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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까’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리 김건희라지만, 설마 그러려고 그런 걸까?  

 

“정조대왕함이 대함미사일 4발을 맞고 격침 될지도 모르겠네요.”

 

지난 2022년 7월 28일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정조대왕함 진수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건희 여사는 (역대 영부인들이 그러했듯) 너무나 당연하게 진수 도끼를 들고 진수선을 잘랐다. 

 

진수식 연합뉴스.jpg

출처-<연합뉴스>

 

진수선을 자르는 건 아기의 탯줄을 자르는 것과 같이 새로운 배의 탄생을 의미한다. 

 

(왜 하필 여자냐고 말하면, 이게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군함 진수식을 주관하면서 진수식 행사는 여자가 주관하는 전통이 수립됐다. 빅토리아 여왕이 약 6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왕좌에 앉아 있었지 않나? 그 시기 전 세계 최강 해군력을 만들고, 심심하면 관함식 할 정도로 해군력을 자랑했다보니, 진수식 행사는 여자가 하는 걸로 낙찰을 봤다. 진수식 행사를 주관하는 여성은 곧 그 배의 ‘대모’가 되는 거다. 진수자는 그 함정의 ‘스폰서(Sponsor)’라 불리며, 그 함정에서는 명예 승조원 대우를 받는다. 즉, 정조대왕함의 스폰서는 ‘김건희’가 되는 거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이번 진수식에서 김건희 여사가 ‘진수선’을 한 번에 자르지 못했다는 거다. 무려 4번이나 버벅이다가 겨우 줄을 잘랐다. 

 

 

 

해군과 미신

 

미신을 가장 많이 신봉하고, 따르는 게 해군이다. 대함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대잠 헬기가 이착함 하는 시대인 지금도, 해군은 ‘샤머니즘’이 유독 강하게 남아있는 집단이다. 

 

고양이의 죽음은 불행을 알리는 징조로 해석되고, 예포는 무조건 홀수 단위로 쏴야 하고(예포란 게 원래 ‘난 네들을 쏠 의사가 없어. 봐봐 먼저 포탄 다 쐈잖아? 우리 포 비었어’란 의미였다), 배에 여자를 태우면 안 되고(과거), 한국은 함정번호에 ‘4’자가 들어가는 걸 피했다. 4자가 들어간 배가 침몰했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근데 이건 그다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한국 전쟁 당시 전투손실로 가라앉은 배가 총 6척인데, JMS-305 두만강, YMS-509 가평, YMS-516 공주, JMS-306 단양, PC-704 지리산, PF-62 압록강이다. 이 중 ‘4’가 들어간 건 지리산함 하나뿐이다. 4가 들어가지 않은 배도 5척이나 가라앉았다. 4가 들어간 배가 유독 많이 침몰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지리산.PNG

PC-704 지리산함

 

항해 중에 휘파람을 부는 것도 금지다. 바다의 신이 부르는 바람 소리와 비슷한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은 바다의 신에 대한 불경이고, 이는 곳 태풍으로 돌아온다는 미신이다. 

 

이런 수많은 미신의 최고봉은 진수식이다. 사람으로 치면 생일날이니만큼 그 배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라는 의미가 크다. 때문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미신이 다 동원됐다 할 수 있다. 

 

까놓고 말해서 진수식의 의미는, 

 

“띠바, 안전하게 바다 나가게 해주세요.”

 

란 의미가 강하다. 인간에게 바다는 미지의 공간이자, 위험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바다는 늘 외경의 대상이었고, 이 범접할 수 없는 공간에 대한 샤머니즘적 문화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다 있었다. 진수식 행사를 처음 시작한 건 북유럽의 바이킹 족이었는데, 이들도 새 배를 만들면 제물을 쌓아놓고, 

 

“좀 도와주세요. 바다신님.”

 

이라고 빌었다. 우리나라도 동, 서, 남해의 용왕들에게 제사 지내는 걸 생각해 봐라. 무당들이 넋건지기 굿부터 시작해서, 풍어제, 별신굿 등 수많은 굿을 하지 하지 않나. 세상사 다 거기서 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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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인 남해안별신굿

출처-<남해안별신굿 보존회>

 

제물 중에 술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이 술을 제단에 올렸다가, 병을 깨뜨리는 걸로 바뀌게 되면서 이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병이 깨지지 않으면, 그 배는 재수가 없다는 말이 나온 건 미신 좋아하는 해군으로서는 당연한 일일거다. 

