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홍수가 났다. 천재지변에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도, 쏟아지는 빗물과 불어나는 강물은 어찌할 수 없는 것. 정치인의 실력은, 닥친 위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관리하는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장 인력과 장비를 투입해 위기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태도다. 권한과 책임을 가진 이들이 위기 상황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며,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그 태도. 막막한 처지에 처한 이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당신의 일상이 복구될 때까지 국가가 끝까지 함께할 거라는 안도감을 주는, 그 태도 말이다.
그래서 재난 위기관리능력은 정부의 그 어떤 기능과 역할보다 중요하다. 권력이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그것을 모아 누군가에게 권한을 일임하는 이유는 이럴 때 쓰기 위해서다.
그들의 뇌구조
이번 수해 피해 현장에 봉사활동을 나간 한 정치인이 카메라 앞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나오게. -김성원 국민의힘 국회의원
봉사활동을 나간 또 다른 정치인은 수해지역에서 뒤풀이를 하다가 상인, 주민들과 마찰이 생겨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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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큰 주목을 받는다. 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느냐, 어느 타이밍에 어떤 워딩을 하느냐는 그들의 정치행위에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 말은, 그들이 말과 행동을 결정할 때,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신중하고 기민한 판단을 내린다는 뜻도 된다. 이런 망언들이 참담한 것은, 그 와중에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태도가 그렇다는 말이니까.
나경원 전 의원은 언론과의 통화(출처)에서 이 일을 이렇게 해명했다.
“제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다고 설명했고, 그 얘기를 듣고 일행들이 박수를 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같이 밥을 먹고 있는데, 밖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그분들이 들어왔다. 하도 시끄럽게 해서 저랑 몇 명은 빠져나왔고, 그 이후에 경찰이 온 것으로 안다. 저희가 식사한 장소는 침수 피해 지역도 아니었다”
나 전 의원이 직접 침수피해 지역에서 회식을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침수피해가 심했던 시장 중심지로부터 50m 거리, 먹자골목까지 도보 1분 거리였을 뿐. 얼마나 가까이에서 술판을 벌였나 보다 더 큰 문제는, 동네 꼬마들도 느낄 수 있는 그 숙연한 분위기를, 누구보다 예민하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그와 그의 스텝들이 사고를 치고 나서도 뭐가 문젠지 1도 모르고 있다는 거다.
어째서 일까. 대체 이들의 뇌는 어떤 구조로 굴러가는 걸까.
절대 배지
국회의 시간은 보통의 시계와 다르게 흘러간다. 지금 국회의 시계는 2024년 4월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24년 4월, 제22대 총선이다. 정치 뉴스, 특히 국회의원들이 등장하는 뉴스를 2024년 총선에 맞추어서 해석하면 수수께끼가 풀린다.
국회의원이 어떤 상임위를 선택하는지를 잘 보자. 지역구에 군사시설이 있어 주민들의 민원이 많은 곳의 의원은 ‘국방위원회’에 지원한다. 교통체증이 심각한 지역이면, ‘국토교통위원회’에 지원한다. 자신의 지역구에 도로 확장 예산을 따야 다음 선거에 들고 나올 게 있으니까.
총선이 2년 앞으로 다가온 국회의원들에게 금배지를 한 번 더 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국회의원의 임기 4년 중 후반기 2년은 특히나 그렇다. 4년 계약직인 국회의원들에게, 다음 금배지는 골룸의 절대반지와 같은 거다.
지금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자. 모든 국회의원들이 그러겠지만, 임기 1년도 안된 윤석열 정부 지지율 추락을 보는 여당 의원들의 마음은 더욱 바사삭해져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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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지지율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시청률이 골든크로스를 이루려 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여당 의원들의 발등엔 불기둥이 솟구치고 있다. 다가오는 총선은 윤석열 정부를 평가하고 심판하는 성격의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시점에서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답 없는 대통령은 이미 버리는 카드다. 일단 나 혼자만이라도 살아남을 반등 포인트를 저마다 절실한 마음으로 찾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인지도를 높이고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국회의원들은 맹렬히 달려가 카메라 앞에 선다. 까놓고 말해서, 수해 피해 현장에 정치인들이 유니폼을 입고 봉사활동을 나가는 건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서다. 그보다 큰 목적은 없다.
