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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가 아쉬운 폴란드의 사정은 이해했을 거다. 그런데, 하고 많은 무기 중에 왜 하필 한국산이냐는 거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금 당장 3세대 전차 200대를 1년 안에 납품할 수 있는 나라가 전 세계에 얼마나 될까?”

 

‘한국산 무기’ 하면 가성비가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납기일이다. 한국이 제조업 국가란 사실을 이번에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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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과 달리, 냉전이 계속된 한국

 

소련 해체.PNG

고르바초프

 

“저는 독립국가 공동체의 창설과 관련한 정국 상황에 따라서 소련 대통령직 수행을 마칩니다.”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평의회의가 142-H 선언. 즉, 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냉전은 종식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만 해도, 

 

“에이, 그래도 소련이 설마...”

 

그랬는데, 소련이 무너졌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학자가 <역사의 종말>을 통해 사회주의가 패배했음을 선언했을 정도로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동구권은 완전히 무너졌다. 냉전은 끝났고, 군비경쟁에 몰두했던 수많은 서방 국가들은 해빙을 맞이했다. 

 

이 당시 방산 업체들은 저마다 긴축을 외치고, 합병을 외쳤다. 이제 찍어내면 팔리던 시절은 지나가게 됐다. 라인은 폐쇄됐고, 기술자들은 해고됐다.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유럽 각국들은 하나둘 징병제를 포기하게 됐다. 천문학적으로 지출하던 군사비를 복지와 교육 예산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극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냉전 시절 서독은 40만이 훌쩍 넘는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당시 서독군은 세계 3위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농담까지 들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면 소련군의 기갑러시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이 당시 서독군은 수천 대의 탱크와 기계화 부대를 갖추고 있었다. 비록 해군력은 딸렸지만, 지상군 전력과 항공 전력은 나토 내 그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그런데, 덜컥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소련이 붕괴했다. 독일군 숫자는 18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자랑하던 기갑군단은 다 사라졌다. 이제 독일군 3세대 전차는 290여 대가 고작이다. 한국? 한국은 K시리즈만 다 모아도 1,700여 대가 훌쩍 넘어간다. 이건 미국, 러시아 다음가는 수량이다. 

 

탱크들.PNG

 

왜 이렇게 된 걸까? 간단하다. 독일의 냉전은 끝이 났고, 한국의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해빙 무드에 환호하며, 저마다 군축 모드에 들어갈 그때 한국은 북한을 멀뚱멀뚱 바라봐야 했다.

 

“저 개새끼들 때문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우리도 국방예산 돌려서 복지비로 돌리고, 교육 예산도 늘리고... 하 씨바... 북한 저놈들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한국은 여전히 군비 지출을 늘려야 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K-9 자주포다. 탱크나 자주포 이런 물건은 ‘대규모 전쟁’ 즉, 전면전을 대비한 물건들이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탱크로 기동전을 펼치거나 하지는 않잖은가? 물론, 자주포로 화력지원을 하는 모습은 있었다. 그러나 이건 견인포로도 할 수 있는 걸 자주포가 한 경우다. 전쟁의 성격이 바뀌면서 드론이나 특수부대 등이 각광받기 시작했고, 탱크나 자주포같이 커다란 물건들은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냉전이 끝나고 근 30년 가까이 서방 국가들은 새로운 탱크나 자주포를 개발하는 것 보다는 기존의 물건을 그냥... 꾹 참고 쓰던가, 개량을 하는 걸로 대충 때우고 넘겼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K-9 자주포의 영원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의 PzH2000의 경우도 개발 시작은 1980년대였다. 원래 이 녀석은 소련군과 바르샤바 조약군의 기갑러시를 막아내기 위해 있는 기술 없는 기술 다 때려 넣어서 만든 놈인데, 막상 개발하고 나니 냉전이 끝이 나서 입장이 애매하게 됐다. 독일군도 이 녀석을 100대 남짓 들고 있는 게 고작이 됐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에서 이름값을 하고 있는데 그전에는 정말 애매한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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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PzH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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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K-9 자주포

 

반면 K-9은 한국에서만 1,178대나 배치돼 있다. 독일과 딱 10배 차이다. 다시 말하지만, 독일은 냉전이 끝났고 한국은 여전히 냉전 중이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 

 

“북한 새끼들 탱크만 5천 대가 넘어가! 이것들 막으려면 뭐가 필요해? 우리도 탱크 있어야지, 안 그래?”

