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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와 상식

 

대선이 한창이던 2021년 12월 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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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링크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는 연이은 반노동 발언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한겨레가 요약한 발언만 봐도 중대재해처벌법 비판, 최저시급제 개악 그리고 지난 대선 최고의 설화 중 하나였던 주 52시간제 폐지 등이 이미 나온 뒤였다.

 

그 시기에, 안타깝게도 또 다른 노동자가 현장에서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경기도 안양시의 도로포장 공사 현장에서 ‘끼임사’로 3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것이다.

 

국민의힘은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윤석열 당시 후보는 현장으로 달려가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었고, 국민의힘은 이 사진을 최대한 활용해 ‘반노동’이란 비판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유명한 사망 노동자 탓하기 발언이 나온다.

 

“운전자가 롤러 시동을 끄고 내려야 하는데, 아마 그대로 시동이 걸린 상태에서 기어만 중립에 두니까 하차하는 과정에서 옷이 기어에 걸려 롤러가 그냥 앞으로 진행했다”

 

“운전자가 시동을 끄고 내리기만 했어도, 간단한 실수 하나가 정말 엄청난, 비참한 사고를 초래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안타깝다”.

 

나는 아직도 이 뉴스를 처음 접한 순간을 똑똑하게 기억한다. 기사에 나온 저 사진이 찍힌 곳은 사고 현장이고, 다시 말해 고인이 떠나신 바로 그 자리다. 그곳을 고작 사고 발생 몇 시간 뒤에 찾아가 구둣발로 고인이 가신 그 자리에 서서 누가 언제 시동을 껐다 끄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실존하리라곤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예의와 상식의 문제다.

 

국민의힘도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당시 대변인의 처량한 발언을 보라.

 

“사고 발생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지만, 윤 후보가 일정을 변경해서라도 안양 현장을 찾아간 것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

 

그들이 생각한 그림으로는 여기서 후보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란 테마로 적절하게 근사한 말을 하거나, 그럴 재주가 없다면 아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서 활자로 나올 기삿거리는 없는 정도가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찍어 둔 사진만 열심히 활용하면 되고, 친노동 분위기를 적당히 띄우는 기사로 적절히 보수 언론의 지원사격을 받아 국면을 타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후보가 그 기회를 오히려 위기로 만들어 버렸고, 더욱 놀랍게도 그 후보가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이 됐다.

 

‘사실 저 후보를 국민의힘도 그다지 반겨 하지 않는 것 아닌가’

 

란 질문이 이때 처음 떠올랐다. 사건은 끔찍했지만, 그 자리에 ‘하루도 지나지 않아’ 후보를 보낸 건 국민의힘이란 정당의 저력이라 할 만 했다. 평균적인 정치인이라면 저 곳에서 실수하기 어렵지만, 그 어려운 자살골을 굳이 기록해 낸 후보를 보고 국민의힘도 적잖이 속을 앓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위화감은 몇 달 간 내 머릿속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옹립된 대통령이 재난을 대하는 방법

 

2022년 8월 8일, 수도권에 이례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8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됐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의 한 반지하 빌라에서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 참사였다(주: 딴지에 그의 동료가 기고한 글 - 링크).

 

대통령실이 당당하게 공개한, 대통령과 서울시장이 몇 시간 전 고인이 사망하신 방의 ‘반지하’ 창문을 내려다보는 사진을 보고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이미 지난해 12월에 충분히 놀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간까지도 나는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국민의힘도 곤란할 것이라는 착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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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비상식적인 상황을 보면 그에 대한 반동으로 상식적인 것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 전에 일가족이 사망한 집의 창문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그것을 대통령실이 직접 국정 홍보에 활용하려 드는 비상식을 직면하니 문득,

 

"이건 이 ‘도구’를 옹립한 사람들도 황당해할 만한 상황이겠군"

 

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난 대선은 대한민국의 보수가 실로 벼랑 끝에 있음을 만천하에 공인한 선거였다. 놀랍게도, 한국에서 가장 큰 보수 정당이 대선 필승 카드라 부를 만한 정치인을 자당 내에서 찾아내지 못했다. 선거 일정은 다가오는데 자당 정치인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선거를 이길 방법이 없던 국민의힘은 상대 정권의 검찰총장을 ‘옹립’한다는 돌파구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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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립된 쪽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정치인이 되고 싶어 된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되고 싶어 된 것도 아니다. 보수 언론의 ‘시대가 그를 불러냈다’는 거창한 표현은 진실의 단면을 반영하고 있다. 정말로 불려 나온 것이다. 당연히 정치인 답게 언행을 다듬을 의사도, 대통령 답게 중압감을 견뎌낼 각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힘 입장에선 대선 후보는 ‘도구’에 불과하다. 유권자가 표를 줄 의향이 있는 인사를 후보에 얹어 놓고, 일단 정권을 가져오기만 하면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국민의힘이 주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반전이 생긴다. 그들이 선택한 ‘도구’는 놀라울 정도로 무능했고, 그 덕에 취임 직후 레임덕이라는 놀라운 상황에 빠져 버렸다. 이대로는 ‘괜히 이긴 대선’이 될 가능성도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의힘도 도구를 잘못 고른 것을 한탄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뉴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진심과 현실

