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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일본에 저항하며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전부 진압되었고, 조선은 1910년 일본에 병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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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틀렸다고 생각한 순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만주와 간도 일대에서 ‘새로운 대한’, ‘새로운 의병’을 만듭니다. 그중 한 명이 안동유림의 백하 김대락(金大洛, 1845~1914)입니다. 

 

압록강 너머 간도로 넘어간 그는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쓰며 차곡차곡 자신의 일기에 그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일명 『백하일기(白下日記)』입니다. 백하일기에는 간도로 넘어간 독립군과 그 가족이 겪었던 고난, 조국을 향한 애국심, 열정과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 등 다양한 인간의 군상이 담겨있습니다. 

 

이번 시리즈에선 김대락의 일기를 통해, 고향을 떠나 간도의 불모지에 정착한 독립군들이 모든 것이 불투명했던 하루 속에서도 새로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그 험난한 나날을 돌아보려 합니다.

 

1편에선 66세 김대락은 식민지가 된 조국을 뒤로 하고 (임산부도 둘이나 포함된) 50여 명의 가족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간도로 향합니다. 그 과정은 갖은 고난길이었죠. 그동안의 성리학적 가치관을 버려야 했고, 일본의 이간질과 중국인들의 눈칫밥을 견뎌야 했습니다.    

 

2편에선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을 세우고,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는 내용을 다뤘습니다. 성리학을 절대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유림 김대락은 학교에서 논어, 맹자를 전혀 가르치지 않고, 외국어나 수학·물리학 등만을 가르친다는 현실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흐름이 ‘신학문’에 있음을 인정하고, 뒤로 물러나 새로운 세대의 선택을 묵묵히 지원해주죠.  

 

 

 

 

이번 3편은 독립군으로 변신한 66세의 안동유림 김대락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만주(간도)의 추위와 각종 풍토병 

 

19세기부터 조선인들의 만주·간도 이주가 시작됐지만, 김대락이 이주하던 1910년대에도 여전히 불모의 땅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조선인들은 일부러 가장 터치가 적을 것 같은 시골을 선택했죠. 집단 이주 계획을 논의하던 때부터 만주의 엄혹한 환경에 대한 우려와 경고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 김대락 가족을 덮친 만주의 추위는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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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월 30일~2월 2일 - 『백하일기(白下日記)』

 

1월 30일. 어제부터 손자며느리의 산통이 심해지더니, 오늘은 갑자기 몸이 퉁퉁 부었다. 특히, 아랫배와 다리가 퉁퉁 부어 다리를 들 수 없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소리가 창밖까지 흘러나오니,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걱정되고 안타까웠다. 백방으로 약을 다 써 봤으나 효과는 없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그 시어미가 머리를 감고 삼신할미에게 비는데, 시어미의 손발이 얼어 터졌다. 고향을 떠나온 것이 후회되었다.

 

2월 2일. 손자며느리의 산통이 그칠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먹일 것이 없으니, 염치 불고하고 남의 집의 닭 한 마리를 훔쳐다가 먹였다. 이어 조금의 술과 음식을 만들어 서낭당에 가서 손자며느리가 무사히 출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백번 절하고 하직을 고하니, 나의 기운도 다 떨어져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니 아이가 태어나 아이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기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 그의 가족 중에는 만삭의 임산부가 둘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국의 땅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자며느리의 산통이 심해지는데, 그 증세가 일반적인 산통과는 달라 온 가족이 당황합니다. 그 시어미는 청정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다가 손발이 다 얼어 터지죠. 심지어 유학자인 김대락조차도 서낭당으로 달려가, 노구의 몸으로 지칠 때까지 절하며 기도합니다. 이때 김대락은 문전옥답 다 버리고 고향을 떠난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죠. 그 굳었던 신념도 가족의 고통 앞에서는 무력해지기 마련입니다.

 

사실, 손자며느리의 증세는 단순히 산통이 아니라 풍토병이었습니다. 그들은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만주의 엄혹한 추위에 시달리면서 깨끗하지 않은 물을 마셔야만 했죠. 김대락의 가족들은 자주 설사나 복통 등 감염성 질병 증세에 시달립니다. 한 번은 온 가족이 모두 풍토병에 걸리는 일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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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1월 14일 - 『백하일기(白下日記)』

 

집안에 병이 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사촌 제수씨는 전부터 앓던 병이 악화되어 고생하고 있고, 며느리는 며칠째 감기로 힘들어한다. 아들은 잠잘 때 식은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고, 손자는 음식을 거부하여 몸이 바짝 야위었다.

