된 의원내각제의 국가이다. 지금은 기시다 후미오가 제101대 내각총리대신이다. 보통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이 임명되고 그 내각이 총사퇴하기까지를 1대로 계산하므로, 지금이 101대 총리라고 해서 역대 101명의 총리가 존재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시다는 역대 64명째 총리대신이다. 

 

이렇게 1885년 이토 히로부미부터 시작된 일본 헌정사에서 아베 신조는 최장수 총리라는 큰 족적을 남긴 정치가다. 전전과 달리 일본이 지금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형태를 갖춘 구조 속에서 일본 헌정사에서 최장수 총리를 역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베의 정치가로서 능력이나 자질 등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실로 엄청난 족적이며 기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아마도 이 기록이 내 생전에 깨지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할 정도이다.

 

아베는 1993년 총선거에 도전하여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이때는 자민당이 총선에서 패배하여 창당 이후 38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선거이기도 하다. 즉, 아베는 정치 입문을 야당에서 시작했다. 당시는 필자도 일본 유학을 하며 정치학에 천착하고 있던 시기였다. 

 

부친인 아베 신타로가 거물 정치가였기 때문에, 일본 정치에 과문했던 필자였음에도 아베 신타로와 아들 아베 신조의 모습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베 신타로는 수상 직전까지 갔다가 병마에 쓰러진 불운의 정치가로, 당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는 풍문이 돌았다)

 

1993년 아베.jpg

아베 신타로가 사망하여 지역구를 물려받으며

1993년 첫 당선한 아베 신조. 

모친 요코(우)와 부인 아키에(좌)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고 있다.

출처-<신쵸데일리>

 

첫 당선을 한 아베는 젊은 나이(1954년생)이기도 했지만, 키가 크고 선이 가늘어 보이는 체형에 다소 수줍음을 타는 도련님 같은 인상의 젊은 정치가였다. 정치가치고는 신선하게 느껴졌고 응원해주고 싶은 인상이었던 정치가로 기억한다. 

 

정치 신인이기에 당연히 그런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원래는 그렇게 능청스럽게 야당 의원의 공세에 역으로 큰소리치며 조롱하는 듯한 어투로 반박하거나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난에 “저런 자들에게 절대 질 수 없습니다”라며 선거 유세에 모인 군중을 선동하는 대담한 이미지는 없던 정치가였다. 2006년 9월, 52세의 전후 최연소 나이로 제9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을 때도 크게 이미지가 다르진 않았다. 

 

아베가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일 년 만에 수상직에서 물러나고 2012년 자민당 총재로 다시 정치 일선에 화려하게 복귀하던 무렵부터다. 전후 최연소에 전후 출생 첫 수상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부담되었는지 제1차 아베 정권은 일 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아베가 지병 악화를 이유로 자진 사퇴한 것이다. 이때의 영광과 오욕의 경험이 그 후 아베의 정치 성향과 노선에 크게 영향을 미친 듯하다. 

 

최근 아베의 이미지만 갖고 있는 분들에게 놀라운 사실은, 2006년 아베가 총리에 처음 취임 후, 첫 외교로 중국과 한국을 차례로 방문하는 등 이웃나라와의 협력과 유대 강화를 도모하는 발걸음을 보인 정치가였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노무현 아베.jpg

 

2. 극우로 변신한 도련님

 

아베의 정치노선이나 수법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07년의 총리 사퇴 후의 오욕의 시간을 보내며 정권 재창출을 위해 와신상담, 절치부심하던 시기와 겹친다. 

 

아베 사임 2007년.PNG

2007년 총리직 사임 발표하는 아베

 

그 후 아베는 2012년 해산총선거에서 민주당에 압승하며 재차 정권을 탈환하고 총리가 되며 재기에 성공하고, 또다시 지병 악화를 이유로 수상직을 사퇴하는 2020년 9월까지 7년 8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장기집권을 한다.  

 

다시금 총리가 된 아베는 일본의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담한 금융완화와 재정출동, 그리고 민간기업의 투자 촉진으로 구성되는 소위 ‘아베노믹스’를 전면에 내세우며 정권 운영을 조타했다. 

 

아베노믹스의 성공과 실패 여부에 대해서는 논자에 의해 다양한 평가가 있기에 유보하기로 하지만, 2012년 12월 제2차 아베 정권 출범 후의 변모는 과거와 달리 과감하고 소신 있는 정치가라는 이미지를 덧씌우려 노력하는 흔적이 엿보인다. 아울러 시대 상황을 파악하며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맞추어 가는 영악하고 교활하기까지 한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아베2222.PNG

 

제2차 아베 정권의 발족과 함께, 아베는 자신이 1차 집권 때 내걸은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피’와 ‘아름다운 일본을 되찾는다’를 다시 슬로건으로 내걸며 재차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 사회의 편향된 내셔널리즘과 결탁해 더욱 국수주의적 경향을 띠게 된다. 

 

그 결과, 제2차 아베 정권에서 한국과 관계는 전후 최악이라 불릴 정도로 냉각되었으며, 과거 제1차 아베 정권 때 이웃 국가와 우호적 관계 구축을 위한 근린 외교를 실행했던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한일 관계가 최악의 사태로까지 몰리게 된 원인에 대해, 박근혜 정부 당시 졸속 위안부 합의를 한 것 등을 배제하고, 100프로 아베 정권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베가 장기집권 재료의 하나로 일본 사회에 퍼지고 있던 혐한이나 반한 감정을 이용하며 보수 우익세력의 지지를 이끌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 자세한 아베의 정치노선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다면 다음을 기약하겠다. 다만, 여기서 아베라는 정치가에 대해 다룬 이유는 이 글의 주제인 ‘아베 사후의 선거 결과와 향후 자민당 또는 일본 정치의 향방’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간단하게나마 아베가 어떤 정치가였는지를 이야기해야 하고, 아베가 사망하기 전까지 자민당 내에서 어떤 위치였으며, 현 기시다 정권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편에선 간단하게 아베가 어떤 정치가였는지를 다뤘다. 다음 편에선 이번 참의원 선거 결과를 더욱 자세히 짚어보는 것과 함께 아베가 사망하기까지 자민당 내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현 기시다 정권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향후 일본 정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짚어보겠다.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학 법학부 교수, 정치학 박사)

 

<계속>

 

 

 

 

편집부 주

 

30여 년간 도쿄에 살며 일본 정치를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헌모 교수가

재일한국인의 눈으로 본 생생한 일본정치 현장과

일본 우경화의 현주소를 진단한 책이다.

 

일본 정치가 돌아가는 원리와 어떻게 우경화가

독주할 수 있는지 궁금한 독자는 집어드시라.

 

책책책.png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