 

“섭섭하게 대포는 왜 빼? 니들 6.25 때 뭐 배웠어? 밴 플리트 화약량이란 말 못 들었어? 중공군들이 새까맣게 몰려드니까 밴플리트가 뭐라 그랬어? 대포로 조지라 그랬지? 그래, 우리 나라에선 화력으로 몰아붙이는 게 정답이야. 화력만으론 전쟁을 못 이긴다? 그렇다면, 그 녀석이 대포를 더 많이 못 쏴서 그래! 밴 플리트 장군 봐봐. 기존 탄약량의 5배를 쏘니까 중공군들 나가떨어졌잖아. 견인포, 자주포, 자주 박격포, 뭐든 좋으니까 대포 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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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플리트 장군

 

국방부가 포방부라 불리고, 대한민국 육군이 대포에 미쳐 있는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전 세계가 냉전이 끝났다고 저마다 군축할 때 3세대 전차 자체 생산하고, 자주포를 개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다. 

 

그렇게 한 세대가 지나갔다(정말 냉전이 끝난 지 딱 한 세대. 30년이 흘러갔다). 그리고 다시 냉전의 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야, 당장 3세대 전차 어디서 구할 수 없냐? 급하게 한 2백 대 정도 필요한데?”

  

기존에 탱크를 만들던 나라들의 경우 그 기술자와 생산라인들이 다 어떻게 됐을까? 거의 한 세대가량 새로운 전차를 개발하지도 않았다. 생산라인은 다 철거됐고, 기술자들은 다 은퇴했다. 까놓고 말해서 2022년 현재 기준으로 3세대 전차를 백대 단위로 막 찍어낼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3세대 전차에 들어갈 120미리 주포나 1,500마력급 엔진이나 복합장갑 등 주요한 ‘특징’들을 만족시킬 기술력에 이걸 생산해 낼 생산시설, 그리고 적절한 가격.

 

(폴란드 전차 사업에 뛰어든 독일의 레오파르트 2의 가격대가 200억 원 수준인데, K-2는 110억 원 수준이다. 독일의 PzH2000 자주포 1대 살 가격이면 우리나라 K-9 3대를 살 수 있다. 성능은 비슷한데 가격 경쟁력이 넘사벽 수준이다. 최근 5년간 무기 수출 증가율이 세계 1위를 찍을 정도로 한국 방위산업은 약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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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레오파르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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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 전차 ‘흑표’

출처 - 국방홍보원

 

북한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걷지 않고, 그냥 무너졌다면 아마 지금의 한국 방위산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걸 호사다마라고 해야 하는 건가. 

 

2. 유럽 진출의 발판, 폴란드 

 

개인적으로 이번 폴란드 수출에 대해서 매우 기뻐하고 있다. 이 뉴스를 보고 나서 고등학교 시절에 모아놨던 군사잡지를 이번에 다시 펼쳐봤다. 거기에 나와 있는 방위 관련 뉴스라는 게 프랑스의 크로탈 시스템을 들여올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었다(당시 이스라엘제 미사일과 경합을 벌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천마 미사일은 크로탈 개발사인 톰슨-CFS의 기술이전을 받아서 만들어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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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미사일

 

불과 30년 전만 해도 유럽의 방산 장비를 수입하기 바빴다. 그걸 하나둘 라이선스 받고, 기술이전 받고 하다가 이제 자체 개발 장비들을 내놓더니, 급기야 그걸 수출하기에 이른거다. 

 

일각에선 지금은 기본 계약(Framework Agreement)을 한 상태라 이 계약이 어찌될지 모른다고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국제정세와 폴란드의 상황을 보면 계약이 엎어질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폴란드가 한국 측에 수출금융이 가능한지를 확인할 정도라고 하니 이 계약을 엎을 확률은 낮을 것 같다.

 

(무기 수출 관련 수출금융 시스템에 대해선 지난 ‘국방 브리핑 48: SBS K9 자주포 단독 기사에 대한 팩트체크 혹은 기초교양’(링크) 기사를 보면 이해될 거다)

 

한화와 현대 로템이 달려들고 있고, 이제 국내 방위산업은 내수에서 수출로 무게중심을 옮기려 하고 있다. 폴란드에 라이선스를 주고, 그곳에서 생산한다고 하는데 이걸 발판으로 유럽에 진출하려는 거다. 

 

상당히 좋은 판단이다. 폴란드로선 자신들의 방위산업을 육성할 꿈을 품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한국은 이미 동유럽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예전에 대우가 폴란드에 자동차 공장도 짓고 하지 않았나? 현재는 현대 자동차나 SK, 삼성 등이 체코, 헝가리 등에 공장을 세웠다. 

 

이미 토대는 닦아놓은 상태이다. 폴란드가 면허생산에 들어간 다음에는 주변 동유럽 국가를 시작으로 수출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충분히 가능성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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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탈리아까지 제껴보자구~

 

이번 러시아 침공이 폴란드를 포함, 동유럽 국가들에게 많은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됐고, 여기에 아낌없이 돈을 쓸 자세가 돼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누가 돈을 아끼겠는가. 그리고 마침, 한국이라는 나라는 기술부터 생산, 납기일까지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상태였던 게다.  

 

다만 지금 이렇게 계속 무기가 팔려나간다는 건 세계가 다시 갈라지고 있고, 분쟁이 격화되고 있다는 의미이기에 심란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