남는 건 사진이다. 그거 찍으러 간 거다. 나중에 홍보 포인트가 될만한, 선거 공보물에 포토샵으로 열심히 문대서 실을만한,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한 컷을 건져야 한다. 흙탕물이 잔뜩 튄 옷을 입고 쫄딱 젖은 머리를 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수해현장에서 물을 퍼내고 있는 사진이 필요해서 나왔는데, 하필 비가 멎어 머리고 옷이고 뽀송뽀송하니 미칠 노릇인 거다.
국회의원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스스로 홍보하지 않으면 다들 몰라주기 마련이다. 의원과 보좌진들이 이렇게 개고생하는데 유권자들이 아무도 모른다면 그건 좀 억울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알도록 해야 하고 하나를 하면 열을 한 것처럼 좀 더 극적으로, 좀 더 감성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담긴 한 컷을 원하게 된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로만 가득하니 점점 민심과 멀어진다. 노동 현장에서 치열하게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도 소수자와 약자의 편에서 늘 앞장 서고 싸웠던 사람도 배지 달고 국회에 들어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 많이 봤다. 정의로움으로 반짝였던 이들이 어느 순간 배지의 절대적인 욕망에 휘말려 영혼 없는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 국회에선 그게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니 스스로 뭐가 잘못되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포토제닉 정치
국회의원들이 사진에 집착하는 이유. 그것은 그만큼, 어떤 사진 한 장이 한 정치인의 이미지에 막대한 파급효과를 미쳤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국회의원들이 연출하고 싶은 사진의 성공 모델은 보통 이렇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갖는 한 컷. 원칙과 소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반대토론을 주장하던 초선 의원 노무현의 사진은, 정치인 노무현을 떠올리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장면이 되었다. 그의 정치와 철학을 전달하는 데에 다른 어떤 설명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이미지로 남은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좀 더 결연한 표정과 몸짓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물론 항상 뜻대로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1969년 6월 20일 밤 귀가 중이던 김영삼 의원의 차가 신원 미상의 청년들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한 사진도 유명하다. 당시 청와대의 3선 개헌을 반대하고 있던 김영삼 의원은 이 사진으로 박정희에 맞서는 정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았다.
이렇게 정치인이 탄압받는 사진은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역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특히 중요한 순간에 여론과 상황을 급전환 시키는 카드가 되기도 한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나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을 든 괴한에게 얼굴을 피습당하면서 지지자 중심으로 폭발한 동정론은,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유례없는 참패를 당하는 데에 일조했다.
물론 이 역시, 항상 여론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뭐니 뭐니 해도 효과가 좋은 것은 정치인들이 현장에서 발로 뛰며 고생하는 사진들이다. 정치인들이 연말에 연탄을 나른다든가 급식소에서 배식을 한다든가 하는 고전적인 사진이 지금도 계속 지면에 오르는 것을 보면, 좀 촌스러운 방식이긴 해도, 먹힌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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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행사들은 평소에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회 사각지대에서 기획된다. 그런 의미에서 진심이든 아니든 국회의원들의 이런 봉사활동들을 덮어놓고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유명하고 힘있는 사람들이 한번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것들이 재고되고 개선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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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사진을 찍는 자가 가장 중요하게 담아내야 하는 것은 진정성이다. 이럴 땐 수수하고 소박한 외모가 유리하다. 그런 면에서 박주민 의원은 딱히 연출하지 않아도 사진이 진정성 있게 담기는 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적당히가 중요하다. 극적인 사진을 얻으려는 욕심에 지나친 연출을 하거나 현장 정서를 읽지 못하면 한순간에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뭐든지 과유불급이다.