 

사흘 뒤인 2022년 8월 11일,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이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수해 복구 현장을 찾아 이런 발언을 했다.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실언이라고들 보도를 하던데, 영상을 보고도 이것이 실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진심이 나온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발언과 발언 직후, 그리고 시일이 지난 뒤의 국민의힘 대응을 보며, 지난 수 개월 간 뇌리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의문 하나가 의외의 방향에서 풀려버리고 말았다. 국민의힘이 무능하고 운도 없었기에 적절한 대선 후보조차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정당에 알맞은 후보를, 먼 길을 돌아 찾아냈을 뿐이었던 것이다.

 

대통령 개인의 무능과 태만이 실로 독보적인 경지에 달했기에 발생했던 착시현상인 것일까. 후보로 그리고 대통령으로 옹립된 사람이 워낙 상식 밖의 행동만 하니, 매번 옹호할 변명거리나 찾아다니는 국민의힘과 정권 주변인들에게 기이한 측은지심이 생겼던 것일까. 실로 우습게도, ‘저 친구들도 고생이 많구만’이란 감상이 한동안 가슴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알량한 감수성을 한 번에 날려준 점에서 김성원 의원의 저 발언에 깊이 감사한다.

 

대통령이 지나치게 비상식적이라 여당의 적절한 인사가 적당히 정치인 다운 말을 하면 상대적으로 상식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 큰 틀에서 보면 현 정권의 원심력 안에 있는 인사들 중 상식이 통할만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 대통령은 지나치게 비상식적이고, 국민의힘도 못지않게 비상식적이다.

 

둘은 양립할 수 있다.

 

여당이 실패한 정부를 떼내는 방법

 

요 며칠 한국 정가의 뉴스 가운데 가장 파급력이 큰 것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정권의 정면충돌일 것이다.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현 정권을 비난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향후 정국을 낙관할, 혹은 방심할 소재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정권 지지율은 바닥을 기고 있고, 기회가 있으면 지하실을 찾아갈 기세다. 그 정권에 반기를 든 여당 대표는 입에 옮기기 힘든 추문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고, 혐의가 사실이든 아니든 여당 지지층 일각에서 배신자 프레임도 씌워졌다. 민주당이 어부지리를 얻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러나 방심하기엔 이르다.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여론조사 기관마다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높다. 정권 지지율보다는 분명히 높고, 민주당과도 꽤 차이가 나지만 작금의 실정을 되돌아보면 압도적인 차이라 할 정도는 아니다.

 

정권 지지율이 여당 지지율보다 낮은 것은 정권을 비판할 소재도 되지만 달리 말하면 국민의힘이 적절한 시기에 능숙하게 ‘손절’을 해 낸다면 정권의 실패와 당의 실패를 분리하진 못하더라도 멀리 떨어뜨려 놓을 기회도 있다는 이야기다.

 

정권의 실패와 당의 실패를 분리할 때 가장 편리한 구도는 여당이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다. 집권당의 비주류인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 개혁이고 사실상의 정권교체라는 슬로건을 국민의힘이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지금 민주당 지지자들이 내심 기대하는 것만큼 다음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놀라울 정도로 무능한 정권이란 요소를 현 정권은 지나치게 잘 구현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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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민주당과 지지자들이 부디 방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대로 총선까지 남은 기간 동안 현 정권이 실정 만을 쌓아 나가고 국민의힘도 내부 분열로 힘을 못 써 결국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예상은 그럴듯하고 실현 가능성도 높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은 우선 당의 내실을 다질 때지만, 이런 시국일수록 민주당 내부의 실수를 줄이고 정당으로서 힘을 키워 놓아야 한다. 국민의힘이 내부 충돌을 내부 개혁으로 포장해 ‘여당 비주류인 우리를 뽑는 것이 진정한 정권교체’라고 외칠 때, 그들 모두를 한 번에 실각시킬 강력한 대안으로서의 민주당이 유권자의 투표용지 위에 올라와 있어야 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선거가 다가올 것이다. 민주당은 그때까지 하루도 허비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