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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계약만 10조 원대, 총 사업 규모는 25조 8000억, 만약 후속 사업까지 포함한다면 약 40조 원짜리 방산 계약이 체결됐다. 아직은 기본 계약(Framework Agreement)이지만, 돌아가는 판을 보면 한국 방산 역사상 가장 큰 사업이 될 게 분명하다.

 

최초 인도분 계약만 봐도 한 나라의 방위 계획 틀을 바꿔버릴 수준이다. 만약 본 계약에 해당하는 이행 계약을 체결한다면 구체적인 수량과 계약 금액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지금 언론에 흘러나오는 그대로라면... 이건 폴란드의 방위산업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 방위 산업계의 방향성 자체를 완전히 틀어버리는 사건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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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이미 계약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로템(K-2 탱크를 만든다)은 조직을 국내 판매에서 해외 수출을 위한 형태로 개편에 들어갔고, 한화는 일찌감치 방산 계열사 3개를 하나로 묶어서(한화 에어로스페이스로 묶었다) 방위산업에 힘을 싣는 분위기다. 그전까지 해외 수출을 한다고 하면,

 

“그래. 그래. 싸고 튼튼한 거 동남아 애들한테 팔아보자!”

 

이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유럽에다 무기를 파는 거다.

 

(20세기 시절부터 우리나라는 해외에 무기를 팔았다. 동남아와 중남미에 소화기나, 군용차량, 피복류 등등을 팔았다. 민주화 운동의 여파로 최루탄 수출로도 제법 외화 획득을 한 나라가 우리나라였다. 그러나 이 시절의 방산수출이란 게 초창기 우리나라가 가발 팔고, 와이셔츠 팔던 느낌의 수출이었다. 싸고, 대충 쓸만하고... 만약 탈이 나더라도 크게 문제가 없는 수준의 무기체계들을 팔았던 거다)

 

지금까지 유럽의 무기를 수입해 오던 게 우리나라인데, 우리가 유럽에 무기를 수출한다? 개인적인 감회가 정말 남다르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론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세계 국제정세의 반사이익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이 모든 게 대한민국이 처해있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란 생각에 웃픈 상황이기도 하다.

 

우리가 몰랐던 폴란드

 

『미엥지모제(Miedzymorze)』

 

이 한마디로 폴란드를 설명할 수 있을 거 같다. 해석하자면, 바다와 바다 사이란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란 각각 발트해와 흑해를 뜻한다. 즉, 발트해와 흑해를 연한 대제국을 건설하자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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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스페어히스토리

 

 

역사상 최강 기병들 중 하나로 불리는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가 바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내놓은 것이다(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루블린 합병 의정서를 쓴 직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됐다. 200년 이상 존재했고, 이들 민족의 최대 전성기였다).

 

히틀러도 실패한 모스크바 점령을 성공했던 게 이 시절일 정도로 이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전성기가 있으면 쇠퇴기도 있는 법. 러시아를 두들겨 패던 이들이 어느 날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 제국에 분할돼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미엥지모제(Miedzymorze)란 말은 폴란드가 1차 대전이 끝나고 123년 만에 부활한 직후 나온 말이다. 당시 폴란드는 이대로 멈춰 있다면, 언젠가 강대국의 침략에 다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자존심 하나만은 동유럽 최강이었던 폴란드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겠다는 생각을 가진다. 이 당시 러시아는 적백 내전으로 혼란한 상황이었고, 독일은 1차 대전의 패전으로 무너진 직후였다.

 

이때 폴란드는 자기 주변의 국가들을 모두 공격해서 영토를 넓혀가며, 미엥지모제를 외쳤다. 예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위상을 되찾으려 했다(이 때문에 폴란드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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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더위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하는 게 ‘폴란드의 지정학적 위치’다. 폴란드 주변에는 강국이 넘쳐 난다. 그 사실은 지금도 똑같다. 동쪽엔 러시아가, 서쪽엔 독일이 있다.

 

자. 그렇다면, 지형이라도 좀 좋아야 하는데(전쟁이 아니라 그냥 살기에 폴란드 땅은 좋다) 폴란드는 중부 유럽의 대평원에 위치한 국가다. 국토의 90% 정도가 해발 300미터 이하의 평탄하고 완만한 지형에다 국토 중앙을 가로지르는 비스와 강 덕분에 광대한 유역 평야를 가지게 됐다. 한마디로 농사짓기에는 딱 좋은 지형이란 소리다(지금도 폴란드는 농업 강국이며, 농산품 수출로 유명하다).

