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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경우, 식민지배를 했던 국가와 받았던 국가는 관계가 좋지 않다. 우리와 일본이 그렇고, 핀란드를 오랜 기간 지배해온 스웨덴의 경우도 마찬가지. 핀란드 사람들에게 스웨덴은 여전히 자국의 이익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다. 이외에도 다수의 국가들은 식민지배를 했던 국가에 대해, 외교적으로야 국익을 위해 무난한 관계유지를 한다지만, 국민적 정서는 적대감이 있는 경우가 다수다. 

 

그런데 유독 식민지배를 했던 국가 중,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과 굳건한 동맹관계를 맺고 좋은 이웃으로 남아 있는 사례가 있다. 바로 영국이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살았던 나라, 그래서 충분히 미움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영국은 어떻게 식민지였던 국가들과 잘 지내고 있을까? 또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왜 잘 지내고 있을까? 

 

흔히, 영연방  

 

‘커먼웰스’(Commonwealth)라는 국제기구가 있다. 우리말로 하면 영연방(英聯邦)으로 표현되는데, 영국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자치 공화국 또는 식민지 지역을 결합한 연합체이다. 총 52개의 국가가 회원국으로 있으며, 연방 수장은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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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멘웰스 회원국.

주황색 국가는 아일랜드와 짐바브웨로

옛 커먼웰스 회원국이었던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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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웰스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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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웰스 로고

 

(참고로, ‘커먼웰스’(Commonwealth)는 공동(Common)의 부(Wealth)를 추구하자는 정치적 목적의 단체를 뜻하는 단어로 영국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단어다. 우리가 커먼웰스를 영연방이라 부르는 이유는 영국을 표기할 때 쓰는 꽃부리 영(英)에, 연이을 연(聯), 나라 방(邦) 즉, 영국으로부터 쭉 이어진 나라들이라 하여 영연방이라 번역해 부른다고 한다)

 

이 연재물은 '커먼웰스'가 유지되는 이유를 디벼보는 연재이다. 이번 편에선 우선, 커먼웰스가 유지될 수 있는 영국의 많은 특징 중 하나를 디벼보겠다.   

 

 

영국인 친구와의 대화

 

영국인들.jpg

출처-<뉴시스>

 

“All British are all Racist” 

(모든 영국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야)

 

어느 날, 영국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들었던 말이다. 당시 브렉시트며 우크라이나 등 각종 주제로 정치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영국 친구가 뜬금없이 던진 이 말에 충격을 받았더랬다. 너무 솔직한 거 아니냐는 식의 답을 하고는 웃고 넘겼지만, 뼈가 있던 발언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친구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랬다. 

 

“세계에 여러 똥(?)을 뿌린 건 영국이고, 흑인의 노예제도를 확장한 것도 영국이었다. 지금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현재의 영국이 꽤나 다민족 국가가 된 것도 영국을 위한 것이다. 겉으로는 국제적인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척 하지만, 사실 이민을 적극 받아들였던 것도 전쟁 후 피폐해진 국가 살림을 재건시키기 위해 노동자 계급이 절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 인류애적 가치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주변을 보면 난민들이 영국으로 건너와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는 것을 못 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닌 척을 해야 하는 게 시대적 소명이라 여겨 아닌 척은 하지만, 실제로 마음속 깊은 곳에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은 마인드가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타인종에 대한 폭행과 같은 범죄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는 암암리에 내재되어 있던 인종차별주의적인 생각이 발산되는 것이라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현재 영국이 커먼웰스(지난 편 참조 링크)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국제화를 주도하고,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이민법(브렉시트 후에도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편이다)을 통해 외국인들의 이주를 지원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기에 이를 넘어서려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는게 아닌가라는 말도 빼 먹지 않았다. 

 

 

영국의 가족주의 / 친구주의 

 

솔직하게 생각을 나눠주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너무 솔직해서 놀랐다는 말까지 전했다. 그랬던니 돌아오는 말, 

 

“We are friends”

(우린 친구잖아)

 

깐부잖아.jpg

 

이미 오래전부터 회자되고 있는 얘기지만, 영국인들은 대부분 표면적인 대화, 가령 날씨나 음식 등으로 ‘스몰 토크’(Small Talk)를 하며, 처음 만난 사람들과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나간다.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는 잘하지만, 오랜 시간 이야기를 이어간다 한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얘기하고 나누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동료가 될 수 있어도 친구가 되기 어렵고, 아무리 친인척이라 할지라도 자주 만나고 교류하지 않으면 가족의 범주에 들어가는 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식탁을 마주하며 정을 나눈 친구, 혹은 가족에 대한 애착은 매우 깊다. 우정을 쌓은 친구에게는 기꺼이 내 것을 양보하고 함께 나누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족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경우는 많다. 

 

지난해(2021년) 11월, 미국의 싱크탱그인 ‘퓨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조사 결과에서도 영국인들의 이같은 특성이 드러난다. 퓨리서치 센터는 “무엇이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가?”(What makes Life meaningful?)라는 주제로 경제순위 상위 17개국 국민들 약 19,0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 질문방식은 특별한 선택지가 없는 개방형(open-ended question)이었다. 다양하면서도 각국의 국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는 조사로 볼 수 있다. 

 

퓨리서치 조사.PNG

Family:가족 / Occupation:직업 / Friends:친구 /

Material will-being:물질적 풍요 / Society:국가,사회,공동체 /

Health:건강 / Hobbies:취미 / Faith:종교,신앙 /

Freedon:자유 / General Positive:전반적 만족 

출처 링크

 

공통적인 측면들이 있지만, 몇몇 국가들에서는 특이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가령, 미국의 경우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종교(5위)가 순위에 포함이 되어 있었고, 우리나라의 경우 물질적 풍요(1위)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르게 가족(4위)에 대한 중요도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의 경우, 그리스와 함께 물질적 풍요가 중요도 순위 안에 없었다. 실제로 오랜 기간 영국에 거주를 하며 우리나라와 크게 차이를 느꼈던 부분이다.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대부분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지 않는다. 돈이 많다고 자랑하지 않을 뿐더러, 없다고 주눅 들어 살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고,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가족과 친구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영국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아주 강한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되기도 한다.