 

이런데도 집구석에는 이렇다 할 음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기르던 개를 잡았다. 오랜 기간 같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살아온 미물의 목숨을 잡아먹으니, 이것이 어찌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주한 지 한 해가 거의 흘렀건만 풍토병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고생하는 모습은 그의 자존심에 크나큰 스크래치였을 겁니다. 고향에서는 무수히 많은 땅을 갖고 있던 ‘삼천석꾼’이었으나, 지금은 고기를 구하지 못해 남의 닭을 훔치고 기르던 개를 잡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온 가족이 고통받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에서 가장의 의무를 저버린 크나큰 오점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이었다면 ‘염치 불고하고 차마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며 가족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자 했습니다. 그의 그 복잡한 마음이 담긴 시가 있습니다.

 

風檐烟屋病仍纏  엉망진창인 집에서 살아 병이 끊이지 않고

練穀鹽蔬摠苟愆  시원치 않은 것들을 먹으니 구차하고 괴롭다.

只恨當初輕擧足  이주를 가볍게 결정한 것이 다만 후회스러울 따름이니,

由吾無狀使渠然  꼬락서니 없는 나 때문에 너희들이 고생이구나.

 

그들을 괴롭게 한 건 추위와 병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인들이 만주와 간도 일대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의 법도, 러시아의 법도, 일본의 법도 잘 닿지 않았기 때문이죠. 뒤집으면 곧 만주는 자유의 땅이 아니라, 섬뜩한 사건이 끊이질 않는 ‘범죄도시’로 돌변함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무법지대의 만주

 

1912년 9월 11일, 10월 23일 - 『백하일기(白下日記)』

 

9월 11일. 듣자 하니 굴라령에서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사건이 있었는데, 죽은 사람은 청나라 사람이고, 도적은 붙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가슴이 떨리고 두렵다.

 

10월 23일. 가까운 곳에 수백 명의 도적 떼가 주둔하고 있다고 하여 불안하다. 그들은 일전에 감옥에서 단체로 탈옥한 자들이니, 분명 부패한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풀어준 것이리라. 나중에 들으니 다행히 이미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

 

오래도록 공동체적 윤리 강령을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조선인들에게 ‘백주대낮의 살인사건’의 파급효과는 더욱 컸습니다. 조선에서도 이따금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또 때론 부패범죄도 종종 일어났었지만, 조선 사회는 그 처리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사회였죠. 때문에 이토록 거리낌 없이 행하는 무법과 탈법은 그들(조선인)에게 큰 원초적 공포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심지어 집단 탈옥 사건이 일어났을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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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원보(三源浦)는 일제 강점기에

서간도에 세워진 독립운동 기지다.

신흥강습소를 이 삼원보에 세웠다.

당시 어느 나라의 법도 미치지 못할 만큼

행정 권력의 손이 닿지 않던 곳이었다.

 

1911년 11월 1일 - 『백하일기(白下日記)』

 

탈옥한 죄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 통화현의 감옥에는 8~90여 명의 죄수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 힘이 센 죄수가 자물쇠를 부숴버린 후, 동료들과 함께 웅크리고 동태를 살폈다. 마침 공무원이 심문을 위해 죄수를 데리러 갔는데, 이때 약 7~80여 명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감옥 안에 비치된 총기를 탈취한 후 옥졸 네다섯 명을 살해했다. 총성이 나자 감옥의 장이 놀라면서 모두 체포하라는 명을 내리려던 그때, 그 역시 살해당했다. 교도소에서의 소란을 들은 시장과 민가는 모두 가게 문을 굳게 닫았다.

 

탈옥범들은 시내로 나와, 체포하려는 군경과 시가전을 벌였다. 한편에서는 나팔을 불고, 한편에서는 체포를 하는데, 이런 난동 속에서 죽은 자가 20여 명이었으며, 민간인 몇 명도 부상을 당했다. 탈옥범 중 일부는 다시 자수하고, 체포된 자는 총살당했다. 하지만 일부는 숲속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서부 영화의 클리셰 같은 기록입니다. 마동석이 자물쇠를 때려 부수고, 황정민이 교도소장에게 돌진하며, 이정재가 추격대를 따돌리며 도망치는 것 같네요. 탈주에 성공한 자들은 아마도 마적(馬賊)이나 비적(匪賊)이 되었겠죠. 무법자들이 갑툭튀하여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는데, 이를 단속해야 할 중국 당국은 방관하거나 힘을 못 쓰는 곳. 그곳이 만주였습니다. ‘풍속이 아름다운 나라’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이야기죠.

