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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함식(觀艦式)이란 게 있다(관함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국방 브리핑의 다음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국방 브리핑 37 : 과학자가 화나면 어떻게 될까1]).

 

자 대충 관함식에 대해서는 이해했을 거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 이만큼 쎄!”

 

를 보여주는 행사다. 관함식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평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해군력(일선 경계부대, 독[dock]에 들어가 수리 중인 배 다 빼고)을 다 빼낸 다음, 이걸 한 장소에 집결한다. 그리고 이걸 보여주는 거다. 여기에 만약 핵 한 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한 나라의 해군력이 다 날아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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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제주 인근 해상에서 열린 해군 국제관함식.

태극기와 함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탄 배에 걸렸던

조선 수군 대장기 ‘수자기’가 걸려 있다

출처-<연합뉴스>

 

<기동전사 건담 0083 스타버스트 메모리>를 보면 관함식을 위해 모인 연방의 함정들에 핵을 한 방 먹인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연방군 전함이 작전 불능 상태에 빠진다. 애니메이션이기는 하나 관함식에 상당수의 전력이 집중됐다는 것, 그리고 이걸 빌미로 일선의 경계가 약하진 틈을 타 기습한다면 꽤 골치 아파진다는 것은 설득력 있다.

 

1. 2세기 전부터 시작한 일본 관함식

 

일본의 관함식 역사는 꽤 오래됐다. 21세기 들어서 일본 관함식에 참석하네 마네를 이야기하는데, 일본은 이미 19세기 시절부터 관함식을 열었다. 미국의 흑선 내항(黒船来航)이 있었던 1854년. 그 후 일본 내부에서 엄청난 진통이 있었고, 14년이 지난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다. 일본 근대화의 시작을 알린 메이지 유신. 이때부터 관함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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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3월 8일 내항한 미국의 흑선

 

하긴, 자신의 근대화를 세상에 알리고 일본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 당시 보신 전쟁 같은 ‘내전’이 이어지고 있었던 상황이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일본은 6척의 군함을 동원해 관함식을 시작했다(당연하게도 메이지 덴노가 이 관함식에 참여했다). 이때 프랑스군도 1척의 군함을 보냈다.

 

일본 역사에서 흑선(쿠로후네) 내항 사건은 주요한 분기점으로 인식된다. 이러다 보니 바다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남달랐다. 거기다 일본은 원래 섬나라였지 않은가? 여기에 영국이 붙었다. 일본이 지금의 위치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메이지 유신. 그리고 당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펼치던 영국의 ‘필요’가 결합해서였다.

 

당장 러시아를 견제해야 했던 영국에게는 동아시아에 적당한 파트너가 필요했고, 그 결과 영국은 일본에 아낌없이(?!) 해군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했다(물론, 일본이 영국에 수많은 군함을 사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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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 영국 관함식(fleet review)

 

원래부터 해군력 증강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본인데, 대영제국이란 든든한 파트너까지 얻게 된 일본은 미친 듯이 함대 건설에 나서게 됐고, 이렇게 건설한 함대를 가지고 ‘뭔가’를 해야 했다. 그 뭔가가 전쟁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제국주의 일본이라지만, 시도 때도 없이 전쟁할 수는 없는 일. 이들이 눈에 띈 건 바로 대영제국의 관함식이다.

 

관함식은 그 자체로만 봐도 외교적·군사적으로 ‘메시지’를 줄 수 있는 행사이다. 공군력에 대한 평가가 있기 전, 그리고 핵무기가 나오기 전의 ‘해군력’은 그야말로 한 나라의 전략 그 자체를 대변하는 군사력의 핵심처럼 평가 받았다(이러니 한 나라의 국가 예산 30%를 전함 건조예산으로 쏟아붓는 짓을 했던 거다).

 

이쪽 분야에 관심이 덜 한 일반인들에게 일본의 군사력은 피부로 와 닿지 않지만, 2차 대전 직전, 일본 해군의 전력은 세계 3위였다. 대단했다. 이 당시 해군 전력은 오늘날의 ‘핵전력’에 비견될 만한 국가의 핵심 군사력이다.

 

이 전력을 그냥 놀릴 순 없는 거다. 심심하면, 

 

“야, 우리가 홍어 x으로 보이냐? 나 일본이야!”

 

를 시전 해야 하는데, 이럴 때 활용하는 게 관함식이다.

 

2. 1933년 관함식을 연 일본의 속뜻

 

일본 제국주의 시절, 그러니까 메이지(1868~1912)·다이쇼(1912~1926)·쇼와(1926~1989. 제국주의 시절은 1945년까지) 시절 일본은 여러 차례 관함식을 열었다. 이 중에서 정말 눈여겨봐야 하는 게 1933년의 관함식과 아래 소개할 1940년 관함식이다.

