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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끝난 독일의 보복

 

네덜란드 망명정부와 국민들, 그리고 몽고메리가 기대했던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이 실패로 끝나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네덜란드 국민들이었다(몽고메리는 이런 뻘짓을 했지만, 2차 대전이 끝난 뒤 영국군 참모총장을 거쳐 후에 나토군 최고사령관 대리 자리까지 오른다).

 

독일군의 보복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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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크 슈투덴트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네덜란드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이었던 쿠르트 슈투덴트(Kurt Student)는 네덜란드의 ‘괘씸한’ 행동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마켓가든 작전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1944년 10월. 하나의 선언을 한다.

 

“네덜란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작전 실패 직후 즉각적인 보복 조치에 들어간 거다.

 

방법은 간단했다. 도시로 들어가는 식료품 공급 차단. 농촌에서 생산된 식료품을 비롯해 각종 연료들이 들어가는 길목과 수송 루트를 다 차단해 버린다. 한마디로 도시를 고사(枯死) 시켜 버리겠다는 거다.

 

(이 부분은 우리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평시에 도시는 모든 물자가 모이는 풍요로운 곳이지만, 도시는 인간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게 없다. 그저 소비만 할 뿐이다. 그런데 인구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한 마디로 말해 도시로 연결되는 도로 몇 개만 막아놓으면 도시 전체가 굶주린다는 거다. 이건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통해 우리도 잘 기억하고 있을 거다. 전쟁 중에 도시는 취약한 목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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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절정기 지도. 

본문에서 진행 중인 작전은 이로부터 2년 후다. 

네덜란드는 1940년 당시, 단 5일 만에 점령된다 

출처 - 링크

 

이렇게 네덜란드 대도시에 대한 고사작전에 들어갔으나, 아무리 독일이라도 이건 정치적으로 너무 큰 부담이었다.

 

“아무리 보복 조치라지만, 사람들 보는 눈이 있잖습니까? 당장 450만 명이 굶어죽게 생겼는데... 이러다 덜컥 연합군이 이기기라도 한다면 우리 모두 전쟁범죄로 군사 법정에 설 겁니다.”

 

결국 네덜란드 도시들에 대한 고사작전은 철회됐다. 6주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고사작전을 풀었으면, 유통이 풀리고, 대도시에 물자가 돌아야 하는데 대도시에 물자가 돌지 않는 거다.

 

“왜 물자가 안 도는 건가? 고사 작전은 중지시키지 않았는가?”

 

“그게... 철도 노동자들이 복귀하지 않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고립되는 네덜란드

 

마켓 가든 작전 당시 네덜란드 망명정부의 요청에 호응해 파업을 벌였던 네덜란드 철도 노동자들이 지하에 숨어 나오지 않는 거였다.

 

“독일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래, 돌아가는 판을 보아하니 전쟁도 곧 끝날 거 같은데, 괜히 나섰다 봉변당하느니 전쟁 끝날 때까지 기다려 보자.”

 

마켓가든 작전 당시, 연합군에 호응해 파업을 벌였던 네덜란드 철도 노동자들이 복귀하지 않은 거였다. 철도가 마비되니 유통이 모두 멈춰 서게 됐다. 이야기가 복잡하게 흘러갔다. 물자가 있어도 나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나마 있는 물자들도 독일군이 쓸어가는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농업 생산을 보면, 1940년부터 독일 점령지의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농업용으로 사용하던 ‘말’들을 독일군이 징발해 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농사용 소를 빼앗아 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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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기병여단

출처 - 위키피디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 2차 대전 독일군은 탱크를 활용한 전격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독일의 프로파간다다. 대부분의 독일군들은 말을 주요 수송수단으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닥치는 대로 말을 빼앗아갔고, 농사를 지을 말들이 사라지자 농업 생산량은 기록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네덜란드 도시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마켓 가든 작전이 끝난 지 2달 뒤인 1944년 11월,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 주민의 1일 배급량은 1,000칼로리였는데(다이어트 식단으로 권장되는 하루 칼로리가 남자 1800칼로리, 여자 1500칼로리란 걸 생각해 보라), 1945년 2월이 되면 580칼로리로 줄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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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배급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전황이 어려워지면서 독일의 배급체계가 서서히 멈춰 서게 됐고, 종국에 가서는 완전히 붕괴된다. 이제 네덜란드 국민들은 애완동물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암시장에서조차 식량을 구하기가 어렵게 됐다.