 

이렇게 험난한 생활에서도 빠지지 않는 ‘조선인 종특’이 있습니다. 스웨덴 게이트와는 정반대의 풍습이죠. 

 

 

조선인에겐 굶어 죽어도 ‘스웨덴 게이트’란 없다

 

1912년 1월 3일, 4일 - 『백하일기(白下日記)』

 

3일. 한 손님이 조카가 나에게 쌀을 구하는 편지를 들고 왔다. 조카의 며느리와 안식구가 식량이 없어 힘들어한다는 소식이었다. 쌀이 옥보다 귀하다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어, 쌀독을 탕탕 털어 쌀 닷 되와 벼 한 말을 보냈다.

 

4일. 이병삼, 이동녕, 주병웅, 전병익, 전오규, 임석호, 이언종, 김광현, 전강, 정준환, 오희승이 와서 새해 인사를 하였다. 자하배(紫霞盃)와 백설탕(白屑湯)으로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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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앞줄 가운데)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

이동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 주석 등을

지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도 역임했다.

 

조선 사람들의 생활고 해결 능력은 다소 기이합니다. 때론 땅이 많은 양반도 식량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도 있습니다. 생존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들은 복잡하게 얽힌 혈연·지연·학연 등 온갖 인연의 끈을 다 뒤져서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고, 반대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온갖 형태의 요청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죠. 가끔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채무 관계’로 얽힌 것이 조선 사람들의 경제 구조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도 조금이라도 잉여생산물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거겠죠. 김대락을 비롯한 이주민들은 고향 땅을 모두 팔아 현금화했습니다. 즉, 그들의 주요 생산 수단인 농토를 모두 처분한 거죠. 이들이 추운 겨울에 움직인 것도 농한기에 이주하여 땅을 산 후, 농사를 통해 빠르고 안정적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땅값 급등과 비협조적인 (중국의) 행정으로 원활한 파종 시기를 놓쳤고, 만주의 이질적인 기후 탓에 ‘농사 스페셜리스트’인 조선 사람들도 애를 먹습니다. 농사가 자리 잡는 몇 년 동안 계속 저축을 까먹으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죠.

 

김대락에게도 구원 요청은 끊이지 않았습니다만, 그의 능력은 수백 냥을 의병 군자금으로 기부하던 옛날과는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급한 대로 땅을 팔아 모은 목돈은 독립기지건설 자금으로 들어갔고, 아직 농사는 변변치 않아 제대로 된 수입은 없으니, 사실상 ‘갓수’가 되어버린 셈이죠. 그런 와중에도 ‘쌀독을 탈탈 털어’ 식량을 보냅니다. 시아버지의 지시를 받은 며느리의 복장이 뒤집혔겠죠.

 

그런데 다음 날, 많은 독립운동가가 김대락에게 새해 인사를 옵니다. 김대락은 이들에게 ‘자하배’와 ‘백설탕’을 대접했다고 담담히 썼는데요. 사실 자하배는 ‘안개를 담은 술잔’이란 뜻이고, 백설탕은 ‘맹물로 끓인 국’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줄 게 없어서 아무것도 못 줬는데, 손님에게 음식 대접을 못 했다는 건 조선인 유학자 종특을 저버리는 일이라, 기록에는 ‘고급진 걸 줬다’라고 기록한 겁니다. 한때는 새해 인사를 오는 사람마다 넉넉히 거마비를 줬었는데, 이젠 선물은커녕 밥도 못 먹이는 신세가 되었으니, 고고한 그의 자존심에 다시금 스크래치가 난 겁니다.

 

 

범인이지만 범인이 아니었던, 수많은 ‘김대락’들

 

하루하루 쉽지 않은 나날을 보내면서 어떻게든 적응해 나가던 김대락 가족은 어느새 이주 3년 차에 접어듭니다. 이는 나라를 빼앗긴 것도 3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했죠. 신흥강습소를 세웠던 이들은 1913년에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국치기념일’ 행사를 엽니다. 김대락은 국치기념일 행사에서 벌어졌던 일을 전해 듣고 일기에 남겼죠.