 

 

영국의 개인주의

 

지도.PNG

유럽 국가별 개인주의 정도를 나타낸 지도 

출처 링크

 

우리나라의 경우, 간혹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하는데 실상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기주의(利己主義)는 말 그대로 자신의 이로움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이익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를 말하지만, 개인주의는 이익과 관련 없이 개개인의 특성과 재능을 중요하게 여겨,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 찾아 결정하게 하는 태도다. 때문에 개인의 욕구를 추구하면서도 타인(다른 개인)에 대한 욕망 또한 나와 같은 욕망의 인격체로 대한다. 

 

건강한 개인주의의 결실은 이타주의로까지 번질 수 있는데, 이러한 개인주의적 성향은 16세기 르네상스 이후 발전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유럽 사회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다. 독일의 대표적인 철학자 칸트(I. Kant)의 

 

"너는 너 자신의 인격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도 언제나 인간성을 목적으로 사용하고, 결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

 

는 말은 개인주의에 대한 분명한 시사점이 있다. 

 

유럽 국가에서 전반적으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 위 지도에서 본대로, 영국은 나의 존재와 내 결정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성향이 더욱 강하다. 동시에 나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가족과 친지, 친구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있는 가족/친구주의가 강하다.

 

이런 성향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강한 가족/친구주의 성향이 된 이유

 

결론부터 얘기하자. 다 가진 후, 다 잃어봤기 때문이다.

 

영국은 1,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국제적인 명성이 추락한 것은 물론,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삶을 마감했다. 국토의 수많은 중요 부분이 폭격으로 폐허가 됐는가 하면, 경제적 부를 포함하여, 많은 인프라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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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런던 대공습 뒤 우유 배달부가

잔해를 헤치며 배달하는 모습.

출처-<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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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시민이 런던 대공습 이후에도 홀랜드 하우스의

잔해 속에서 책을 찾고 있다.

출처-<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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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대공습 후, 부서진 집더미 위에서

티타임을 갖는 영국 여성.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라 불리던 영국은 18세기 신업혁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18-19세기,  곳곳을 주물럭거리며, 세계를 주도했다. 고도 성장에 취한 이들은 교역이라는 명목하에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하거나 근대화에 이르지 못한 국가들을 침략, 식민지로 삼아 인권을 유린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영국 내에서는, 사회적 약자로 취급받는 어린아이들과 여성, 노인들이 극도로 열악한 노동 현장으로 내몰렸다. 아프리카인들은 노예가 되어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받으며 사고 팔렸다. 영국은 그렇게 목적(부)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욕망의 끝엔 처참하고 잔혹했던 두 차례의 전쟁이 있었고, 이 전쟁을 거치며 영국은 많은 것을 잃었다. 

 

이들에게 남은 건 무엇이었을까? 돈도, 명예도, 권력도 한순간에 잃고 만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한 이들에게 남은 건,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는 가족과 친지, 친구와 이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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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북폴리오>

 

영국에 있는 수많은 구호단체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노동조합 형태의 각종 자선단체들이 다수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크리스챤 에이드(Christian Aids), 에이지 유케이(Age UK),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사실, 지난 3년간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 이 기간 동안 영국은 수천만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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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지 유케이(Age UK)

빈곤, 고립 및 방치로 어려움을 겪는 불우한 노인들을

돕기 위한 영국 기반 국제 자선 단체.

 

하지만,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통해 주변과 이웃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주는 여러 활동들도 진행됐었다. 가령 Food Bank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락다운 기간 동안 거동이 불편한 이들에게 직접 식료품을 배달해주거나, 직장을 잃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나누는 일, 노동조합을 통해 집값이나 월세 등을 받지 않고 거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등의 일이 대표적인 예다. 

 

사실,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진 나라가 영국이고,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사상을 만들어낸 국가답게 개개인의 생각과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을 수 있겠다 여겨지겠지만, 실상은 건강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이타주의가 삶에 녹아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신들이 했던 인종차별에 대한 뿌리 깊은 반성과 전쟁을 통해 배운 성공에 대한 다른 관점 – 돈이나 권력이 아닌 가족과 이웃에 대한 가치관 – 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전술했듯 아직 암암리에 인종차별적 마인드를 가진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를 극복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가령 얼마 전, 절찬리에 상영되었던 넷플릭스(Netflix) 프로그램 브리저튼(Bridgerton)에서 주인공인 공작 역을 흑인 배우인 레게 장 페이지(Regé-Jean Page)가 맡고, 유명 어린이 프로그램인 텔레토비에서도 동양인, 아프리카인, 서양인이 섞여 있는 모습을 보면, 자신들의 가장 큰 약점인 인종차별에 대한 극복 의지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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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에서

남자주인공 사이먼 바셋 공작 역을 맡은 레게 장 페이지.

출처-<넷플릭스>

 

자신들의 모습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발현된 건강한 개인주의와 가족/친구주의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도 발현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졌었기에 가장 미움받을 것 같지만, 각종 친목 행사들를 진행, 동등하고 서로 존중하는 친구 국가로서 잘 지내려고 어떤 나라보다 노력을 쏟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태도가 지금의 영국이 '커먼웰스'라는 세계적 국가 모임을 유지하며, 아직은 해가 떠 있는 나라로 있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