 

식량뿐만이 아니었다. 연료도 귀해져 네덜란드 국민들은 추위에 떨었다. 말 그대로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야 했다.

 

문제는 금방 끝날 거 같은 전쟁이 계속 길어졌다는 거다. 1944년 크리스마스는 지나갔고(독일군이 아르덴에서 다시 한번 대공세를 펼쳤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6화의 ‘바스토뉴 편’이 바로 이 전투였다), 1945년 봄이 될 때까지 네덜란드는 독일 점령지로 남아 있었다.

 

하늘에서 빵이 내린다면

 

점령군인 독일군이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데, 이미 패전 직전까지 몰린 상황이라 이걸 어떻게 손써볼 방법이 없었다. 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거다. 이제 공은 연합국 쪽으로 넘어갔다.

 

“말도 안 되는 마켓 가든 작전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닙니까? 우리 네덜란드 사람들 씨를 말려 버릴 생각입니까?”

 

“지금 누구 잘잘못을 따질 때입니까? 당장 네덜란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을 보내는 방법을 검토 중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지역에 보급을 하려면... 공중보급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 중보급이요? 또 낙하산 부대를 떨어뜨리자구요?”

 

“낙하산 부대가 아니라... 폭격기를 동원한 투하입니다.”

 

“... 포, 폭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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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하된 식품 목록들

출처 - 링크

 

“폭탄 대신 식료품을 실어서 떨어뜨리는 겁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폭탄 대신 빵을 뿌리는 겁니다. 도시에 대한 대단위 폭격에 익숙한 애들이니까 이런 일에는 전문입니다. 아울러 어느 세월에 비행장 착륙시키고, 이걸 분배하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식량을 보급하려면 직접 투하가 가장 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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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에 실리는 빵폭탄 자루

 

이렇게 해서 식량 투하 작전이 입안됐다. 문제는 이 당시 네덜란드에는 독일군이 계속 주둔해 있었다는 거다. 폭격기가 날아온다면, 당연히 대공포가 발사될 테고, 작전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게 뻔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은 네덜란드 점령 독일군과 접촉을 하게 된다.

 

“인도적 차원의 식량 보급이다. 믿어 줘.”

 

“너라면 믿겠냐? 밤낮으로 폭격기 띄워서 우리 도시들을 불바다로 만들었는데...”

 

“속고만 살았냐? 지금 전쟁도 거의 다 끝났어. 베를린 포위됐다고!”

 

“전쟁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냐!”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영국 공군이 먼저 나섰다.

 

“이게 다 몽고메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결자해지라고, 우리가 해결하자.”

 

1945년 4월 29일 영국군 폭격기 2대가 네덜란드로 날아갔다. 평소라면, 수백 대의 폭격기가 밤에(영국 공군은 야간 폭격을 담당했다) 고 고도에서 도시 전체에 폭격을 가했어야 하는데, 독일군이 의심하지 않도록 고도 200미터 아래로(바로 올려다보고 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낮게) 내려가 폭탄창을 열었다. 그리고 빵 폭탄을 투하했다. 독일군도 손 뻗으면 닿을 거리의 폭격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대공포에 포탄을 장전했지만, 떨어지는 게 빵상자라는 걸 확인하고는 사격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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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만나(Manna)작전의 시작이었다. 뒤이어 미군도 차우하운드(chowhound) 작전에 들어간다. 영국과 미국 공군은 각각 6,680톤과 4,000톤의 빵과 식량을 네덜란드 땅에 뿌렸다. 1945년 4월 29일에 시작된 이 작전은 히틀러가 죽은 뒤에도 일주일이나 계속됐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를 가지고, 인도적 차원의 식량 ‘폭격’을 했다는 사실이 이채롭게 보이지만, 결국 이 모든 일의 사단은 몽고메리에게 있었던 걸 생각하면...

 

어쨌든 네덜란드 국민들은 이 ‘빵 폭격’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전쟁은 끝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