 

1933년 관함식

 

1933년 관함식의 경우는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진 이후, 중국 침략을 한참 진행하던 시절이었고, 아울러 점점 일본이 군국주의로 변해가던(정확히 말하면 본 모습을 드러내던) 시점이었다. 런던 해군 군축조약 탈퇴 2년 전의 상황이기에 생각해 볼 게 많았다. 이 당시 일본은 쇼와 덴노가 참석한 가운데 161척의 군함과 200기의 비행기를 동원했다. 그야말로 위력과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1933년의 분위기를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경제 대공황의 한 가운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중국으로 치고 들어간 일본.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어서 침략 야욕을 고스란히 드러낸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고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게 된다. 1933년은 역사적으로 분기점으로 삼아야 할 한 해인데, 바로 독일과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폭주하기 시작한 한 해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인 1933년 8월 25일 요코하마 앞바다에 군함 161척을 모아놓고 대대적인 관함식을 연 거다. 어떤 목적인지 충분히 이해가 갈 거다.

 

3. 진주만 공습 1년 전, 1940년 관함식

 

1933년 관함식과 함께 특기할 만한 것이 1940년의 관함식이다.

 

1940년 관함식 

 

1940년도 일본 역사에 특기할 만한 해인데, 일본에선 황기(皇紀) 2600년이 바로 서력 1940년이다. 왜 2600년이냐면, 진무 덴노(일본 초대 천황)가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계산하면 1940년이 황기 2600년이 되는 해이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1940년의 상황이다. 중일전쟁은 계속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고, 이 와중에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했다. 일본은 미국을 버리고 독일 편에 완전히 붙어야 하는 가를 고민하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독일이 유럽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돌아다니자 이때 떨어진 아시아의 식민지(당장 프랑스의 식민지부터)들을 주워 먹기 시작하던 때가 1940년이었다.

 

국제사회 입장에서는 일본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아니, 그 이전부터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 특히나 미국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1937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일전쟁, 뒤이은 난징 대학살로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미국은 1938년부터 일본에 대한 군수용 물자 수출 금지 조치를 내렸고(1938년 당시 일본은 고철의 74%와 구리의 93%를 미국의 수입에 의존했다. 통계를 다시 보니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한 게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 1939년엔 미일 경제협력 조약을 폐기했으며, 대망의 1940년에는 일본에 대한 수출제한법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그 유명한 삼국 동맹조약(Tripartite Pact)이 1940년 9월 27일에 채결된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다 보니 미국과 서방세계가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일본 국내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당장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국민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대규모 징병. 일본 국내의 민심을 다독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게 황기 2600년이다.

 

일본 정부는 이 당시 흐트러진 민심을 통합하기 위해 황기 2600년 기념행사를 엄청나게 준비했다. 전 세계 유명 작곡가들에게 봉축 곡을 의뢰해서 만들고, 각종 행사를 만들고 2600년을 기념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야쿠쇼 코지 주연의 <웃음의 대학>이란 영화를 보면, 검열관 사키사카 무츠오가 입버릇처럼 진무 덴노와 황기 2600년을 내뱉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이 194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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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던 <웃음의 대학>

출처-<다음영화·연극열전>

 

행사 5년 전부터 ‘기원 2600년 축전 준비위원회’를 발족해서 일본의 여러 신궁과 능묘의 정비 행사를 추진했고, 올림픽과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겠다는 계획까지 내놓으며 온갖 준비를 다 했지만, 중일전쟁과 이어지는 2차 대전으로 뭔가 ‘평화적인’ 분위기 대신 전체주의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나마도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애초 계획과 달리 행사는 간소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적인 부분이 빠질 수 없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제로센 전투기의 이름도 이 황기에서 나왔다. 제식 명칭인 영식 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의 영식은 황기 2600년인 1940년에 정식 채용됐기에 0식이란 이름이 붙었다. 해군이 이러니 육군도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1940년에 육군이 내놓은 기관총에 100식 기관단총이란 명칭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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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식 함상전투기, 줄여서 제로센(零戦).

출처-<위키피디아>

 

1940년 10월 11일 일본은 요코하마 바다에 군함 98척과 항공기 527기를 동원해서 대규모 관함식을 개최한다. 삼국동맹 체결하자마자 관함식을 열었다는 것. 그것도 세계 3위의 해군력을 박박 긁어모아서 관함식을 열었다는 건 정치적으로 상당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이때도 쇼와 덴노가 참석했고, 분위기 한 번 제대로 끌어 올렸다. 내부적으론 일본 국민들을 일치단결시키고, 어떤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다면 외부적으론

 

“우리 일본이 만만하게 보이냐? 우리가 이래 보여도 세계 3위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나라야!”

 

라고 천명하는 모습이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랑 한 판 붙어 볼 자신 있어?”

 

라고 과시하는 모습이다.

 

당시 일본 해군이 관함식을 열었다면, 일본 육군도 이에 질세라 10월 21일 황기 2600년 기념 관병식을 열게 된다. 관함식이 군함을 사열하는 거라면, 관병식은 육군의 장비들과 병력을 사열하는 거로 보면 된다. 우리나라도 국군의 날 행사 때 많이 하지 않는가?

 

보면 알겠지만, 일본 관함식의 역사는 꽤 뿌리가 깊다. 일본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관함식을 꽤 유용하게 활용해 왔다. 그리고 그 역사는 패망 이후에도 이어진다.

 

<계속>