 

그런데, 농사짓기 좋은 땅이란 소리는 침공하기도 좋은 땅이란 소리이기도 하다. 방어선이 될 만한 지형지물이 드물기에 기갑부대에게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하는 것과 더불어 기동할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거다. 즉, 전쟁 나면 방어하기 힘들어진다는 거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공 전의 돈바스 전쟁 때부터 근 8년간 동부지역을 제1차 세계대전 때 참호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참호 파고 벙커 짓고 한 이유가 그거다. 탁 트인 평야에서 싸우다 보면 한 번 결정적 패배를 당하면 그대로 수십, 수 백 킬로를 밀리는 게 예사다.

 

아무튼,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폴란드는 주변에 강국들에 둘러싸여 있다.

 

둘째, 폴란드는 군사강국이었던 적이 있었고, 지정학적으로 군사강국이 될 것을 강요받았다.

 

셋째, 만약 군사력을 준비하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 나라가 송두리째 박살 난다.

 

한때 중부 유럽을 뒤흔들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의 영광도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가 손잡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123년 만에 부활해 과거의 영광을 찾겠다고 이리저리 찔러보다가 2차 세계대전에 휩쓸려 또다시 독일과 소련에 의해 나라가 찢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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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폴란드 주변 지도 

출처 - 구글

 

재미난 건 폴란드군의 활약이다. ‘졌잘싸’라고 해야 할까? 나라는 망하고, 전쟁에선 패하지만 전투 하나만은 귀신처럼 한다는 거였다. 2차 대전 당시 폴란드군의 활약(나라가 점령당하고 나서도 폴란드군은 연합국 측에 가담해서 정말 귀신처럼 싸웠다)이나, 전간기 때의 활약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당시의 윙드 후사르의 전설을 들어보면, 이들 군대는 귀신같이 싸우는 걸로 유명하다(비록 지정학적인 문제, 체급의 한계로 전쟁에선 지지만 말이다). 지금도 폴란드군은 나토(NATO) 육상 전력의 핵심이다.

 

그도 그럴게 나토가 동진하면서 서독이 맡았던 ‘탱커’ 역할을 폴란드가 맡게 된 거다. 안 그대로 동쪽에 러시아가 있어서 육군을 키우고 있던 폴란드에게 나토가 힘을 실어 준거다.

 

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방파제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폴란드에게는 러시아의 위협이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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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에 들어갔다. 예전 동구권 시절부터 써왔던 이런저런 동구권 장비들이 우크라이나로 넘어갔다(Mig-29 전투기부터 시작해서 각종 전차, 자주포 등등). 폴란드는 현실적인 이유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야 했다. 그리고 이참에 동구권 장비들을 모두 치우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18억 1천만 달러(2조 원) 어치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이렇게 보냈으니 그 무기를 보충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당장 현실이 되고 있는 러시아의 위협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2022년 2월 폴란드는 급하게 한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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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부

 

“야, 너네 K-2 탱크 좋더라. 야 그거 당장 보내 줄 수 있냐?”

 

“그거 팔수는 있는데, 너네가 말하는 수량 채우려면 시간 좀 필요한데? 납기 일자 언제까지 해줘야 해?”

 

“지금 당장!”

 

“...... 야,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것도 아니고 탱크가 자동차야? K-2 저거 무게만 56톤이야! 철판 자르는데도 한 세월이야!”

 

“야, 우리도 알아볼 거 다 알아봤어. 너네 육군한테 보낼 3차 양산분 있잖아. 그거 좀 땡겨 주면 안 돼?”

 

“......!”

 

이런 의견이 오갔던 거다. 그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쳐들어갔고, 미국이 자기네들 M1A2SEPv3(최신 개량형이다) 250대를 신속 제공 형태로 보내겠다고 하자 사업 자체가 붕 뜬 거 같았는데, 폴란드가 아예 자기네들 차기 전차 선정 사업에 K-2를 참여시키면서 이야기가 점점 커졌다.

 

다 필요 없고, 지금 폴란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마자 바로 군비 증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기존 4개 사단 체계를 6개 사단으로 늘리는 것과 동시에 GDP 2.2% 수준의 군사비를 3% 수준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놓게 된다(장기적으로 5% 안까지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폴란드 GDP가 한국의 1/3 수준이라지만, 이 정도면 상당한 군비 지출을 하는 거다).

 

툭 까놓고 말해서 폴란드는 태생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하긴,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알만하지 않은가? 두려움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일 거다. 이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가 경제 위기로 휘청 일 때도 폴란드는 국방비를 유지해 왔다. 그러다가 이번에 제대로 풀 베팅에 들어간 거다.

 

“러시아 저색희들 또 전쟁질 한다! 우리도 몽둥이 준비해야 해!”

 

폴란드는 지금 탱크 한 대가 아쉬운 상황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