 

(여자가 진수식 행사를 주관하는 것처럼 병 깨뜨리는 것도 영국에서 나왔다. 그냥 배 관련한 대부분의 전통은 영국에서 나왔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영국에서는 진수식에서 예배 때 쓰던 ‘성배’를 배에 던져서 깨뜨렸다. 근데 영국이 한참 해군력을 증강시키던 시절, 자기들도 성배를 막 던져서 박살내는 게 좀 그랬다. 돈도 돈이지만, 신에게 받쳐야 할 잔을 배에다가, 그것도 지들 ‘미신’ 때문에 깨뜨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와인으로 바꿨다는 설이 있다. 이 무렵 진수식 할 때 기독교 사제 불러서 와인 바치는 풍습이 대중적이었던 걸 생각하면, 와인이나 샴페인 등 술병 깨뜨리는 의식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은 갈 거다)

 

영화 <K-19>에도 잘 나오지 않았나? 샴페인이 깨지지 않아서 배가 완전 박살이 났다는 것. 타이타닉이 샴페인 터트리지 않아서 첫 항해 때 침몰했다는 등의 말이 많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 미신이다.

 

 

‘샤머니즘 vs 샤머니즘’이었던 진수식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김건희 여사도 역대 영부인들처럼 진수식 행사에 등장해서 진수선을 잘랐다. 과거 육영수 여사도 진수선을 잘랐고, 역대 영부인들은 어지간하면 한 번씩 다 진수식 행사를 다 치렀다. 박근혜 대통령도 진수식 때 줄 자르고 다 했었다. 근데 이번이 특히 논란이 된 건, 김건희 여사가 4번이나 버벅이며 진수선을 겨우 잘랐기 때문이다. 

 

사실 진수식 때 여러 미신 중 어느 하나가 걸려, 뭇사람들의 걱정을 자아내는 경우는 많다. 샴페인이나 와인이 안 깨진 사례도 꽤 있다. 

 

2015년 미국에서의 일이다. 잠수함 진수식 때 퍼스트 레이디였던 미셸 오바마가 진수식을 주관했다. 미셸 오바마를 진수식에 올린 건 나름 ‘탁월한’ 선택이었다. 당시 진수한 배가 버지니아급 원자력 잠수함의 13번 함인 '일리노이'였고, 미셸 오바마는 시카고 토박이였다(일리노이 주 최대 도시가 시카고다). 

 

그런데 이때 미셸 오바마가 샴페인을 한 번에 깨뜨리지 못했다. 3번째 시도만에 풀스윙으로 겨우 샴페인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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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반드시 깨겠다! 슈퍼 파워 풀스윙~

 

당시 이 상황을 좋게 해석하기 위해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일리노이란 함명이 쓰인 게 이번이 3번째이니까, 샴페인을 3번째에 깨뜨리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라며 쉴드 쳤던 이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여튼 해군은 뭘 갖다 붙이고 미신 찾는데는 도가 텄다.

 

아직 그 일리노이함에 큰 문제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러니 진수선을 자르는데, 4번 버벅였다는 걸 두고 도끼눈 뜨고 뭐라 욕하는 건 툭 까놓고 말해 ‘억까’이긴하다. 다만, 이번 진수식에서 다른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샤머니즘 대 샤머니즘’이 맞붙었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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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굿모닝 충청> 링크

 

<굿모닝 충청>의 기사다. 이 당시 김건희 여사가 입은 옷이 노란색. 그러니까 오방색이란 거다. <굿모닝 충청>의 기사에서 내가 눈여겨 본 대목이 있다.

 

“반드시 오방색 중 왕을 상징하는 노랑 옷을 입고 탯줄을 자르라”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정말 샤머니즘 대 샤머니즘의 대결이구나.”

 

란 말이 튀어나왔다. 진수선 컷팅에 대한 미신 외에도,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여러 미신들이 각축전을 벌였던 현장이었던 거다.

 

그러나 이번 해프닝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따로 있다고 본다. (정조대왕함 진수식에 유달리 해프닝이 많긴 했지만) 세세한 샤머니즘적 요소를 떠나서, 어찌보면 그냥 흔한 진수식 해프닝일 뿐인데. 이 정도로 국민적 논란이 되고, 도끼눈 치켜뜨고 뭐라 하는 걸 보면, 출범 석달도 안 된 윤석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어떤지 알 수 있었던 순간이지 않았나 한다. 미신보다도, 이번 해프닝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민심이었다. 

 

 

덧 

 

행사 기획자가 누군진 모르지만, 정말 좀 그랬다. 오히려 전 정권의 탁현민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였는지를 알게 해준 행사였다. 동네 유치원 학예회도 아니고... 행사에 어떤 의미를 담고, 새로운 볼거리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행사진행이라도 제대로 해달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랐다. 관심 있는 분은 영상 한 번 보시라.

 

정조대왕함 진수식 풀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