이렇게 의원이 선을 넘으려 할 땐, 스텝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목적에만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을 때, 조언을 아끼지 않는 감각이 예민한 보좌진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의원과 공동운명체인 보좌진들 역시, 국회 생활에 젖다 보면 같이 시류에 무뎌지기 마련이다.
역풍의 리스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원을 계속 카메라 앞에 세우는 이유는, 역시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코로나 방역 위기 때 안철수 대선후보가 땀에 젖은 수술복을 입은 사진은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생리학 박사 안철수가 수술복을 입고 어떤 의료봉사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의사 출신인 안철수 후보는 코로나 재난 상황을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보좌관이 본, 재난 현장
연탄도 좋고 급식소도 좋고, 다 좋다. 삽질만 하지 않는다면, 의원이 현장 나가서 욕먹을 일 별로 없다. 환영받으면 환영받았지. 그런데 성격이 완전히 다른 현장이 있다. 바로 재난 현장이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의원님과 함께 사고 수습 중인 팽목항에 갔을 때 일이다. 다시 떠올리기에도 두려운 끔찍한 현장이었다. 수백 명의 실종자 명단과 그 두 배가 넘는 자식 잃은 부모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바다에 자식을 잃은 어느 어머님은 현장에서 뭐라도 해보려는 내게 정말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그 분의 사소한 호의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현장에서 최대한 감정을 건조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유가족들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의식적으로 잘 떠올리지 않으려는 기억 중의 하나다. 할 일을 마치고 여의도로 돌아왔을 때,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재난이나 사건 현장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숨이 턱 막힌다. 재난 현장은 그런 곳이다.
정치인들은 기본적으로 현장에 가는 것이 옳다. 눈으로 직접 봐야 참혹한 실태를 알게 되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고 재난 현장은 정치인이 곧장 달려가서 할 일은 크게 없지만, 사고 현장에서 정치로 풀어야 될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부처 간 협력이라든지 관할 행정구역의 문제라든지.
정치인이 현장에 갔을 때 유념해야 할 것들이다. 당연한 것들을 굳이 적어보는 이유는, 유념하지 않는 자들이 현장에 제법 많기 때문이다.
1. 현장 복구에 방해되는 곳은 최대한 가지 않는다.
2. 무리한 의전은 최대한 받지 않는다.
3. 농담은 하지 않는다(놀랍게도 하는 자들이 있다).
4. 사고 현장에서 곧장 답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고 사고의 원인을 청취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고민한다.
5. 사고 복구에 걸리는 시간을 파악하고 복구하는데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지를 파악한다.
6. 공권력을 동원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현장에서 즉각 지시를 내려 신속히 처리한다.
7. 피해자 혹은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재난 현장은 그 양상이 매번 다르다. 방문이 빠를수록 좋은 곳이 있고 늦을수록 좋은 곳도 있다. 정치인과 보좌진의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 재난 사고 현장은 언제나 누군가의 슬픔과 분노로 가득하다. 누군가가 희생된 사고 현장이라면 그곳은 지옥과 다름없다.
정치인과 보좌진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지옥에서 울고 있는 유가족을 만나야 한다. 사고의 성격을 분명히 판단하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방문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다. 그저 사진을 찍을 배경이 필요한 정치인이 현장에 등장한다면, 그는 더한 지옥을 만들 뿐이다.
뒤늦게 현장에 나선 대통령의 판단은, 현장 기동성을 위한 '판단' 일 수 있다. 하지만, 수해로 사람들이 희생된 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정책홍보용으로 사용한 '판단'은 지금 대통령실의 모든 '판단'을 의심케 한다. 대통령은 창문 안으로 어떤 참혹함을 보았는지, 이번 재난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고 있는지.
두려운 건, 이런 대통령실이 재난 컨트롤타워로서 역할을 해야 할 시간이 아직 4년 하고도 9개월이 남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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