 

1913년 7월 28일 - 『백하일기(白下日記)』

 

아들과 손자들이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국치기념일 행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김준식이라는 사람의 부인 박 씨가 연단에 올랐습니다. 부인은 세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설 도중,

 

‘비분하고 통한한 뜻은 모두 말씀하셨으니, 안방에 있는 무식한 제가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모이신 여러 선생님이 힘을 합쳐서, 먼 미래에는 다시는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질없는 말만 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더니, 가슴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자신의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끊는데, 무려 네 번을 찍고 나서야 비로소 뼈마디가 끊어졌습니다. 두 조각의 손가락이 연단 아래서 뛰고, 선혈이 낭자하게 저고리와 치마를 다 적셨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연실색인데, 부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이것이 제 뜻이니, 모두 죽을힘을 내어 우리 4천 리 대한제국의 땅을 회복합시다!’

 

라고 외쳤습니다.”

 

이정현5.PNG

출처-영화<명량>

 

남의 나라 남의 땅. 의식주의 모든 영역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힘겹게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여성이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독립을 외치는 것이 무슨 실효적인 영향이 있을까요. 하지만 그 비분한 마음을 풀어내지 않고선, 그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지 않고선, 맨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던 땅이 혹독한 만주와 간도였습니다.

 

김대락은 온몸을 바쳐 의병의 깃발을 들고 일선에서 신흥강습소를 지은 사람은 아닙니다. 또한, 새로운 조선을 꿈꾸며 새로운 사상을 인정하였으나, ‘유학적 이상사회의 복원’이라는 희망 또한 끝끝내 버리지는 못했죠. 이상룡, 이회영, 이동녕 같은 인물들이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김대락은 한 발짝 뒤에서 서 있었습니다. 문중의 원로로서 받는 대우도, 유림의 거두로서의 명예도 그는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혁명가나 운동가와 같은 ‘영웅적 인물’이 아닌,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범인이었습니다. 물론, 범인도 때론 크나큰 도약을 할 때가 있습니다. 유림으로 자라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66세에 모든 부귀를 버리면서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궤적입니다.

 

그러나 김대락이 삶이 제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도약’이 아니라 ‘멈춤’에 있습니다. 

 

일기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김대락은 이상룡과 이회영, 그리고 아들이 추진하는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을 묵묵히 후원하고 지지합니다. 이들은 자금이 떨어질 때마다 김대락을 찾았으며, 김대락은 생활고를 견디면서도 모아뒀던 돈을 내주었습니다. 그 계획이 옳다, 그르다, 그런 말 없이요. 학교가 공자를 버리고 성경을 배포해도,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조선옷을 버리고 다른 옷을 입어도 그는 노여워하거나 훈수 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옳지 않다 여겼으나, 내일을 일구어나가는 것은 바로 미래 세대이므로,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죠.

 

그처럼 도약을 멈추고 굳게 선 채 묵묵히 그들의 말을 귀담고 지지하는 팔로우쉽. 그것이 범인이었던 김대락이 빛나는 이유입니다. 신민회의 계획만을 믿고 따랐던 수많은 ‘김대락’이 있었기에 무모한 모험이었던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 재산을 털고 피땀을 흘려 학교를 짓고, 가르치며, 밭을 일구고, 만주에는 없었던 벼농사를 시도하여 정착시켰습니다. 그들은 각자만의 이상이 있었으나, 오직 독립이라는 기치 아래 담대한 팔로우쉽을 보여주었죠. 그 무수한 ‘김대락’ 덕분에 신흥무관학교가 각고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해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기에 ‘네오조선’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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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 시대를 살았던 ‘사이에 선 인간’ 김대락. 그의 일기는 광복된 이 땅에서 더없이 소중한, 희망을 머금으며 지옥을 살았던 이의 기록입니다. 묵묵하면서도 빛나는 사람의 길도 있음을 그는 글로써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1)스토리테마파크 (http://story.ugyo.net/front/index.do)

(2)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https://diary.ugyo.net/)

(3)정병석, 「일제강점기 경북 유림(儒林)의 만주 망명일기(亡命日記)에 보이는 현실 인식과 대응 」, 『민족문화논총』 0.58, 2014, 87-115.

(4)조동걸, 「백하 김대락의 망명일기(1911-1913)」. 『안동사학』 5, 2000, 143-227.

(5)한경희, 「백하 김대락의 일상기록 『백하일기』 고찰」, 『한국지역문학연구』 2.2, 2013, 163-187.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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